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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May 23. 2021

<소설> 그때, 진해 아가씨 이야기 (1~6편)

<1편>


서울구경 가는 기차 안에서


[1971년 어느 날]


 언니를 꼬셔서 드디어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에 갔다 온 가스나들이 어찌나 자랑을 하는지...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서울은 정말 어떤 곳인지 보고 싶었다.


  난 돈 모아둔 게 없었지만 언니는 용돈을 받으면 안 쓰고 늘 저축을 해두었기 때문에 꽤나 큰돈을 모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주일 전] 


 " 언니야, 니 서울 안 가고 싶나? " 내가 언니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 직전 타이밍을 골라 불 꺼진 방에서 물었다.


 " 와? 니 와 그라는데? 또 무슨 망상을 하노? " 이미 요를 펴고 일자로 쭈욱 반듯하게 누워 이불을 목까지 덮은 언니가 눈을 감은 채 응수했다.


 " 아이, 망상이 아이고 니 진수이 알재? 그 가스나가 지난주에 서울 놀러갔다왔다 아이가? 진수이 삐 아이다. 저번 달에 갱미하고 미자도 놀러 갔다. " 언니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지만 내 이야기는 틀림없이 그녀의 귀에 꽂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서울 얘긴데 지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반응이 없을까.


 " 내 친구 영서이도 얼마 전에 갔다 왔다. 삔 하나 사가 와서 선물 주드라. " 언니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럼 그렇지. 지도 서울 갔다 온 친구들 이야기 계속 생각하고 있던 거지. 니, 딱 걸맀다. ㅎㅎㅎ  


 이참에 언니를 확실히 설득해서 필히 서울구경을 한 번 가기로 마음을 궂히는 순간이었다.


[서울행 기차 안]


 몇 주 동안 밤이고 낮이고 얼굴 보면 조르고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한 끝에 언니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기차표도 언니 돈으로 마련하기로 했다. 가는 동안 기차 안에서 파는 맛있는 간식도 눈치 보면서 언니한테 사달라고 할 요량이었다.


 이번 서울 여행은 1박 2일에 그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이게 어딘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서울구경을 갈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지 않았는가.


  초록빛 벨벳 비슷한 재질로 된 기차 좌석의 등받이에 가만히 등을 밀착시켜 기대어 보았다. 느낌이 아주 새로웠다. 창밖을 반복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전신주며 논밭의 풍경도 좋았고, 조금 눈을 들어 올려다보면 이내 눈을 맑게 해 주는 파아란 하늘과 드문드문 걸쳐 있는 구름들도 보기 좋았다.


 조금 있다가 카트가 지나가면 빨간 망에 든 삶은 달걀도 사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생일상 받은 어린아이처럼 마냥 들뜨고 기분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객실을 둘러보았다. 다들 서울까지 가는 사람들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걸 보면 사는 게 괜찮은가 보다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중에 형편이 좀 괜찮아지면 자주 이렇게 기차 타고 서울이든 어디든 여행 다니며 살아야지 하고 생각해 보았다.


 " 언니야! 좋재? 내하고 서울 가기로 한 거 잘 생각했재? " 옆에 앉아 있던 언니 쪽을 쳐다보며 나는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 그래. 니 때문에 이래 또 서울도 가보네. "  언니는 나처럼 격한 흥분을 표하지 않았지만, 얼굴 전체에 흐르는 미소와 호의적인 말투에서 그녀 또한 많이 설레고 들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승무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우리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저, 죄송하지만 어떤 분께서 두 분을 식당차로 잠시 모셔달라고 부탁하셨어요. "


" 네? 누가요? 누가 우릴 불렀어요? "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승무원 아가씨한테 반문했다. 언니도 사뭇 놀란 표정으로 나와 승무원을 바라봤다.


" 저도 정확히 누구신지는 잘 모르겠는데 군인인 것 같아요. 두 숙녀분을 식당차로 모시고 싶다고 정중히 말씀하셨어요. " 승무원은 아마도 경상도 사람이 아닌 듯했다. 말투에 사투리가 섞여 있지 않았다.


" 그래요? 어떤 남자가 우리 밥 사준다케요? 와, 누군지 모르겠지만 땡잡았네. 히히. " 기차 식당칸으로 불러 밥을 사준다고 하니 그 남자가 대체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빨리 식당칸으로 가서 무슨 메뉴가 있는지 보고 싶었다.


" 야! 니 미칬나? 누군 줄 알고 덮썩 따라갈라카노? " 언니가 강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 아가씨, 그 아저씨한테 전해 주세요! 모르는 사람하고 같이 밥 먹을 수 없다고요. " 언니가 승무원에게 이어 말했다.


" 언니야! 뭐 그리 까탈스럽노? 밥 사준다는데 가서 보고 그냥 먹고 오자! 니 싫으면 나 혼자 갔다 오께! " 

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는 여승무원을 따라 식당칸으로 향했다.


 잠시 후 식당차 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섰을 때, 눈에 확 들어오는 남자가 한 사람 보였다. 오후의 강한 햇살이 들이치는 창가 테이블 좌석에 앉아 있던 그는 새하얀 제복 차림이었다. 딱 보기에도 군인이었고 제복의 종류로 미루어 보아 해군 장교로 여겨졌다.



<2편>


그 남자


[1971년 서울행 기차 식당칸]


" 아즈씨가 우리 불렀어예? " 하얀 제복을 입고 머리는 위로 바싹 쳐서 올린 군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근데 이 양반 얼굴이 완전 아프리카 사람 같이 까맣다.


" 아, 안녕하십니까? 일단 좀 자리에 앉으십시오.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ㅎㅎㅎ " 어깨 위 계급장에 다이아몬드가 양쪽으로 세 개씩 박힌 그가 검게 그을린 얼굴에 미소를 한 아름 지은 채 말했다.


" 아즈씨, 해군인갑네? 근데 얼굴이 와그리 까매요? 옷은 새하얀데 얼굴이 그리 깜상이라 억수르 튄다 아임니꺼. ㅎㅎㅎ " 


" 아, 저 실은 월남전 갔다 와서 그렇습니다. ㅎㅎ 점심 식사하셨습니까? 전 아직 못했는데 괜찮으면 같이 드시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제일 맛있는 걸로다 사드리겠습니다. "


" 우리도 아직 안 무읐으요. 근데 우리 언니 안 온대요. 아즈씨, 우리 언니한테 관심 있어 부른 거 맞지예? "  군인 아저씨가 식당차에서 뭘 사줄지도 기대가 됐지만 이 사람이 우리를 부른 이유가 궁금해서 대뜸 물어 물었다.


" 아, 옆에 계시던 분이 친언니십니까? 그러고 보니 두 분이 닮으신 것도 같습니다. 하하. 아참,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해군 대위로 복무 중인 이태은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저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 


 우리는 이렇게 첫인사를 나눴고 예상치 못한 인연이 서울행 기차 안에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 인연이 앞으로 우리들이 살아갈 수십 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식당차에서 사준 경양식 돈가스는 내가 어른이 되어 먹어 본 음식들 가운데 단연 최고로 맛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며 마지막 한 조각을 아쉬운 맘으로 입속에 집어넣었다.


" 와, 원래 기차 음식이 이리 맛있으요? 진짜 맛있네요. 언니는 이리 맛있는 것도 못 얻어묵고. 언니랑 저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요. ㅎㅎ 언니 저거는 에이형이고 나는 오형이라서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스타일도 완전 딴판 아임니꺼. "


" 아, 그렇구나. 혹시 형제가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3남 4녀 중에서 다섯째고 위로 형이 두 분, 누이가 두 분 계십니다. 밑에는 여동생들입니다. "


" 우리는 2남3년데, 제일 우에가 오빠고 제일 아래 막내가 남동생 아임니꺼. 중간에 아까 같이 있던 언니, 나 있고 밑에 여동생 하나 있습니더. "


 우리는 간단히 통성명을 하고 호구조사도 대충 마쳤다. 이 남자는 충청남도 출신인데 원래는 일반 대학교를 다니다가 가정 형편이 어렵고 뜻하는 바가 있어 해군 사관학교에 지원하여 장교가 되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햇살이 환히 빛나던 하얀 해군 제복이 눈에 들어왔고 그다음으로는 마치 옻칠한 새카만 장처럼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빛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흘끔흘끔 그의 생김새를 뜯어보니 움푹 들어간 눈에 쌍꺼풀이 또렷했고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일 만큼 볼살이 빠져 깡마른 얼굴이, 다부지고  사내다운 매력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돈가스를 맛나게 얻어먹고 후식으로 사이다까지 빨대에 빨아 쪽쪽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 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언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 남자는 그렇게 조바심을 내는 것 같지 않았다. 제법 말주변이 좋아서 그 자리에 앉아 한 시간 반인가를 떠들며 시간 지나는 걸 잊게 해 주었다.


 " 저기요 아즈씨, 저 이제 언니한테 가볼라케요. 언니가 걱정할 거 같아서예. " 맛있게 먹고 시원하게 마시고 자리를 뜨려 하니 조금 미안해진 내가 자리를 뜨는 이유를 갖다 붙여 말했다.


" 그러십시오.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습니다. " 그가 정중하나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아니요. 너무 잘 얻어 묵고 호강했어예. ㅎㅎ 대전에서 내리신다켔지요. 일 잘 보고 가세요. 아즈씨." 언제 또 볼지 모를 남정네한테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 아참, 저기 혹시 진해 다시 돌아가면 제가 백장미 제과에서 주말에 언니 분하고 같이 초대해서 맛있는 걸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면 집 전화번호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



<3편>


그녀가 사라졌다


[1971년 4월 진해]


 해마다 이맘때면 진해는 벚꽃의 만개와 군항제로 들썩이곤 했다. 일제 치하의 슬픈 잔재로 남은 벚꽃나무 가로수들. 분홍빛깔, 흰빛깔로 거리거리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의 아름다움은 언제 그곳에 뼈아픈 시간이 지나갔는지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그저 바라보다가 넋을 잃기 때문이다.


 집 주변에 있는 양어장도 이미 꽃들이 한창이라 진해 토박이들 뿐 아니라 부산, 마산, 창원, 거제 등 비교적 가까운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서울 등 먼 곳에서 방문한 사람들도 이 시기에는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외지인들이 너무 많아져 불편하다고 투덜댔지만, 나는 진해가 이렇게 이쁘게 변신해 많은 외지인들을 유혹하는 것이 너무도 흥분되고 즐겁게 느껴졌다.


 때르릉 때르릉 때르르릉 ~~~

 마루에 있는 검은색 전화기가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 여보세요? "

 다른 사람이 받기 전에 내가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아, 네~~~  저기 고애련 씨 댁입니까? "

 똑 부러지는 발음에 나지막한 목소리의 남자였다. 순간 필이 왔다.


 " 네~~  제가 애련인데요. 누구세요? "

 대충 누군지 감이 왔지만 모르는 척 누구인지 물었다.


 " 아! 애련씨! 잘 지내셨습니까? 저 이 태 은 입니다.

 일전에 기차에서 만났던! "

 그가 나인 것을 확인하자 목소리를 한 톤 올려 기쁘게 자기가 누구인지 밝혔다.


 "아~~~ 아즈씨!!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이대위~~ 아즈씨!! ㅎㅎㅎ "

(당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라는 노래가 유행했었다.)

 기차에서 봤던 해군 대위 아저씨였다. 처음엔 모른 척했지만 이제 누군지 신원이 밝혀졌고, 지난번엔 기차 식당칸에서 정말 세상천지 맛나는 돈가쓰와 사이다까지 얻어먹었기에 반갑게 이야기했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 김추자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
말썽 많은 김 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상사
동네 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기웃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 동네잔치하네
폼을 내는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믿음직한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 저기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되시면 우리 탑산에 놀러 갔다가 백장미 제과에서 맛있는 빵 먹을까요? "

이태은 대위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왔다. " 저... 그리고 혹시 수련씨도 시간 괜찮으신지 좀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  그럼 그렇지. 언니 얘기 왜 안 하나 했다.


" 언니예? 언니한테 물어보께예. 아직 언니 퇴근 안 했는데 좀 있다 오면 물어보고 연락 드리께예. 근데 아즈씨! 언니 있지예. 실은 만나는 사람이 있으예. "  지난번 기차에서는 먹는 데 정신이 팔린 데다 그와 하도 신나게 떠드는 바람에 정작 언니 얘기는 많이 못했다. 그는 신사였다. 비록 내가 아니라 언니한테 관심이 있어서 접근했지만 선머슴 같은 내게도 무척 친절하고 깍듯이 대해 주었고 대화를 하는 중에도 나의 이야기에 집중해 주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 아...  "

그의 입에서 작지만 탄식과도 같은 소리가 살며시 새어 나왔다.


" 아, 그렇구나. 괜찮습니다. 뭐. 그냥 애련씨하고 수련씨하고 같이 주말에 탑산 벚꽃놀이 놀러 가고 제과점 가서 맛있는 거 먹고 그렇게 좋은 시간 보내고 싶어서 연락드린 겁니다. 수련씨한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 주세요. ㅎㅎㅎ "  그가 짧은 찰나, 실망한 모습을 수습하고 다시 시도를 하고 있었다.


" 마, 그라입시다. 솔직히 골키파 있다고 골 안 드갑니까? ㅎㅎㅎ 아즈씨한테만 말하는 건데 언니 지금 만나는 사람, 사람은 참 좋은데 재미가 윽수로 엄따 아임니까? 사람이 그리 재미 엄써갖고 언니는 만다고 그런 남자를 만나는지 모르겠어예. ㅎㅎㅎ "  그에게 팁을 주었다. 그리고 덤으로 기회를 준 것이다.


[1971년 5월]


" 애련아~~~~  애련아~~~~  느거 언니 어디 갔노? 와, 저녁 8시가 됐는데 퇴근을 안 하노? "

드디어 아버지까지 언니의 행방을 묻기 시작했다. 실은 아까 늦은 오후에 회사에서 연락이 왔었다. 수련 언니가 오후 2시경에 회사에서 은행으로 나간 이후로 복귀를 안 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때가 오후 5시경이었는데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언니 회사의 경리 과장으로 일하는 언니의 상사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이유가 아주 큰 이유가 있었다. 언니가 은행에 간 것은 그 달의 직원 급여를 현금으로 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제 시간이 지나도 회사에 복귀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리 과장은 곧 은행에 연락했고 언니가 이미 급여 전액을 현금으로 인출해서 은행을 떠났음을 확인했다.



<4편>


떠남과 만남이 교차하다



 [1971년 5월 오후 6시, 진해 여좌동]


 아까 5시쯤에 회사에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고 언니에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언니에게 연락을 취하고 싶었지만 회사에도 없는 언니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언니 회사의 상사인 경리 과장에게는 언니와 연락이 닿으면 바로 알려 주겠다고 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경리 과장은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소식이 없으면 바로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때였다.


 때르릉 때르릉 때르르르릉~~~


 " 여보세요? " 총알같이 수화기를 낚아채며 내가 말했다. 


 " 애려이가? 내다. 옆에 어무이 아부지 계시나? "


 " 언니야!!  니 지금 어데고? 무슨 일이 생깄나? 회사에서 전화 오고 난리 났다 아이가? "


 " 어무이, 아부지 옆에 계시냐고? "


 " 옆에 엄따! "


 " 그래. 알읐따. 방금 회사엔 연락했다. 괘안타. 걱정하지 마라. 내가 난중에 집에 가서 말하꾸마. 혹시 어무이 아부지 내 찾으시면 친구 만나서 저녁 묵꼬 좀 늦는다케라. "


 " 언니 니 지금 오덴데? "


 " 지금 태은 씨하고 같이 있다. 일단 끊으게. 난중에 집에서 얘기하자. 집에다 단디 얘기해라 니! 알긋째? 끊는다. "


 "언니! 언니!"


 더 다그쳐 묻고 싶었으나 신호가 이미 끊어졌다. 언니는 무사했다. 태은 씨와 함께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목소리를 들어 보니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언니가 집에 들어온 시각은 저녁 아홉 시 반이 막 지날 무렵이었다. 그대로 나와 이야기 없이 귀가했더라면

아버지한테 한 소리 들었을 게 틀림없지만 언니와 통화 후에 내가 약을 쳐 놓았기 때문에 언니는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 다 큰 처녀가 너무 늦게 다니지 말고. " 아버지는 이 말 딱 한 마디 하시고 방으로 들어가셨으니까 말이다.


 방에 둘만 같이 있게 된 우리는 폭풍같은 수다로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이러했다.


[3시간 전]


" 태은씨, 이래 하시면 안 되는 거 아임니꺼? 태은씨 오늘 진짜 왜 이러세요?

저 빨리 회사로 복귀해야 합니더. " 언니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오는 남자에게 너무 강하게 말하는 것도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감정을 자제하며 설득해 보려고 노력했다.


" 수련씨, 오늘 제가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련씨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제가 오늘 그 답을 듣지 못하면 절대로 수련씨를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도착한 후에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차타면서 기다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 대위는 작심을 한 모습이었고, 모종의 결과를 얻기 전에는 이 사달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차는 약 반 시간을 달려 진해에서 마산으로 이어지는 꼬불꼬불 휘어지는 산길 도로에 진입했다. 수련 언니에게 일어난 사건은 매우 놀랍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나 운전을 하는 이 남자는 상당히 침착한 모습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언니와 이 대위는 산중턱의 한 찻집으로 들어갔다. 평일 오후였기 때문인지 가게는 한산했다. 홀에는 그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없었다.


 " 수련씨, 오늘 이렇게 무례하게 수련씨를 모신 것을 사죄합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결례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태은 대위는 테이블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이내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왕 이렇게 된 거 태은씨 말이나 좀 들어 보께예. " 수련 언니가 이미 엎지러진 물이라는 심정으로 앞에 앉은 이 도발적이고 사내 냄새 물씬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차에서 내릴 때 공공칠 가방 같은 걸 하나 들고 내렸는데 지금 그걸 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보랏빛 나는 벨벳 재질의 작은 꾸러미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수련 언니는 그것이 대체 무슨 물건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이태은 대위가 그 물건을 테이블 위로 올려 언니와 그 사이에 사뿐히 내려 놓았다.


 사실 그가 은행 앞에 갑자기 나타나 반강제로 언니를 붙들어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가려고 했을 때만 해도 언니는 혼비백산하여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니가 완강하게 거부했더라면 이 대위가 가지고 온 차에 타지 않고 그 찻집까지 끌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록 시작은 거칠었지만 언니도 그 남자가 싫지 않았고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이건 제가 월남에 갔을 때 준비한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이걸 선물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미래에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주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월남 파병에서 받은 수당과 봉급을 모아서 사두었습니다. "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5편>


장복산 공원의 고백


월남 파병에서 받은 수당과 봉급을 모아서


[1971년 5월 29일 오후 6시 반, 장복산공원]


 " 이건 제가 월남에 갔을 때 준비한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이걸 선물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미래에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주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월남 파병에서 받은 수당과 봉급을 모아서 사두었습니다. "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수련 언니는 이 놀랍고 갑작스러운 이야기 전개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 도대체 이태은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 말이고. 내를 을마나 봤다고, 내를 을마나 안다고 이래 앞뒤 몬가리고 나오는기고? ' 언니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릿속에서 실타래가 서로 마구 엉켜버린 느낌이었다. '만일 내가 오늘 이 남자를 거절한다면 이 남자는 우찌 나올끈가? 이 사람 쉽게 포기할 거 같지가 않네. 살다 살다 이래 막무가내로 나오는 남자는 진짜 처음이다. '


 " 태은 씨, 근데 그거 알아요? 내 만나는 사람 있어요. 같은 회사에 다녀요. " 언니는 종잡을 수 없는 야생마 같은 태은의 고백을 듣고 대뜸 이렇게 물었다. 이미 내가 그에게 언니가 만나는 남자에 대해 귀띔해 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었다.


 " 네! 알고 있습니다. 처음엔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이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애련 씨 말로는 그렇게 오래 만난 것도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수련 씨를 만난 이상 저도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저한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수련 씨를 더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 있습니다! " 이 말을 하는 태은의 어깨 주위로 은은한 빛과 같은 기운이 감싸고 있었다. 수련 언니는 이 상황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틀림없이 '납치'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사고를 친 남자였다. 자신은 회사 직원들의 월급을 통째로 들고 가는 중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범죄자'와 같은 남자를 경찰에 넘기고 한시라도 빨리 이 남자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하는 게 맞았다.  


 수련 언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이 절반은 본인 자신의 의지였다는 것을 말이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지만, 실은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회사에서 동료로 만났고, 그 사람이 수련 언니에게 호감이 있어 몇 번 데이트를 했을 뿐이다. 언니를 좋아해서 언니에게 잘해 주었고, 회사에서 같은 부서는 아니지만 직급이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매몰차게 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인물도 그만하면 준수한 편이었고 소문을 듣자 하니 능력도 있는 남자였다. 거기까지였다. 그냥 그렇다는 거고 수련 언니가 감정적으로 그 남자에게 빠진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 월남에서 온 새카만 이대위는 좀 달랐다. 지난달 서울 가는 기차에서 만났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비록 언니는 일체 아무 관심도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지만, 내가 누군가. 수련 언니와 평생을 같이 산 피붙이 동생 아닌가. 그 새침데기는 아마 처음 이 군인 아저씨와 조우했던 그날부터 관심을 가졌음에 틀림없었다. 진해에서 해군사관학교를 나온 새하얀 제복의 장교가 기차에서 처음 본 여인에게 그토록 당당하고 로맨틱하게 다가오는데 어떤 여자인들 무관심할 수 있을까. 흐흐흐 난 다 알아봤다고.



<6편>


[등장인물]


 고애련: 스물둘, 진해 토박이, 친구와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선머슴 아가씨 (화자)

 고수련: 스물다섯, 진해 출신 천생 여자, 배터리 회사 경리

 이태은: 서른, 충남 출신 해군 대위, 동남아 사람처럼 얼굴이 새카맣게 탄 남자

 서철곤 : 스물다섯, 오사카 출신 철강 비철 원자재 유통 사업가




[1971년 7월]


 오토바이를 타고 양어장 근처 갈대밭으로 향했다. 친구들이 탑산 밑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오늘은 왠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내 나이 이제 스물둘. 이제 노는 것도 지쳤다. 이젠 어떻게 살지 좀 구체적으로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 수련 언니는 2년 전부터 안정적인 회사에 취직을 해서 돈을 벌고 있다. 적금도 매달 붓고 있으니 모르긴 해도 꽤 모았을 거다. 천생 여자란 소릴 듣는 언니는 이제 좋은 남자만 만나면 만사형통이겠지.


 ' 오데 돈 쫌 왕창 벌 수 없으까? 작은 아부지네는 오래전부터 사업을 해서 억수로 부자로 사는데 우리집은 와 이렇노? 내는 남자도 지금은 필요엄따. 빨리 자리 잡아가 폼나게 살아야지. '


 작은 아버지 주유소 하시는 데서 아르바이트라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열심히 일해서 돈도 좀 모으고 작은 아버지께서 어떻게 사업하시는지 내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해 보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1971년 9월 진해 경화동]


 " 어서 옵쇼! 얼마나 하까예? "


 " 만땅 채우이소 고마! "


 " 휘발유 만~~땅~~~ "


  아직 여름의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으나 이곳에 처음 들어와 일을 시작한 8월에 비할 바 아니었다. 아침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줄곧 선 채로 주유소일을 하는 것이 쉬운 건 아니었다. 팽팽 놀다가 하루 종일 자유 시간도 없이 땡볕에서 주유소일을 해 보니 너무 고됐다. 게다가 집에는 비밀로 일하는 거라 언제 들켜 아버지한테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날지 모르는 나날을 보냈다. 작은 아버지는 비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이 좁은 진해 바닥에서 소문이 금세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 아가씨, 이거 가득 채워 주세요! " 혼자 기름 스탠드 앞에 서서 끝없이 이어지는 망상에 빠져 있을 때, 최근 자주 오토바이에 기름을 채우러 오는 장발의 손님이 나타났다.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주변 거리

 짜리몽땅. 내가 속으로 그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언뜻 보아도 165센티미터의 나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작은 게 아닐까 했다. 게다가 그 치렁치렁한 장발이 오히려 그의 키를 실제보다 더 작아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갈색 가죽잠바에 롱부츠라니 가관이었다.


 그는 기름을 채우는 동안 길 건너편으로 넘어가 담배를 피우곤 했다. 스탠드 옆에서 안 태우니 다행이었다. 가끔 무지한 남정네들이 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대개는 주유소에서는 금연이라고 말해 주면 알아들었지만, 고집불통이 가끔 말썽을 피우기도 했다.


 " 주유소 일하면 돈 많이 벌어요? 하루웬종일 서서 일하는데 일반 직장보다는 많이 받아야지. " 주유를 마칠 때쯤 장발이 길을 건너와 시덥잖이 말을 걸었다.


 " 그라는 아즈씨는 돈 마이 버시나 보네예~ 여는 몸은 쫌 힘들어도 사무실에서 일하는 거보다 쪼매 더 주거든예. " 다른 데서라면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기름 넣으러 온 손님이라 응수는 해 주었다.


 " 엄청 씩씩하시네요. 하하하. 얼마나 많이 주는지는 몰라도 젊은 여자분이 이런 데서 일하시니 대단하십니다. 다리 안 아프세요? " 장발이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지으며 쓸데없는 말을 계속 걸어왔다.


" 더 마이 준다카몬 더 힘든 일도 할 수 있어예. 젊은데 먼 일을 몬하겠으예~ "  실은 말을 받아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면서 자꾸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 입은 왜 이리 싼지.



[2008년 10월 오사카]


“ 고 사장님, 제가 틀림없이 약속 지킬게요. 시황이 나아지면 손해 보신 부분 감안해서 더 높은 가격에 구매를 해 드릴게요. 이번 계약은 없었던 걸로 좀 해 주세요. 저 믿으시죠? 제가 다 책임지고 해결해 드릴게요. ” 김진무 부장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애걸하는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같았다.


 김 부장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계약 가격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폭락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그가 일본에 와서 구매계약을 맺은 스테인리스 스크랩 가격은 톤당 30만 엔이었다. 구매량 1만 톤에 금액으로 환산하면 30억 엔짜리 계약이었다. 그런데 계약 직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촉발한 리만브라더스의 파산 신청을 신호탄으로 전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금융위기 소용돌이 속에 빠져 버렸다. 주식 시장도 하루하루 폭락을 거듭했고, LME 선물 시장을 대표하는 모든 비철 가격과 원유, 석탄, 철광석 등 원자재 가격이 동시에 폭격을 맞은 건물처럼 주저앉아 버렸다. 결국 계약 후 한 달 만에 톤당 30만 엔짜리 스테인리스 스크랩 가격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K사에서 이 계약을 취소하게 되면 우리 회사는 15억 엔의 손해를 입게 될 판이었다.

 ‘ 회사의 일 년 매출이 250억 엔 정도 되고 영업이익은 2억 엔에 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15억 엔이 날아간다면 우리 회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거래 은행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출금을 바로 회수하려 들 텐데… 어떻게 하나.. 이걸 어떻게 하나.. '


 K사 김 부장이 서울에서 날아왔다 돌아간 이후 세상은 암흑과 혼돈으로 변해 버렸다. 그동안 K사와 함께 했던 희로애락의 이십 년 세월이 눈앞에 잠시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블랙홀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이 회사를 어떻게 일으켜 세웠는데, 나와 직원들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며 지금까지 버티고 버텨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더 이상 세상은 나에게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고, 무언가를 먹고 싶은 욕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잠결에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없을까.. 누군가 나를 깨워 이것이 악몽이라는 걸 증명해 주지는 않을까.. 도대체 세상은 정말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7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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