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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직장을 떠나면 4편

일은 재미있을까? 술 문화는 어떤가?

by 안드레아


어떤 일이 재미있을까?


사회 초년 시절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저녁 식사 자리를 하면 저마다 다른 일터에서의 희로애락을 토로했다. 비슷한 직장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는 일과 직장 분위기가 천차만별인 경우가 많았다.


한 친구 왈, " 아, 지겨워 죽겠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틀어박혀 서류 심사만 하니까 좀이 쑤셔 미치겠어!"


옆 친구 왈, " 그래도 너넨 봉급이라도 많이 주잖어. 우린 급여도 짠데 일도 재미없고.. 죽겠다!"


앞 친구 왈, " 나도 힘들긴 한데 그래도 재미는 있어. 열심히 해서 버는 돈 회사에 이익이지만 한 계약, 한 계약 성사시키고 안 해본 시장 개척하고 하는 게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첫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동기들 가운데 가장 먼저 뛰쳐나온 나이기에 두 번째 들어간 직장에서 처음에 조바심이 났던 게 사실이다. 혹시 여기서도 적응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술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던 터라 새 직장의 술 문화가 어떨지 상당히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직장은 드라마 '미생'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는 국내 종합상사였다. 처음 배치받은 부서는 '금속1팀'. 우리 팀은 Steel Billet이라는 철근 전 단계의 반제품을 트레이딩하는 팀이었다. 이 Billet을 가지고 높은 열을 가해 길게 엿가락처럼 늘어뜨려 철근도 만들고 선재(wire rod)도 만들고 H-beam 등도 만들었다.


일반 메이커와 달리 종합상사의 특징은 대부분 자기 물건이 아니라 남의 회사 물건을 판다는 데 있다. 즉, 공급처도 다른 회사요. 구매자도 다른 회사인 것이다. 거기다 공급처나 구매자 중 적어도 하나는 해외에 있다. 만일 '삼국간 거래'라는 걸 하면 공급처와 구매자 모두 해외 거래처가 된다.


재미가 있었다. 하는 일에서 흥미가 느껴졌다. 크게 영업 부서와 관리 부서로 나뉜 이 회사에서 나는 해외 트레이딩을 하는 영업 부서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인데 이게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입사원 때 처음 맡았던 일은 러시아산 철강 반제품을 중국 철근/선재 제조 업체에 삼국간 판매하는 것이었다. 시장 조사가 된 상태라면 다음 단계는 공급처로부터 혹은 바이어로부터 견적을 받는 일이다. 그런데 상사는 해외법인이나 지사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본사에서 직접 거래처와 연락하지 않고 해외법인이나 지사의 직원들이 현지 거래처와 연락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나는 주로 우리 회사의 해외법인/지사 주재원 혹은 현지 직원들과 전화, 이메일, 팩스로 교신을 자주 하곤 했다.


의사소통은 영어로 이루어졌는데 입사 초기엔 각국의 다양한 악센트가 들어간 영어 발음을 이해하느라 조금 힘든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워낙 이런 새로운 만남과 사교를 즐기는 성격이라 아시아에서부터 중동, 유럽에 이르기까지 각 나라의 현지 직원들과 협력하여 일하는 것이 사뭇 흥미로웠고 적성에 잘 맞았다. 또한 가끔씩 출장으로 현지 공급처나 바이어한테 날아가서 직접 온몸으로 부딪혀 경험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접하며 일하는 것도 무척 즐겁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 우선 일은 괜찮았던 것이다.

술은 어떻게 했을까?


술은 쥐약이었다. 첫 직장이었던 언론사 방송국에서 이미 술로 호된 경험을 해본 터라 새로운 회사에서 회식을 가는 날이면 늘 스트레스 지수가 최고치를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철강을 취급하는 조직에 들어온 나는 이곳이 전 직장보다 결코 술에 관하여 관대하다거나 약한 곳이 아님을 입사 직후부터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술은 술일 뿐이라고, 이것이 내가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제대로 일하는 데 너무 큰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이 다짐은 내 마음속 외침이었지만, 이는 술을 강요하는 사람들과의 한 판 승부를 위한 결연한 의지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들어온 지 한 달 정도 되었을까 싶다. 팀원 열서너 명 정도가 전원 함께 하는 저녁 회식이 잡혔다. 틀림없이 이 날은 술을 많이 마시게 될 것 같아 퇴근하기 전부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회식 장소도 고깃집.


' 난 오늘 죽었구나! '


서울역 근처 연세빌딩 뒤편의 먹자골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신입은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는데 이 친구들은 제법 주량이 센 것 같았다. 의자 자리가 아니라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미 식당 측에서 세팅을 다 끝낸 그 방의 분위기는 내게 일종의 전쟁터와 같이 느껴졌다. 제일 구석에 앉아서 표적이 되는 걸 피하고 싶었으나 신입들은 모조리 가운데 자리로 배치되었다.


고기 메뉴는 이미 예약 당시 주문되어 있었고, 술은 맥주와 소주 테이블당 몇 병으로 주문된 후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각 테이블에 배급되었다. 여기에 가져온 위스키와 중국 백주 재고가 한 구석에 네 병,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도열해 있었다.


시작은 물론. 폭탄주였다. 먼저 위스키와 맥주로 팀장님이 몸소 제조에 들어갔다. 하얀 와이셔츠가 걷혀 툭 튀어나온 두툼한 팔근육은 폭탄주 제조를 위해 스스로를 단련해 왔다는 듯 절도 있고 스피디한 동작을 보여 주었다. 일괄 제조된 폭탄주는 각자 앞에 놓였고, 일단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앞의 사람이 잔을 다 비우기 전에 다음 사람이 잔을 기울이는 요령으로 순식간에 한 바퀴를 돌았다. 잔이 비워지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서열 2위 차장님이 두 번째 폭탄주 제조에 들어갔고 폭탄주 한 잔 씩을 다 비우자마자 이번엔 시계 방향으로 잔을 비울 것을 명령받았다.


두 번째 폭탄주 글라스를 비운 후의 나의 얼굴은 그야말로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날의 전주곡이었을 뿐 술잔은 계속 돌고 돌았다. 기본 주량이 너무 얕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한 방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내가 가장 유용하게 썼던 방법은 물잔이었다. 폭탄주는 옆에서 잔 비우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잔꾀를 부릴 수 없지만, 소주잔의 경우 한두 모금 마시고 난 후 삼키지 않은 채 물잔을 입에 물고 뱉어 내는 식이었다. 물잔이 다 차면 테이블 밑으로 몰아넣고 새 물잔을 가져다 같은 방식으로 술을 내 입속에서 물잔 속으로 이동시켰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어디선가 서늘한 시선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시선이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우리 팀의 선임 대리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음 순간 그 대리가 일어나더니 신입들을 다 소집했다.

"신입들 잠깐 문 밖으로 나와!"


나를 비롯하여 다른 신입 두 명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쭈볏쭈볏 일어나 회식이 열리고 있던 방 바깥으로 따라 나갔다. 우리 세 명은 식당 안 복도 구석으로 끌려가 쭈르르 열을 지어 섰다. 선임 대리가 우리들을 앞에 두고 말문을 열었는데 취기가 약간 돈 듯 발음이 조금 부정확했다.


"너희들 말이야! 신입이 돼가지고 뭐 하는 거야! 누가 술 그딴 식으로 가르쳤어!"


순식간에 우리는 재입대하여 신병이 되어 버린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나를 비롯하여 다른 두 명도 선임 대리의 이런 태도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그대로 끌려가서는 안되는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리 순한 양과 같은 분위기로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였다.


"야, 너희 엎드려뻗쳐!"


우리는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반사적으로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했다.


" 아니, 회사 선배 말씀을 뭘로 듣는 거야! 이것들이 정말 정신 못 차리네!

안되겠어. 머리 박어!! "


머리 박어! 이 두 마디가 추가되자마자 나는 용수철처럼 솟구쳐 몸을 일으켰다.


" 대리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여기가 군댑니까? 더 이상 대리님이 시키는 대로는 못하겠어요! "


나는 참았던 무언가가 폭발하면서 표정은 험악해졌고 목소리는 거칠어졌다. 선임 대리는 순간 당황했다. 아마 신입 사원이 이렇게 저항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른 신입 사원 하나가 나와 선임 대리 사이를 막아섰다. 자칫하다가는 주먹이 오고 갈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그 사이에 다른 대리 하나가 나와서 선임 대리의 팔을 잡으며 만류했다.


아마 주량이 어느 정도 되고 술자리 문화에 저항이 크지 않은 분들이라면 술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니 참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나처럼 체질적으로 술이 약한 사람은 정말이지 직장을 다니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까지 놓이게 된다. 내가 신입으로 회사를 다니던 때와 지금은 직장의 음주 문화가 많이 바뀐 것 같기는 하다. 예전에는 술을 강권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특히 그런 상사나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다행히도 이직한 직장에서 그 수많은 난관을 무사히 넘어오게 된 것은 그런 음주 문화 속에서도 많은 상사와 동료들이 이해해 주시고 때로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셨기 때문임을 잘 알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문장을 쓰면서 그런 곤란하고 힘든 상황에서 도움을 주시고 힘이 되어 주셨던 나의 사수, 팀장님들, 여러 동기 후배들, 지사장님, 법인장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부디 어디서나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빌어 본다.


오늘은 일의 재미와 직장의 음주 문화에 대해 개인적 경험을 풀어 보았다. 이직 시 고려해야 할 많은 포인트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두 가지가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적으로 오랜 시간 일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점들이 더 많이 있지만, 이직을 고민한다면 새로운 직장에서 이미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맡게 될 일의 특성과 내가 얼마나 흥미를 붙이고 일할 수 있는지 꼭 재보기 바란다. 아울러 음주문화는 조직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술이 약하신 나 같은 분들이라면 반드시 체크하고 넘어갈 포인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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