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결정을 내린 그의 이야기
육아 모드로 전환 후 좀처럼 글 하나를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인지 글로 옮기지 못하는 생각들이 자꾸만 쌓이는 기분이 든다. 최근엔 새로운 동료가 하나가 회사에 들어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는데 회사에 대해 조직에 대해 사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더 글이 쓰고 싶었다.
3년 동안 나와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내게 일본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핫토리상’이 내 바로 옆자리에 있다가 옆방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그 새로 들어온 경력 직원에게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사장님의 지시로 그는 핫토리상을 대신해 나와 나란히 앉아 일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 사람이 아니고 한국인이다. 나처럼 우리나라에 살다가 일본에 있는 일본 회사로 이직하게 된 경우다. 나와는 달리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일본어가 능숙한 상태라 적응이 아주 빠른 것 같다. 그가 일하던 전 회사는 이름만 들으면 우리나라 사람 누구라도 금세 아는 대기업이다. 대략 10년 정도 일하다가 그 회사를 그만두고 오게 된 것이다. 3년 전 비슷한 이직의 경로를 경험해서일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통하는 바가 많았다.
대체 왜 이직을 그리고 일본행을 결심하게 된 걸까?
아직 차가 없는 그를 매일 아침 태우러 가서 같이 출근하고 퇴근할 때도 차에 태우고 같이 가고 있다. 회사에서도 바로 옆자리라 우리는 거의 10시간 정도를 함께 지내는 셈이다. 오랜만에 직장에서 일본어가 아닌 우리말로 우리나라 사람과 떠들 수 있게 된 나는 본래의 수다스런 나로 돌아갔다. 그 역시 조용조용 말하면서도 무언가 끊임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걸로 봐서 과묵한 남자와 거리가 있다.
" 선배님, 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요? "
정시 칼퇴근의 기쁨!
오후 5시 반에 퇴근하면서 아직도 해가 하늘에 떠억하니 걸려 눈부시게 밝은 걸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우리 회사는 8시 반에 출근하여 5시 반에 칼퇴근을 한다. 열쇠를 관리하는 직원이 문을 잠그고 퇴근해야 하기 때문에 야근을 하고 싶어도 10분 이상 앉아있기가 미안하다. 그는 이미 우리 회사의 칼퇴근 문화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불과 몇 달 전까지 다니던 한국의 직장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을 매일 경험하면서 꿈꾸듯 말했다.
우리나라 직장의 정시 퇴근 시각은 5시에서 6시 반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칼퇴근을 했을 경우 이 정도 시각의 퇴근은 너무도 훌륭하다. 예전보다 야근을 덜 하는 직장들이 많이 생겼다고 들었다. 내 전 직장의 경우도 십 수년 전과 비교하면 퇴근 시간이 빨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시 칼퇴근은 아직도 옛 동료들에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일하는 스타일이 달라서 어떤 사람은 업무 시간에 비교적 설겅설겅 일하면서 길게 일하고, 어떤 사람은 주어진 일을 빠른 시간 안에 마무리하려고 한다. 전자의 경우 야근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후자라고 해서 야근을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표현의 답을 할 수 있겠으나 많은 회사에서 업무 효율이 높고 일을 빨리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야근을 완벽히 피해 가는 건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야근은 일의 특성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회사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가운데에는 필요에 의해 꼭 추가 근무를 해야만 하는 분들이 틀림없이 계시리라 생각한다. 인정한다 그것은. 그러나 우리를 저녁이 없는 삶으로 내몬 이 야근이라는 녀석과 우리는 진정 결별할 수 없다는 말인가!
#풍경1
서울 어떤 회사/ 자재2팀/ 오후 6시 50분 (정시 퇴근 시간 6시)
자재2팀 총 인원 팀장 포함 7명. 선적서류 및 ERP 담당 직원 2명 6시 칼퇴근. 영업 담당 김 과장, 장 대리, 사원 둘 그리고 왕 팀장 컴터 앞에 앉아 있음.
사원 1: 아놔, 오늘 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사원 2: 그럼 빨리 나가.
사원 1: 팀장님, 과장님, 대리님 다 계신데 어떻게 먼저 나가?
사원 2: 하긴 좀 그러네. 있다 김 과장님 나갈 때 같이 나가자.
시곗바늘이 7시를 넘어서자 김 과장 일어난다. 왕 팀장한테 인사를 하고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사원 1이 슬며시 자리를 정리하고 컴퓨터를 끄려고 할 때 장 대리가 그를 향해 서늘한 눈빛을 보낸다.
장 대리: 수민씨, 오더 리스트 다 정리했어? 그거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해야 돼.
사원 1이 오늘 신규 성약된 건들이 업데이트되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슬며시 PC를 다시 켠다. 사원 2도 같이 퇴근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모티터를 주시한다. 이래저래 하다 보니 저녁 8시가 지나고 있다. 팀장은 기러기 아빠다. 집에 가도 특별히 달라질 게 없다. 일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풍경2
중국 어떤 회사/ 구매부 / 오후 5시 40분 (정시 퇴근 시간 5시 30분)
구매부장 포함 부원 10명. 경리(매니저) 한 사람이 프린터에서 무언가 출력하고 있다. 그를 제외한 모든 구매부 사람들은 이미 퇴근하고 텅 빈 사무실. 유니폼을 입은 경비원 하나가 다가온다.
경비원: 언제 퇴근하세요?
경리: 아, 곧 나가요. 이것만 출력하구요.
마지막 남은 하 사람이 퇴근하자 시곗바늘이 5시 44분을 지나고 있다.
풍경1과 풍경2를 통해 대비되는 두 회사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꼭 한국 회사는 야근을 하고 중국 회사는 그렇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풍경1의 회사는 야근이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상급자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상황에서 눈치를 보며 퇴근을 못하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만일 과장 혹은 대리 정도의 중간 직급에 있는 사람이 퇴근을 빨리 하거나 후배들이 빨리 퇴근하도록 분위기를 잡아주기만 해도 전체적인 퇴근 타임은 빨라질 수 있다. 실제로 전 회사에서 일할 때 한 선배가 팀장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고 빨리 퇴근하는 편이었는데 그 덕에 우리 후배들은 따라서 빨리 퇴근할 수 있었던 경험을 했었다.
반면 풍경1의 자재2팀처럼 팀장이 퇴근 시간을 몇 시간이 넘기고도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바로 밑의 과차장들도 눈치를 보거나 야근이 생활화되어 있는 조직도 있었다. 이런 조직에서는 일이 없어도 결코 쉽게 퇴근하기 어려운 문화가 그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
실제로 주어진 일이 너무 많아서 야근을 하지 않고는 과업을 완성할 수 없는 직장인도 많다.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에서도 독서와 글쓰기가 하고 싶은데 회사에 늦게까지 붙들려 있다는 푸념을 본 적이 있고, 가족들 혹은 개인적으로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고 싶으나 현실의 높은 벽에 막혀 좌절하고 있는 모습들도 많이 발견한다.
쓸 데 없는 일들, 중복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PPT가 싫어요!
새로 온 그 동료는 전 직장에서 야근 만의 문제로 고민한 건 아니었다. 이직하기 전에 그는 전 직장에서 전략부서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사실 전략부서로 오기 전 영업부서에서 오래 일을 했었는데 거기서는 그래도 나름 재미와 보람을 느끼며 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어찌 조직의 인사발령에 따라 성격이 판이한 전략부서로 배치되면서 갈등이 시작된 것 같다.
나도 잠시 ‘전략’ 자가 들어간 팀에서 일한 적이 있지만, 이런 전략부서가 이름처럼 두뇌를 쓰고 조직의 미래를 생각하며 전략을 구상하는 곳이 아닌 경우가 많아 보인다. 짧은 경험과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빌자면 여긴 ‘파워 포인트’ 자료를 대량 생산해내는 조직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들 조직이 나름 자료를 잘 수집하고 분석하며, 현업의 소리를 듣고 최선을 다해 회사의 전략을 짜고 조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전략 조직의 많은 조직원들은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으로 대변되는 시간 잡아먹는 귀신과 싸우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어떤 프로젝트가 떨어진 후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회의를 하고 현업의 의견을 듣고 초안을 짜는 등 전략 수립을 위한 여러 단계의 작업을 거치는 데 들어가는 시간보다 어쩌면 마지막에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작성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할애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글자 크기를 조정하고 단락 간격을 바꾸고 슬라이드 색을 변경하고 제목란의 각도를 비틀고 효과음을 집어넣고…. 이런 세세한 작업도 물론 필요하다. 능숙한 사람은 빨리 잘 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초안을 만들어서 올리면 여기저기서 훈수가 들어온다. 직속상관은 말할 것도 없이 협력팀의 팀장, 마케팅 부서, 같은 팀 안의 다른 선배, 현업 부서 등등. 담당자는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다. 데드라인은 정해져 있고 슬라이드를 고치라는 주문은 쇄도한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본을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야근하며 작성해 낸다.
다음날 아침 팀장한테 불려 간다. 불안한 눈빛으로 팀장을 쳐다볼 때, 인간적인 팀장이라면 조금은 미안한 기색으로 운을 뗀다. 임원의 지시로 주제를 조금 바꿔야 한단다. 주제를 조금 바꾼다고 하는 것은 표현을 미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몇 날 며칠을 때론 밤까지 새 가며 작성한 피의 PPT는 한순간에 의미가 상실되어 버린다. 완전히 새로 작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주제 변경 혹은 시각의 변동은 그 구미를 맞추기 위해서 또 다른 몇 날 며칠을 희생해야 함을 의미할 때가 많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없다. 까라면 까는 거다.
문득 자신의 미래를 그려 본다. 이렇게 재미는 없지만 월급은 또박또박 나오는 곳에서 버티다 보면 팀장도 되고 또 잘 해서 운도 좀 따라주면 임원까지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기업이니 만큼 상대적으로 사원들에 대한 복지 혜택도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직에 대한 유혹이 오래전부터 꼬리를 치며 마음을 흔들기도 하지만 사실 이만한 조건 이상을 제공할 회사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이 회사에서 열심히 살아남아 임원이 되면 얼마나 좋은 걸까. 상무보를 달고 2년 만에 옷을 벗는 분들을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이 보게 되는 현실이다. 그나마 임원을 다신 분들은 다행이다. 아직 대학 진학도 못 시킨 자녀들이 있는 부장들도 심심치 않게 회사를 떠난다. 자의반 타의반 해서 말이다.
생각이 났다. 회사 규모도 작고 월급도 적지만 사람답게 살았던 시간.
수년전 그는 일본의 한 협력사에 파견을 나간 적이 있었다. 협력사라고는 하지만 그가 속한 대기업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회사였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 했던 그곳에서의 몇 년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그와 그의 아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인간답고 여유롭게 지냈던 시간이었다. 직원들은 가족적인 분위기였고 서울 본사와는 다르게 회사의 모든 직원이 5시 정시 퇴근을 했었다. 이 회사는 돈을 많이 벌고 직원 급여나 복지가 아주 좋은 회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직원들이 정년(65세)까지 일할 수 있고 매출이나 영업이익에 대해 대기업과 같이 스트레스를 주며 무조건적인 목표 달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서울에 돌아와 언제 그런 생활을 했는지 까마득하게 잊힐 무렵 문득 생각이 났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삶을 떠나 다시 그 행복했던 시간을 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시작은 막연했지만 막상 꿈을 꾸기 시작한 그는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고 예전 일본에서 친하게 지냈던 지인들과 이런 생각을 공유하게 되었다. 사업을 하고 있는 일본인 친구와도 통화를 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또한 일본 회사에서 일하는 지인과도 연락을 해서 구체적인 현지 취업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물론 가장 접근하기 쉬운 인터넷에서도 닥치는 대로 발품을 팔아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정보의 총알을 장전해 나갔다.
아직 이루어진 것은 없지만 이런 가능성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전 직장에서의 일상은 고통과 좌절에서 희망과 일어섬으로 바뀌었다. 남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대기업을 떠나 그것도 다른 나라로 아예 떠나는 일이기 때문에 아내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불안감이 컸던 그의 아내도 조목조목 일과 삶의 비전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대화를 이어가자 불안했던 마음이 어느새 기대감으로 바뀌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봄의 기운이 겨울의 한기를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하던 어느 날.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짧은 메시지였지만 그의 마음이 회사를 떠나는 쪽으로 기울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보다 조금 앞서 비슷한 선택을 했던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 자신도 열에 들떠 제법 긴 시간 이직에 대한 배경과 변화된 삶에 대해 떠들었다. 내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그는 격하게 공감해 주었고 마음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느낌이 전파를 타고 여실히 전해져 왔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았다. 마치 드라마와도 같이 그는 지금 이곳에서 같은 공기로 호흡하고 있으며 매일매일 함께 출퇴근하며 중소도시 키타큐슈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하철 대신 20분 거리의 막히지 않는 도로를 차로 출퇴근하고 있으며, 그 길은 빌딩숲이 아니라 한적한 주택가를 지나고 논밭을 지나고 바닷가를 공원을 야산이 보이는 풍경을 지난다.
이 선택이 과연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 증명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드러날 일이다. 하지만 이제 막 합류한 그와 몇 년이 지난 나는 지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으며 하루하루의 시작과 끝에 감사하는 마음이 샘물처럼 솟아남을 느끼고 있다.
일단 칼을 뽑았다. 미래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밝아진 미소는 내게도 큰 힘이 되어주고 있으며, 우리의 선택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으니 이대로 감사하는 마음 잊지 말고 살라 속삭이는 것 같다.
이 글이 우리가 얻은 무언가를 자랑하고 누군가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현실의 어려움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이야기로 다가가기를, 하나의 구체적인 예로 참고되기를 그리하여 결국 그들이 그 현실의 고통과 수고로움을 이겨내는 데 작은 힘을 보태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