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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좀 더 살기로 했다

먹고 기도하고 달리기 그리고 아보하

by 두기노

지난 몇 개월간 직장 문제와 관련하여 남들이 보면 배부르다고 할 수 있지만 나로서는 쉽지 않았던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다시금 임원으로 복귀하며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실속을 챙기며 일본에 좀 더 머물지, 둘 다를 취할 수 없는지라 선택은 오직 하나. 심사숙고라고 하기에는 깊이가 부족했지만 나름 고뇌의 시간이었고, 지난 금요일로 확실히 결정을 내렸다. 한 때는 한국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90% 이상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고 내 마음을 내가 모를 때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도쿄에서 좀 더 살며, 현재 직장에 머무르기로 했다.


당초 한국에서 제의를 받은 것은 인원이 40명 이상 되는 조직을 총괄하는 임원으로서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금요일 오전에 인사담당 임원으로부터 회사 내 조직 운영 방향이 바뀌어 내가 맡게 될 조직의 규모가 반으로 축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른 모든 제안 조건은 변함없고 다만 최초안보다 내가 맡을 조직이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는데,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확 올라왔다. 더 나은 금전적 대우, 훨씬 마음 편한 회사생활, 소소한 일상 속 행복을 모두 팽개치고 게다가 온 지 아직 2년여 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오직 딱 하나, 더 나이 들기 전에 꽤 사이즈가 있는 조직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초 제안보다 조직이 반으로 줄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마음이 식어버렸다. 어찌 보면 지난 수개월을 끌며 보이지 않게 쌓여 온, 내가 내린 결정 후에 언젠가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로 인한 주저와 망설임이 한순간에 폭발해 버린 것이다. 울고 싶은데 빰 맞은 셈이었다. 그래서 “이번 건은 없던 걸로 하시죠“라고 얘기하고 바로 마음을 접었다. 회사 업무를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길, 금요일이라지만 약간의 찜찜함이 남을 줄 알았는데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월요일까지 이어지는 삼연휴에 설레기까지 했다.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이렇게 후련한 일임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다소의 마음속 갈등이 있었지만 다시 마음을 잡고 나서 주말을 알차게 보냈다. 몇 개월 안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방치한(?) 집안 살림살이들 구매 목록을 정리했고, 5년간 사용해 온 휴대폰 교체를 위한 상담을 받았다. 아내와 함께 할 골든위크 여행계획을 세웠고 호텔 예약을 마쳤다.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갈 일본 내 百名山 정보를 수집했고 메모를 하며 등산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연휴 중 매일 달리기를 했고, 옆동네로 매화꽃구경을 다녀왔다. 한 번은 동네 목욕탕에서 또 한 번은 귀가하여 욕조에 물 받아 몸을 담그며 소소한 행복감에 젖었다 미리 준비해 둔 재료로 요리를 하고 미리 만들어둔 반찬까지 곁들여 한두 잔의 술을 곁들여 식사를 하며 서울에 있는 가족과 영상통화를 했다. 설거지 후 내일 먹을 과일 씻어 놓고, 책을 읽고 무료 시청 중인 애플tv로 영화를 보다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무 일 없는 보통의 하루’의 전형.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말 일상이었다.


사실 미국계 기업의 일본지사인 현재 회사로 넘어오며 5년 비자를 받고 왔다. 이제 3년 차에 접어들었다. 항상 그렇지만 첫 2년을 무사히 넘겼기에, 앞으로 내가 얼마나 지금의 회사에 더 있을지 일본에서는 얼마나 더 살게 될지 잘 모르겠다. 특별히 계획도 없다. 언제나처럼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매일의 루틴을 지키며, 욕심부리지 않고 일상을 즐기며 그렇게 살아보려 한다. 어느덧 확연히 갱년기임을 느끼는 나이지만, 된장찌개, 김치찜, 북엇국, 고추장불고기 정도 뚝딱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쌓인 요리 내공과 내 인생의 가장 큰 원동력 ’걷고 뛰고 산에 가는‘ 신체 활동을 꾸준히 하며 더 건강하고 멋진 ‘아보하’를 많이 만들어 갈 것이다. 지금까지 받아온 혜택과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늘 감사하며, 기도하듯 명상하듯 또 그렇게 소소하게 살아보려 한다.


지금의 내 기분에 어울리는 하이쿠 한 편 -

매화 한 송이

한 송이만큼의

따스함이여

梅一輪一輪ほどの暖かさ / 服部嵐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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