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남(南) 알프스 1박 2일 등반기
오늘은 일본의 빨간 날이다. 엄밀히 말하면 어제가 ‘산의 날 (山の日)’ 공휴일이라 오늘은 대체 휴일인 셈이다. 봄이나 가을이 아닌 삼복더위에 ‘산의 날’이라는 게 조금 우스울 수 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나만의 여름 보내는 법에는 늘 산행이 있어 왔다. 땀 한 바가지 쏟고 나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나 막걸리, 집에 와서 하는 찬물 샤워의 짜릿함, 그 작은 성취감과 행복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 어쩌면 여름이야말로 산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 뙤약볕에 노출이 많은 산은 사절.
한국에서 5년여에 걸쳐 100대 명산을 완등한 게 2018년. 그 이후에도 산은 언제나 내게 인생의 스승이자 친구였지만, 예전만큼 1년에 60-70회씩 등산을 다니지 않게 된 지 몇 년 됐다. 특히 서울과 달리 등산을 할만한 산 앞까지 1시간 이상 이동을 해야 하는 도쿄에 와서는 시간을 아끼고자 주말에도 동네 근처를 뛰는 빈도가 훨씬 늘었기에, 산행은 그야말로 두어 달에 한번 갈까 말까 하는 이벤트가 되었다. 하지만, ‘내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갈까’ 하는 고민을 시작하고부터 일본 百名山 관련 유튜브 영상을 보며 산행계획을 많이 세우고 하나씩 실행해 나가고 있다. 올해만 해도 도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구모토리야마(雲取山, 2017미터)와 일본 내에서 가장 높은 산인 후지산(富士山, 3776미터)을 다녀왔다. 이로 인하여 일본 百名山 4개째를 등정하게 되었다.
일본의 산들에 대해 잘 모를 때부터 늘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으니, 야마나시현, 시즈오카현, 그리고 나가노현의 3개 행정구역에 걸쳐 있으며 일본 百名山 10좌가 몰려 있는 바로 남알프스(南アルプス)가 거기다. 한국에서도 설악산보다 지리산을 좋아했던 것처럼, 왠지 거칠고 더 험난해 보이는 북알프스보다 좀 더 온화하고 탁 트인 남알프스에 마음이 더 끌려왔다. 당장 10좌를 전부 등정할 수는 없고, 우선은 일본 百名山이면서 남알프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기타다케(北岳, 3193미터)에 다녀올 생각으로 가타노코야(肩の小屋) 산장을 먼저 예약했다. 6월의 첫째 날이었다. 전화로 밖에 예약을 받지 않는데 수십 번 시도한 끝에 연결되고 보니 이미 8월의 모든 토요일은 예약이 끝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금요일 하루 휴가를 낼 요량으로 8월 9일 1박 예약을 마쳤다. 그러고 나서 교통편 등 하나씩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조사를 하다 보니 또 다른 百名山인 아이노다케(間の岳, 3190미터)가 기타다케에서 불과 3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결국 1박 2일 동안 두 개의 百名山 등정이라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1박 2일의 첫날 새벽 6시 전에 집에서 나와 미리 예약해 둔 신주쿠발 고후(甲府)행 특급 아즈사를 탔다. 1시간 40분 정도 지나 도착한 고후역 앞 버스정류소에서 등산로 입구인 히로가와라(広河原)로 가는 버스로 환승해서 다시 2시간 정도를 이동했다. 히로가와라부터 1박을 하기로 되어 있는 가타노고야 산장까지는 거리로는 5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하지만, 고도를 무려 1500미터나 높여야 하기에 결코 쉬운 구간이 아니다. 구름이 많고 빗방울도 간혹 떨어지고 았었는데, 이런 날씨가 오히려 급경사 오르막 산행에는 더 좋다. 틈틈이 오니기리와 행동식에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며 발밑만 보고 천천히 올라갔다. 11시에 출발해서 5시간 만에 그렇게 가타노고야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 내부는 최근 내장공사를 한 듯 깔끔했다. 석식과 다음날 조식 포함 1만 2천엔.
도착하고 나서 5분도 안돼 소나기가 쏟아졌고 날도 꽤 쌀쌀해 얇은 패딩을 걸치고 있는 산객들이 꽤 있었다. 5시 40분 저녁식사 후 전자책으로 책 좀 읽다가 7시 되기 전에 도미토리 형식의 침소에 들었다. 선잠이 들었을까? 바닥의 흔들림과 함께 누군가의 핸드폰에서 긴급재난문자 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는 일본 산객들 몇 명이 수군거리며 1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객실에서는 스마트폰 연결이 안 되니 아마도 1층에 있는 TV를 통해 뉴스를 확인하려는 거겠구나 어렴풋이 생각하며 나는 그대로 잠을 청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녁 8시 정도 도쿄 근처 가나가와현에서 비교적 경미한 지진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해뜨기 전 하늘을 감상하고 5시에 조식도 야무지게 챙겨 먹고 채비를 하고 오늘의 하이라이트 기타다케로 출발했다.
산장에서 기타다케까지는 4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5번째 일본 百名山 등정에 감격해하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내가 첨부한 신문기사를 통해 난카이(南海) 트로프에 1주일 안에 대지진의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집에도 TV가 없으니 정보에 너무 어두운 내가 잠깐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다. 오늘 하루 당초 계획처럼 아이노다케까지 안전하게 등정하고 도쿄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하자고.
메멘토모리 (memento mori)
지금까지 살면서 전신마취를 통한 총 네 번의 큰 수술을 받았다. 물론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그때마다 세상을 원망도 해보고, 약골인 나 스스로를 책망도 해봤지만 결국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비록 누구보다 건강하다고 자부하지만, 그런 영향이 있어서인지 ‘죽음’에 대해서는 또래들보다 덤덤한 편이다. 따지고 보면, 자연재해로 죽을 확률보다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사실만 놓고 봐도, 내 의지와 관계없이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물론 다가올 위험을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오지도 않은 상황에 겁을 먹고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되고 싶지도 않다. 산을 탈 때면 늘 다독이는 두 가지 마음가짐, 감사함과 겸손함을 바탕으로 지금은 이 순간에 집중하자고 다짐하고 다시 배낭을 메고 천천히 아이노다케로 향했다.
카르페디엠 (carpe diem)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압도적인 풍광에 벅차올랐고, 살아 있다는 기쁨에 그리고 건강하게 3000미터 높이의 산을 두 개나 타고 있는 나 자신에 감격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난날의 아픈 기억과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전부 떨쳐버리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몰입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일본 百名山 6번째 등정을 이루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it aint’t over till it’s over)
아이노다케를 찍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첫날 출발지였던 히로가와라로 하산했다. 무려 1600미터 정도를 하강해야 해서 무릎에 가급적 충격이 덜 가도록 조심하며 내려왔다. 하산길에도 언제나처럼 up&down이 이어졌다. 잘 생각해 보면 결국 산행이나 인생이나 도긴개긴이다. 이제 완만한 능선길 따라 천천히 걷기만 하면 되겠다 싶은데 갑자기 급경사 내리막이 나오거나, 진짜 편하게 내려갈 일만 남았다 생각했는데 울퉁불퉁 오르막이 다시 나오기도 한다. 한마디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산행이었다. 그만큼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하산길에 일본의 특별천연기념물이라는 뇌조(雷鳥, 라이쵸)의 늠름한 자태와 후지산을 동시에 사진으로 담는 행운까지 누렸다.
어딘지 스위스의 산과도 닮아있던 남알프스에서의 1박 2일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기억이 날 것이다. 이번에도 위로와 함께 삶의 작은 지혜를 전수받았고 원기보충까지 받고 나니 산에 대한 빚이 더 늘어버렸다. 언젠가 원금에 이자까지 전부 상환할 날이 오면 좋겠다. 아니 그런 날을 만들어야겠지. 참고로, 남알프스 산행 후 밤에 도쿄로 복귀한 다음날 슈퍼에 가서 쌀과 통조림 등 비상식량 및 물품을 장만했고 재난 관련 앱도 설치했다. 통제는 불가능하고 예측도 어렵다지만, 대응만은 어느 정도 하자고 굳게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