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노래 1
나는 1989년 12월 학력고사시험을 봤다. 지망했던 학교는 신촌에 있는 S대학교였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는데, 고등학교 2학년부터 3학년 여름방학에 걸쳐 총 4회 입원과 2회의 대수술을 받고 난 후 간신히 응시할 수 있었다.
보통 키 크고 마른 남자애들이 주로 많이 걸린다는 기흉이었다.
남들은 보통 1회 입원으로 치료가 된다는 데 나는 양쪽 폐에 모두 생겼고, 또 재발까지 해서 이론적인 최악의 경우의 수를 겪으며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대학시험을 치른 셈이다.
솔직히는 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일단 붙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부터 아프기 전의 성적을 생각하면 건강을 회복해 제대로 다시 해보는 게 낫지 않냐는 의견까지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은 나름의 애정 어린 조언들을 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나고 보니 아마도 그 당시의 내 심정은 걱정과 불안, 우울감을 초월한 뭔가의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두 번째로 전신 마치 조치 후 수술방 들어가기 직전에 레지던트 분이 이제 더 이상 기흉으로 병원올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줬던 그 순간 그러면서 스르르 마취약이 퍼졌던 그 느낌만이 시험 보는 날까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원서를 내고 시험 때까지의 기간은 마치 진공상태에서 지내는 것 같았다.
내 인생에 그렇게도 잡생각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우연히도 같은 대학에 응시한 친구와 한 교실에서 대학시험을 함께 치렀다.
5시 정도에 시험이 끝났던 기억이고, 교문을 나서니 12월의 거리는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그냥 집으로 직행하기 아쉬워하며 돈가스나 먹고 가자는 친구의 꼬임에 Y대 쪽으로 걸어가다 어느 가게에 들어가게 되었다.
맥주를 팔았던 걸로 보면 카페보다는 호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당시 유행하던 복층구조의 가게로, 다락방 같은 2층으로 올라가려면 구부정하게 자세를 낮춰야 했다.
2층 구석에 자리 잡은 우리는 돈가스에 호기롭게 맥주도 한병 시켰다.
고3이어서라기 보다는 몸이 그 모양이다 보니 술은 언감생심 입에도 대지 않았었는데, 그날은 그야말로 한두 모금 마셨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돈가스는 맛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의 가게 분위기 그때의 그 순간만은 아직도 뚜렷이 기억에 남았다.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주를 한잔 했을 때, 김완선의 “이젠 잊기로 해요”가 흘러나왔다.
음향시설이 좋아서였는지 노래가사가 확 들어왔다.
원래부터 좋아했던 노래였지만, 그날은 이 노래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냥 정말 하염없이 울었던 것 같다.
누구도 원망할 수는 없어 늘 자책만 하던 평범하지 못했던 나의 수험생활을 잊고 싶었다.
병원을 들락날락하는 사이에 아버지도 돌아가셨던 나의 어둡고 우울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통째로 전부 잊고 싶었다.
나의 힘든 과거가 앞으로도 반복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서 솔직히는 내 삶을 완전히 리셋하고 싶었다.
이젠 잊기로 해요
이젠 잊어야 해요
다행히 나는 재수하지 않고 지망했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가 잊고 싶던 그 기억들은 그날 이후로도 한참 동안 나를 괴롭혔지만, 인간은 역시 위대한 망각의 동물이었다.
여전히 삶은 힘들고 나의 미숙함도 변함없어 잊고 싶은 일들이 늘 반복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흘러가는 강물을 관조하듯 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마음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잊고 싶은 일들은 늘 내 몸과 마음 어딘가에 붙어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삶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고 느낀다.
지나온 고난의 순간들은 노력한다고 쉽게 잊히는 건 아니지만, 수렁텅이에서 빠져서도 나를 잃지 않고 차갑고 어두운 벽을 더듬으며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어디선가 희미한 한 줄기 빛은 반드시 나타난다.
잊고 싶었던 잊어야 했던 그 기억들이 오늘도 나의 키를 반뼘 정도 자라나게 하고 있다.
생뚱맞지만, 언제나 나의 뮤즈 김완선 누나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합니다.
https://youtu.be/POL4WRJ7-tk?si=ZbIxmPNhu1jEdjX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