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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기노 Sep 09. 2023

필사하며 마음 챙기기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 주고 나를 성장시켰던 문장들


내겐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애용하고 있는 것은 달리기와 산책이지만, 책을 읽다 표시하거나 사진 찍어 둔 좋은 글을 필사하는 것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필사는 말 그대로 노트에 얊은 펜으로 차분하게 직접 따라 적는 것을 선호하지만, 시간이 없을 경우엔 스마트폰 메모장에 입력하기도 한다. 때로는 필사와 더불어 짧게 일기를 남기기도 한다. 이렇게 지난 10여 년간 온/오프라인으로 기록해 온 노트는 그야말로 내 보물 중 하나이다. 지나고 나서 읽어보면, 지식 증대를 위한 정보성 글이나 희열에 찬 순간을 위한 문장보다는 역시 외롭고 힘든 순간을 위로하거나 어떻게 살 지에 대한 지혜를 주는 글들이 많았다. 특히 회사생활에서 상처를 받고 때로는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나를 지탱해 주고 희망과 용기를 줬던 글들이 많았던 것 같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아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지” / 헤르만 헤세 <데미안>


회사 생활하다 보면 누군가가 무조건 싫거나 미운 순간이 있었다. 그 사람의 꼰대스러움이, 그 사람의 독선과 자뻑이, 그 사람의 무신경함과 눈치 없음이, 때로는 그 사람의 성격과 정치성향이 등등. 한 사람이 마음에 안 들면 그 사람을 미워하기 위한 뭔가의 구실을 필사적으로 찾기도 했다. 그 대상은 상사나 선배였던 경우가 많지만, 부끄럽게도 신입사원의 느린 일처리가 마음에 안 들어 미워했던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데미안>을 우연히 다시 꺼내 읽으며 내가 싫어하던 그 사람이 결국 내 안의 나일 수 있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그야말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가장 좋은 복수 방법은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직장 생활하면서 여러 유형의 상사를 모셔 봤다. 정말 존경하고 내 커리어의 롤모델로 삼고 싶은 리더도 몇 있었던 반면, 내가 최악으로 꼽는 덕목들만 갖춘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회의 중에 90% 이상 본인 혼자 떠들면서 ‘라테’를 달고 살고, 칭찬이나 인정에는 극도로 인색하면서 조직원의 작은 실수에도 가차 없이 큰 소리부터 내고 보는… 조직에서 상사가 밉거나 싫을 경우 궁극에 결국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순응하며 상사의 스타일에 나를 맞추거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이 되던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에 더해 나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나만의 복수를 해왔다. “너 같은 리더로는 절대 되고 싶지 않아”라고 속으로 되뇌며.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그냥 회사생활에 지치고 외롭다고 느낄 때는 이어령 선생님의 이 시를 꺼내 천천히 다시 읽곤 한다. 그 어떤 누구의 말로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은 날에는 그저 내 안의 나와 술 한잔 하며 철저히 혼자가 되려고 한다. 한 번씩 무인도에 다녀온 후에 나 자신이 조금은 단단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렇게 또 ‘살아지는’ 삶을 살고 있다.


<맹자(孟子)> 고자장(告子章)
天將降大任於是人也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고 하면
必先苦其心志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勞其筋骨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餓其體膚
몸을 굶주리게 하고
空乏其身行
그 생활은 빈곤에 빠뜨리고
拂亂其所爲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所以動心忍性
그 이유는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게 게 하기 위함이며
曾益其所不能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너무 유명한 글이라 별도로 설명을 달 필요도 없다. 역술가들이 흔히 대운이 오기 전에 온갖 고난이 온다고들 얘기하는데, 길게 놓고 보면 모든 이의 인생은 결국 ‘평균회귀‘한다는 관점에서 너무 뻔한 조언이지만 힘들 때 한 번씩 위로와 용기를 받고는 한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신영복 <처음처럼>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깊은 밤에는 별이,
더운 여름에는 바람을 거느린 소나기가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위안입니다.


무기수로 살며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으셨던 신영복 선생님의 글은 그 자체가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이다. 힘들다고 느낄 때 나 스스로를 반성하고 오늘 이 순간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한 번씩 꺼내 읽곤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세상은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일들의 연속으로 지나가게 된다”
/ 류시화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그대를 보내고
생각나는 일 있어
모기장 안에서 운다
君を送りて思ふことあり蚊帳に泣く


소소한 일상주의자로서 류시화 시인의 이 말은 작은 힘이 되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소소한 일상 속 문득의 순간들을 소중히 하고 오늘 여기를 즐기며 소박한 기쁨으로 충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 값지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류시화 시인의 이 두꺼운 책에는 세상에서 가장 짧다는 일본의 하이쿠 명작들이 해설과 함께 잔뜩 실려있다. 특히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마사오카시키(正岡子規)의 이 시는 가끔씩 마음으로 울고 싶은 날 꺼내 읽곤 한다.




 “슬픔이 나를 버티게 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한 슬픔을 다른 슬픔으로 치유하는 비법을 깨닫는 과정이 아닐까 “
/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영화나 드라마 보다 순간 찡해져서 한두 방울 눈물이 난 적은 있지만,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펑펑 울어본 기억이 없다. 어쩌면 눈물샘이 말랐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정여울 님의 이 글을 읽고 사실은 내 몸 어딘가에서 켜켜이 쌓여 온 슬픔과 마주할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울면서 스스로 치유를 위한 노력을 해온 그 아이가 언제가 속 시원하게 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때는 울다가 또 웃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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