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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기노 Sep 26. 2021

Reboot:

어둠에서 기어 나와 다시 일어서다

사고를 낸 다음다음 날 아침 일찍, 대부부의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간단히 개인물품만 챙겨서 야반도주하다시피 회사를 나오다 보니, 몇몇 팀장을 비롯한 대부분에게는 작별 인사도 못하고 나왔다. 아마도 총괄장의 갑작스러운 퇴사에 대한 사정을 얼마간은 들었던 건지 몰라도, 문자로라도 어찌 된 일인지 물어오는 직원은 거의 없었다.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터라 관심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은 그 순간이 오히려 고마웠다. 예기치 않게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 한 동안 가족을 제외한 그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아 혼자서 조용히 성찰하며 침잠의 시간을 가졌다. 혼날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괜한 걱정 끼치는 게 싫어서 부모님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주는 아내와 딸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누구보다 절실히 반성하는 시간이었지만 스스로를 버리지 않기 위해 매일 꾸준히 운동을 했다. 지난 10년 이상 그래 왔던 것처럼, 놓인 현실이 갑갑하고 헤쳐갈 앞 날이 불안할 때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경험이야말로 나를 바로 잡아주는 원동력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실업상태가 길어지면 쌓아온 부를 허물어 생활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좀 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주식시장에 대한 공부도 체계적으로 하게 된 시기였다. 부끄럽고 어지러운 마음을 누를 방법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의도치 않은 휴식과 더불어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며 유용한 공부를 하며 보냈던 충실한 시기였다.


'비록 느릴지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다짐 섞인 복잡한 마음이 조금 덤덤해질 무렵 이제는 슬슬 재취업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지내던 헤드헌터나 소수의 업계 지인들과 소통하며 내가 갈만한 보험업권에서의 기회를 알아보다 보니, 나처럼 임원 하다 오십 다 돼 퇴사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재취업이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코로나로 있던 사람도 내보내는 마당에 시장에서 내가 원하는 자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나름 어디 내놔도 뒤처지지 않을 커리어를 쌓아왔다고 자부했기에, 설마 내가 갈 자리 하나 없을까 나 스스로에게 무한 긍정의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내심 불안하고 걱정되기 시작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취업 전선에 나섬과 동시에, 난생처음 실업급여도 신청해 봤고 정식으로 내게 맞는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나름 강점 및 경험을 살려 할 수 있는 알바나 프리랜스 일이 없을지 여기저기 관련 사이트를 기웃거려도 봤다. 내 정도 나이라면 사실 그간 쌓아온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겠지만,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나오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인해 그리고 업계에서 뭔가 이상한 소문이나 억측이 돌고 있지 않을까 두려워 여기저기 적극적으로 연락할 수도 없었다. 그저 인내심을 갖고 때를 기다리면서 도를 닦듯이 매일의 루틴에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평일에는 대부분 동네 구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저녁 무렵 한강을 뛰고 귀가. 저녁 식사 후에는 영어공부나 주식시장 소식 챙기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꽤 무덤덤해지고 평온을 찾은 것 같았지만, 때때로 회한에 사무치고 하루에도 문득 번뇌가 일었다. 그나마 우연히 읽게  된 이어령 선생님 시 덕분에, 책을 읽다 발견한 좋은 글귀나 그날그날의 소회 등에 대해 일기 형식으로 짤막한 글을 쓰면서 지나친 감정과잉으로 빠지지 않고 담담하게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거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 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 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2020년 코로나 터지기 직전 다녀온 홋카이도 비에이의 나홀로나무

조급해하지 않으며 마음챙김과 운동을 꾸준히 하는 등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던, 그렇지만 앞으로의 일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점점 어깨를 짓 누리기 시작할 무렵 드문 드문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담당해왔던 업무와 100%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헤드헌터를 통해 임원 포지션으로의 인터뷰 기회가 두 번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적을 두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의 면접은 확실히 부담이 컸던 터라 잔뜩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결과가 좋지 못했고, 이어진 실패에 좌절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자신감마저 꺾이던 시점에 외국계 재보험사에서 단기로 전략 컨설팅을 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나름 업계에서 그동안 구축해 온 나만의 브랜드가 있다고 자부해 왔는데, 4대 보험도 안 되는 단기 컨설팅 계약이라는 게 자존심 상할 노릇이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해 퇴사를 한지 거의 5개월 만에 아무튼 완전하지는 않지만 일에 복귀하게 되었다.


출근한 첫날 재보험사의 한국 대표가 따로 부르더니 'O상무, 여기 직원들 눈치도 있고 해서 우선은 3개월로 계약했지만, 우리는 O상무를 정식으로 모실 생각으로 불렀어요. 잘 봐주세요'라고 했다. 잘하면 정식으로 풀타임 복귀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없진 않았지만, 솔직히는 그저 5개월 만에 다시 일할 수 있게 된 사실이 기뻤다. 일주일에 3일만 출근하다 보니, 회사에 가는 날이 기다려졌고 그야말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재출발이었다. 일단 뭐라도 일에 복귀하고 나니 확실히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던 것 같다. 단기 컨설팅 계약이긴 하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과 함께, 미약하지만 재도약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그 다음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24년에 더해 앞으로 (목표) 5년 내지 (희망) 10년 더 직장생활을 한다고 가정하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밥벌이라는 기본적인 목적 외에 남은 기간 일을 통해 나는 무엇을 지향하고 싶은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동안 보험계리사로서 쌓아온 업무 경험, 수년간의 임원 경력, 과거 5년 정도 일본과 홍콩에서 근무한 경험, 그리고 그동안 꾸준히 감각을 유지해 온 어학능력을 살려서 내가 가장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운동을 하며 길을 걸으며 시간 날 때마다 내 안의 나와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내가 내린 잠정 결론은 다음의 세 가지였다.  

1) 가슴 뛰는 일을 하자 (솔직히 고백하면, 국내 보험업권에서 임원으로서 지난 몇 년간 근무하면서 가슴 뛰기보다 가슴 조리는 순간이 훨씬 많았다)
2) 배우고 쌓아온 것을 발휘하되, 계속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자
3) 한국이 아닌 아시아 어딘가에서 보험 관련 일할 자리를 찾아보자


마음의 방향을 잡고 나니 기적과 같이 기회가 찾아왔다.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링크트인을 통해 이런저런 채용정보를 스크리닝하고 있던 차에, 홍콩에 본사를 둔 보험과 테크가 연계된 인슈어테크(InsurTech) 스타트업 기업이 최근에 일본 법인을 설립하고 필요 인력을 채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최근 임명된 Country Manager는 기간이 겹치지는 않았지만 내가 과거 일본에서 근무했던 같은 회사 출신임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 일단 1촌부터 맺고 바로 DM을 보냈다. 갑작스러운 메일에 대한 사과와 함께 나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 후, 경험과 강점을 살려 일본 시장에서 다시 일해보고 싶다고, 다만 나이가 이제 곧 50인데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조심스레 타진해 보았다. 1시간이 되기 전에 답이 왔다. 이력서를 한번 보내보라고, 나이 같은 건 중요치 않다는 짧은 멘트와 함께. 기록을 뒤져보니 그날은 어버이날이었고 토요일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이력서를 보낸 후 얼마 안 돼 화상으로 인터뷰를 한번 하자고 답신이 왔고, 바로 며칠 후 1차 화상면접을 시작으로 거의 매주 하나씩 총 세 번을 더해 최종 4차까지의 면접을 거쳐 5월 말 최종적으로 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처음 DM을 보낸 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장 할 일이 많아 그쪽에서는 바로 합류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기존에 자문을 해주고 있던 재보험사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고 나오고 싶어 양자의 양해를 바탕으로 조율한 결과 7월 12일부터 정식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는 도쿄에 가서 일을 해야 하지만, 코로나로 입국 및 비자발급이 잠정 중단된 터라 집 근처의 공유 오피스에서 원격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분간 서울에 앉아 일본 및 홍콩 등의 글로벌 동료들과 화상으로 소통하며 혼자 근무해야 하지만, 어엿한 풀타임 업무로의 복귀였다.


때로는 죽을 만큼 힘든 대신 기본 급여 외에 임원으로서 누려왔던 다양한 혜택에 비하면, 지금 회사에서 받는 보상이나 복지 수준은 사실 떨어지는 편이다. 스타트업의 일원으로서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도 처음엔 조금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유를 얻었다.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자유, 위든 아래든 신경 안 쓰고 질문하고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 해야 할 일만 하면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자유를. 그리고 새로운 배움과 성장의 기회도 얻었다. 그동안 꾸준히 유지해왔다고 생각했지만 많이 녹슬어 있던 영어와 일어 능력이 자연스레 향상되고 있고, 디지탈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을 지원하는 스타트업에서의 업무도 좌충우돌 많이 배우고 있다. 아직 3개월 밖에 경과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낀다. 새로 설립된 일본 법인의 성공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공헌해야겠다는 열망은 크지만, 뭔가에 쫓기듯 자주 압박감을 느끼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 다만, 늘 그렇듯이 단기간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길게 그리고 멀리 보며 흔들림 없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앞을 보며 나아가리라 다짐한다. 이제 정말 다시 시작이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일생일대의 실수로 인한 추락과 재기의 과정을 정리하다 보니, 수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친다. 노래 가사처럼 때로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나의 감정상태를 정확히 모르고 생활하는 때가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한 없이 긍정적으로 비치려다 보니 마음 한 구석에서 상처 받고 울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방치하여 상식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사고로 이어진 게 아닌가 생각도 했고, 긴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씩은 겪게 되는 역경도 결국 신은 감당할 만큼만 주신다는 말씀도 몸소 체험해 본 것 같다.


재출발을 하며, 앞으로는 밖에 보이는 나보다 내 마음의 소리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보다 겸손하고 범사에 더욱 감사하며, 내가 누려온 혜택과 받아온 기회들을 조금이라도 나누며 살고 싶다는 다짐을 새삼스레 하게 된다.


P.S., 추락한 차가운 바닥에서 빛을 찾아 벽을 더듬고 있던 몇 개월간 나를 지탱해주는 몇 권의 책들이 있었다. 특히, 가장 잘 나가는 공직에 있다가 20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스스로를 더욱 발전시킨 다산의 삶에 깊은 감동과 위로를 받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별도의 글로 정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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