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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기노 Sep 26. 2021

Fallen:

어둡고 차가운 수렁으로 추락하다

2021년도 이제 몇 달 안 남았다. 나는 오늘도 적당히 치열하게 일하고, 여러 권의 책을 돌려가며 읽고 기억하기 위해 뭔가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소중한 일상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꾸준히 사진 찍고 인스타에 올리며, 먹기 위해 살고 마시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있다. 이런 내 보통의 소소한 삶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야 말할 수 있지만, 그런 내게도 불과 얼마전까지 빛이 거의 들지 않고 출구가 어딘지도 모를 차갑고 어두운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기가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화려한 꽃 길을 걷다 어느 한순간 추락한 것이다. 작년 11월말부터 약 5개월에 걸친 짧았다면 짧은 추락과 재도약의 과정을 글로 정리하며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지에 대해 다시 한번 마음을 잡아보려 한다.   


나는 소위 보험업계에서 ‘영어가 되는 계리사’라는 포지셔닝으로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직장생활 6년 차이던 2002년, 성과보너스를 반영하지 않은 기본 연봉으로만 (그 당시 환율로) 1억을 받고 글로벌 컨설팅 회사의 홍콩지사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이후 20년 가까이 억대 연봉을 유지하며 수년간 임원으로 재직할 기회도 있었으니 남들에 비해 심하게 운이 좋았던 게 사실이다. 남들은 어떻게 볼 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지금까지 성공이나 출세를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적은 없다. 다만, 더 많이 배우고 계속 성장하고 싶었기에 기회가 생기면 큰 망설임없이 이직을 하다 보니, 누군가는 나를 끊임없는 야심가로 오해했을 지는 모르겠다. 자랑은 아니지만, 소위 어디 가면 ‘프로이직러’로서 명함을 내밀 수 있을 만큼 몇 번 직장을 옮기면서 나의 시장가치가 꾸준히 상승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첫 직장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외국에서 또는 외국계의 한국법인에서 근무하던 중에, 2019년 말 국내의 중소형 보험사로서 경영상황이 썩 좋지 않아 사모펀드에 인수된 회사로부터 사업부문 하나를 총괄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사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소위 C레벨 임원 자리였으며 관리하게 될 조직은 정직원만 100명 이상이었다. 하지만, 공시나 보도된 내용만으로도 회사 상황이 여러가지로 많이 열악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기존에 있던 회사는 모든 경영지표가 시장 내에서 탁월했고 자본력이나 내부 시스템 등이 훨씬 잘 갖춰져 있었으며, 비록 주니어급 임원이었지만 4년을 재직하다 보니 업무상황이나 인간관계가 많이 익숙해지고 안정감마저 들던 시점이었다.

 

지천명이 코 앞인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업계 지인이나 가까운 선배들의 의견을 구해보니 그들의 과반 이상은, 더 큰 리더십을 경험할 좋은 기회이긴 한데 그 회사가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조직에 비하면 많이 힘들거라며 조심스레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이런 경우 항상 결론은 어느 정도 정해놓고 그들이 무슨 조언을 하더라도 결국 자기가 듣고 싶은 부분만 취사선택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또 한번 도전해 보기로 결정하고 이직을 하게 되었다. 지금 와서 돌아 보면 그들의 말을 따랐어야 한다는 후회 같은 건 없다. 혹여라도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내린다 하더라도, 그 조차 내 인생의 일부이기에 결과를 놓고 스스로를 질책하거나 원망할 생각이 전혀 없다.

 

퇴사 후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하기 직전 약 1주일간 휴식을 취한 후, 2월 1일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코로나가 국내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첫 출근 날 인사팀장의 인솔하에 들어선 회의실에는 내가 맡게 될 부문에 속한 팀장 6명이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딱 봐도 적어도 절반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원래는 내가 맡은 총괄장이라는 역할과 팀장들 사이에는 2명의 주니어 임원들이 있었으나 비용절감 및 조직쇄신의 명목으로 다 내 보낸 뒤라, 그들이 보기에는 전임 보스 보다도 어린 사람이 그 더 위의 상사로 부임한 셈이었다. 살아온 세월이 있다 보니 각자의 고집은 감출 수 없지만 팀장들은 모두 예의가 바른 편이었다. 지난 6개월 사이에 회사의 주인이 바뀌고 구조조정을 심하게 한 뒤라 조직의 분위기는 많이 어두웠지만, 몇 일 지내보니 팀장들 모두 저마다의 강점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회사를 다시 살려보려는 의욕이 느껴져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던 것 같다.

 

새출발을 한 회사는 국내 재벌 계열이었다가 사모펀드로 인수된 후에도 뼛속까지 그저 국내사였다. 내 커리어의 대부분을 보내온 외국계 기업에서 임원은 급여를 많이 받는 만큼 더 많이 일하고 더 적극적으로 솔선하는 자리였다. 외국계 기업에서 늘 하던 것처럼 대부분의 직원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발표자료를 직접 손보며 때로는 업무의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들라 치면 팀장들이 와서 ‘총괄님이 너무 그렇게까지 하시면 안됩니다’라고 우려인지 불만인지를 표하곤 했다. 임원들간의 커뮤니케이션도 외국계에서의 그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어딜가나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고, 때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지난한 논쟁과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전직사들에서는 동료애라는 연결고리가 있기에 싸울 때 싸우더라도 서로간에 인간으로서 존중을 해왔었는데, 이 회사에서는 임원회의에서 고성이 오가는 게 비일비재했다. 책임을 지거나 중대한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 임원들이 직접 만나 결정을 내리기 보다 실무자-팀장-임원 간의 루프를 도는 과정이 내겐 너무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어느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긴 했지만, 답답함을 느끼는 날들이 많았고 몇일에 한번 꼴로 밤잠을 설치곤 했다. 그래서 항상 차에 가벼운 운동복과 신발을 가지고 다니며 매주 두세 번은 퇴근 후 남산을 뛰고 해방촌 넘어 해넘이를 보며 마음을 챙긴 후 귀가하곤 했다.

 

그럼에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좌충우돌 하면서도 어느덧 조직의 분위기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고 있는게 스스로 느껴졌다. 출근 직후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코로나로 인하여 외부 저녁 약속은 고사하고 팀장들과 변변한 회식 한번 못한 채 6개월도 더 지난 9월 말에야 처음으로 코로나가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 팀장 전원과 저녁 회식을 하게 되었다. 술잔을 부딪히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원팀이 된 것 같기도 해서 기분 좋게 대리기사 불러 귀가하는 차 안에서 자신감과 안도감으로 충만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과연 그때 내가 정말 제대로 적응했던 걸까? 아니면 적응했다고 자기합리화를 했던 것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무튼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으니 팀장들과의 신뢰관계도 돈독해지는 등 조직생활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임원으로서 외부 활동도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보험업 관련하여 공적 기능의 업무를 수행하던 첫 직장의 선배가 승진을 하여 조직의 장으로 복귀한 소식을 듣고, 서로의 주요 팀장들까지 포함해서 축하 저녁을 마련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었지만, 업무적으로 더욱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접대 자리였다. 6시부터 만나 정말 오랜만에 긴장을 내려놓고 소주를 꽤 마시고 2차로 와인까지 몇 잔 마신 후 9시 조금 넘은 시간에 모임은 끝났다. 같이 간 우리 팀장은 내가 대리기사를 부르는 것을 보고 귀가했다. 그리고 나서의 2-3시간은 내게 악몽 그 자체였고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다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저질렀다.  

 

그날 나는 음주운전을 하고 말았다. 솔직히 어찌된 영문인지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누구를 해치지도 나도 다치지 않았기에 천만다행이었지만, 만취한 채 운전대를 잡고 조금 몰고 가다 길 옆의 교통표지판을 들이받는 대물 사고를 내고 말았고 심야에 경찰서에서 조서까지 쓰게 되었다. 11월 19일 밤이었다, 우리가 흔히 '마(魔)가 씌었다'는 표현을 쓰는 데, 나는 그날 바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경찰서 조사를 마치고 12시가 넘어 집에 오는 택시에서 핸드폰을 열어보니,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귀가한 고3 딸로부터 여러 번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고 내가 답이 없자 문자까지 보낸 것을 발견했다. 눈물이 왈칵 났다. 늘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어머니와, 늘 내 곁에서 나를 지지해주는 아내와 가족들 얼굴이 번갈아 생각났다. 이렇게 어리석은 실수를 한 내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원망스러웠다.                          

추락하다 (사진출처: Google)

밤새 잠을 설친 후 아침 일찍 회사에 나가 사장님이 출근하시자 마자 찾아 뵙고 간밤의 우행(愚行)에 대해 이실직고를 했다. 관료 출신인 사장님은,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며 본인은 그냥 모른 체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점심 무렵부터 회사 내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가 간밤에 음주운전을 했고 대물사고까지 내서 차도 일부 파손됐다는 내용으로. 회사에서 리스한 차량이 내가 속한 보험사의 자동차보험에 가입되어 있었고, 보험처리에 대한 접수과정에서 보상직원에게 연락이 가다 보니 자연스레 말이 퍼지게 된 것 같다. 세상에 비밀은 없기에 내가 저지른 바보같은 사고에 대해 언젠가 누구든 알게 될 것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다만, 자동차보험을 취급하는 손해보험사의 임원이다 보니, 안 그래도 음주운전에 대한 경각심이 고조된 상황에서 혹시라도 언론에서라도 알게 되면 회사의 평판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인사 담당 임원이 사실관계를 확인하러 왔던 차에 창피해 어딘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말했다. 모두가 사실이고 이런 걸로 회사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으니 조용히 물러나겠다고. 그렇게 채 1년을 채우지 못한 채 허망하게 퇴임하게 되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지인이나 선배들은 나보다 더 안타까워했다. 사실, 내가 저지른 사고와 예상치 못한 조기 퇴임으로 인해 금전적인 손실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바보같은 과오를 하루라도 빨리 리셋 하고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회사를 나오고 보니 어느덧 겨울의 초입, 떨어진 기온 이상으로 세상은 많이 추웠다.    


욕망이 있으면 고통이 수반된다고 누군가 애기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겪었던 추락의 시간도 결국 뭔가에 대해 과한 욕심을 부렸던 데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반성을 하게 되었고, 내 스스로 잘 깨닫지 못했지만 내 안에 울고 있는 아이를 방치해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너무나 섬뜩하지만, 그리고 여러 모로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지만 이런 성찰의 시간을 통해 한 뼘 정도는 내면의 키가 더 자란 것 같고 그래서 앞으로 똑바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렇게 추락하고 얼마간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했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Reboot:편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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