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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늘 Oct 15. 2020

P주임과 L주임이 건넨 위로

남의 일상으로 시작해서 남의 일상으로 마무리하는 나의 일상 버리기

술을 끊겠노라. 금주를 다짐한 지 3일이 되었고, 호기롭게 팀원들에게 "저 금주해요"라고 외친 오늘이었다. 그리고 같은 팀 대리님은 말하셨지. "직장인에겐 4대 허언이 있지… 유튜브 할 거다. 퇴사할 거다. 술 끊을 거다. 살 뺄 거다." 격주로 4개의 허언을 번갈아가면서 꺼내는 것 같긴 하지만, 이번 금주는 정말 진지하다.


나에겐 어떤 일이 발생하든지 간에 그 화살을 결과적으로 스스로에게 쏘는 못된 습관이 있다. 그러다 무엇이 그렇게 쌓였는지, 술에만 취하면 자격지심에 빠져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당연히 그 덕에 연애는 고사하고, 술에 취해 찡찡대는 내 모습에 나 마저도 지치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끊어야지.


이러한 다짐을 귀한 보따리 마냥 둘둘 말아 머릿속에 넣어놓고, 기다린 퇴근길. 거리두기가 1단계로 하향되며 지하철 2호선은 사람들로 꽉 찼고, 오늘의 퇴근 메이트는 같은 팀 L주임과 경영지원팀 P주임이었다. (그중 L주임은 종종 나의 넋두리를 들어주는 고마운 동생이자 후배이고, P주임은 경영지원으로 포지션을 옮긴 후 제 일처럼 매사 살뜰히 챙겨주는 고마운 서포터이자 언니이다.)


언제나 퇴근길이 그랬듯 주고받던 일상 이야기 중, P주임이 나에게 이상형을 물었다.

"이상형… 보다는 제가 아직 연애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그런 것 있잖아요. 이런 남자들은 걸러라. 근데 그거 성별 관계없이 기준을 비추어보면 그 걸러야 하는 사람이 저 같아요. 술 좋아하고, 저 주사도 안 좋아요. 다른 사람 힘들게 하고 싶지 않고." 평소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지 않는 P주임과 L주임은 "저는 술 안 마셔도 찡찡대요!"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홀로서기가 잘 되는 때를 기다린다고 덧붙였다.


P주임은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 정적인 그 시간이 가장 좋다고 했다.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재밌고 즐겁긴 한데 가끔은 기가 빨린다며, 나의 공간이 편하다는 그녀가 얼마나 부럽던지. 조곤조곤한 브이로그를 보며 위로받는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며 "남의 일상으로 시작해서 남의 일상으로 마무리"할 때 가장 허무하다고 했다. 순간 그 말은 꽉 찬 지하철의 대기만큼이나 묵직이 나에게 느껴졌다.   


내가 그랬다. 아침에 일어나면 인스타그램부터 켜서 밤중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무한 끌어내림을 하고, 자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주황색 테두리의 스토리들이 회색 테두리들로 모두 바뀔 때까지 돌려 본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 밤 중 가득 찼던 공기를 환기시키고, 자기 전엔 나의 하루를 곰곰이 정리하는 것이 나를 위해 더 옳을 텐데 말이다. 나를 위한 홀로서기를 위해, 무의식적인 비교는 이제 그만 놔줄 때가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 평안을 베개 삼아 쉬어도 불안하지 않는 하루.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아도, 특별한 이벤트가 있지 않아도 행복한 하루. 그런 날들을 절실히 바라는 요즘, 불안이 어디로부터 기인되는지 모른 채 새로운 취미들을 부여잡던 나에게, 오늘의 위로는 숨구멍을 내준 것 같았다. 일단,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법부터 고치는 것으로 시작해야지. 내일 아침엔 활짝 창문부터 열길.


고마워요! P주임님과 L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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