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사람이 되어 따뜻한 글을 쓰는 일에 대하여
최근 에세이집을 한 권 읽었다. 건너 아는 사람이 책을 냈다기에 에세이를 찾아 읽는 편이 아닌데도 부러 서점에 가 책을 샀다. 표지가 예뻤고, 제목이 다정했고, 글이 따뜻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 시간을 살뜰히 가꾸는 사람이 쓴 글이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게 느껴졌다. 문장 사이사이, 글자 틈틈마다 받은 사랑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글쓴이를 아는 이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글처럼 따뜻하고 소탈한 사람이라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사람들도 그를 좋아한다고.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줄 안다는 말에 뭐든 퍼주고 다니던 시절이,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다 티가 난다는 말에 괜히 더 웃고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땐 그게 사랑인 줄, 그러면 그늘이 가려지는 줄 알았다. 커서 쓴 글에서 거짓이 다 들통날 줄도 모르고.
글은 쓴 사람을 닮는다. 특유의 유쾌함으로 낯선 이와도 곧잘 말을 트는 한 친구는 글에도 위트가 잔뜩 묻어난다. 애교가 많고 센스가 좋아 어딜 가든 인기를 독차지하는 한 친구는 넘치는 자기애와 자신감 위에 탄탄한 글을 쓴다. 반면 나의 글은 차갑고 어둡다. 색으로 표현하면 그레이. 미세먼지 지수가 높은 날 고개를 들면 보이는 서울의 하늘과 같은 색이다. 유머의 빈자리를 회의가 채운다. 농담을 모르는 게 쓴 사람을 닮았다.
다른 글을 쓰고 싶었다. 편안하게 다가와 마음 한 구석을 쓰다듬어 주는 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쓴 글 한 편에 인생 전체가 위로받는 듯한 글. 대단한 인사이트, 큰 의미가 담기지는 않았지만 위로하는 힘 하나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 글. 하지만 내가 쓴 글에선 그런 온기가 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오래 궁금했다. 따뜻한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 걸까 하고. 더러는 싫기도 했다. 잠시 스쳐가는 위로 따위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오랜만에 읽은 에세이집, 온기가 가득한 글을 보며 나는 글쓴이가 부러웠다. 얇지 않은 책 한 권에 추억 없는 페이지가 없었다. 늘 곁에 사람이, 돌이켜볼 기억이, 쉬어갈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날 좋은 날 불러내 맥주 한 잔 할 친구가, 손 붙잡고 산책하다 등을 내어주는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책의 중간 어디쯤, 시끌벅적한 시골 식당에서 불콰하게 취한 아버지 친구들이 바둑알을 잘그락 거리는 장면에서, 나는 잠시 책을 덮었다. 딸과 시간을 더 보내기 위해 대나무 발 뒤에 숨어 숨죽이는 아버지를 나도 가지고 싶어서. 오이꽃이, 블루베리 꽃이, 홍국이 피었다고 자랑하는 아버지의 문자를 나도 받고 싶어서. 햇살 찬란한 제주 바다로 소년처럼 뛰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나도 보고 싶어서. 엄마와 나란히 그 뒷모습을 보며 키득대고 싶어서.
책을 끝내고 며칠 뒤, 엄마와 데이트를 했다. 손을 잡고 창덕궁을 걷고, 창덕궁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두서없이 사는 얘기를 늘어놓던 엄마는 불운한 아빠가 불쌍하다 했고, 나는 속으로 그런 아빠를 가진 내가 더 불쌍하다 생각했다. 다른 아빠를 가졌다면 주머니 가득 아빠와의 추억을 넣어뒀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었을 거라고. 그걸 양분 삼아 얼마쯤 더 따뜻한 글을 썼을 거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골목 하나를 지날 때마다 엄마가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냈다. “저기 카페 또 가기로 했는데 못 갔네. 다음 주에 갈까?” “저기 칼국수 맛있었는데 가게 옮긴다더라.” “저기 전에 차 댔다가 주차 딱지 끊은 데 맞지? 저 차 큰일 났다.” 다른 주머니에서 엄마와의 추억이 오소소 쏟아졌다. 어쩌면 나도 따뜻한 글을 쓸 수 있을지 몰라. 문득 그런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