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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금 May 15. 2016

시카고, 여행의 목적

어쩌면 새로운 나는 어디에도 있다

상상 속 여행에선 미아가 되는 것마저 아름답다. 현지인 틈에 섞여 이국적인 장소를 배회하는 나는 마치 자유로운 영혼 같다. 네이버에선 검색도 안 되는 파리 골목길 작은 레스토랑을 안다는 건, 그 자체로 나를 프로 여행자로 만든다. 베스트셀러 여행 책에 나오는 나만의 비밀 장소도 대개 길을 잃고 헤매다 발견되지 않나.

때문에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는 기대한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나와 조우하기를. 이를 통해 그간 지친 나를 달래고 다음 여행까지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기를. 침대 옆 벽에 붙여 놓을 만한 멋진 사진과 되새김질하며 웃을 수 있는 추억을 얻기를. 누구의 여행 계획에도 무거운 짐과 궂은 날씨를 원망하며 넋 빠진 얼굴로 거리를 헤매는 일은 없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말 시카고로 떠난 퇴사 기념 여행은 시작부터 어긋났다.

시카고 오헤어 공항 출국 게이트에서 지하철 탑승구로 가는 길은 유독 멀었다. 2주 치 옷과 생필품을 꾹꾹 눌러 담은 캐리어와 노트북부터 아이패드까지 온갖 전자제품을 다 모아 담은 백팩, 지갑, 가이드북, 세안용품, 화장품 등등 당장 필요할 수도 있는 잡다한 물건으로 가득 찬 숄더백. 어깨가 부서지고 팔이 빠질 것 같았다.


게스트하우스로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지하철역엔 에스컬레이터가 없었고 밖엔 비가 왔다. 생리대까지 바리바리 싸 넣은 짐 속에 우산은 없었다. 우산만 없었다. 어차피 짐이 많아 우산을 들 수 없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쓸데없는 시도였다. 노트북에 물이 스밀까 노심초사하며 나는 울고 싶었다. 짊어진 짐을 다 내려놓고 길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시카고에 온 게 후회됐다. 이번 여행에 몽땅 쏟아부은 퇴직금이 아까웠다.

그런 순간은 다음 날도 계속됐다.


시카고 여행 둘째 날, 나는 여행지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불행을 만났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까지 공들여 짠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아무 이유 없이 교통카드가 안 찍히고 휴대폰 유심 칩이 먹통이 됐다. 신은 내 편이 아니었다. 시카고에 온 걸 후회했다.


결국 시카고 피자 대신 핫도그로 대충 허기를 때우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시카고에 기대했던 것들을 싹 다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며칠 뒤 만날 뉴욕을 기대하자고, 뉴욕에 대비해 푹 쉬며 체력을 회복하자고 생각했다.

다음날, 눈 떠지는 대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 안 다른 침대 일곱 개는 모두 비어있었다. 시계는 11시 20분. 근처 마트에서 레토르트 맥앤치즈와 아이스크림, 젤리, 감자 칩을 사다 침대에 음식을 펼치고 비스듬히 누워 노트북으로 ‘2 broke girls’를 켰다.


정신없이 깔깔 웃으며 드라마를 보다 보니 어느새 쟁여 둔 음식이 떨어졌다. 몸도 찌뿌둥했다. 바깥공기를 쐬고 싶어 져 노트북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근처엔 별 게 없었다. 빈티지 숍, 레코드점, 옷 가게 몇 군데를 둘러보다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사람이 몇 없고 소파가 푹신해 보이는 카페였다. 떡진 머리로 널브러져 드라마 보기 좋았다. 스콘과 밀크 티는 더럽게 맛이 없었지만.


그 후 며칠간 느지막이 일어나고, 게스트하우스 근처를 어슬렁대고, 아무 카페나 들어가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렇게 ‘2 broke girls’ 세 시즌을 시카고에서 끝냈다. 특별히 괜찮은 장소를 발견하진 못했다. 다시 가고 싶을 만큼 맛있는 식당도, 한국에도 있었으면 할 만큼 괜찮은 카페도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시카고에서의 빈 시간이 내게 여유를 줬다.


여행자의 강박을 버리니 여유가 생겼다. 주말도 없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2년 간 일하며 간절히 바란 바로 그 여유였다. 해야 할 일이 사라지고 마음에 여유가 들어서자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이 하나 둘 생겨났다. 또다시 불행을 만나도 의연히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시카고 중심가로 나섰다. 다만 아주 천천히 걸었다. 아주, 아주, 천천히.


여행을 재시작한 첫날, 시카고 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만 하루를 보냈다.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훌쩍 갔다. 미술관 근처 항구를 걷고, 보이는 데서 밥을 먹었다. 나를 향한 눈빛도 피하지 않았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미소를 건넸다.

그런 식으로 시카고 명소 몇 곳을 걸었다.


잔뜩 굳어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귀에 들어왔다. 크리스마스 리스를 목에 선 사자 동상, 사람을 피하지 않는 항구의 오리 떼, 내 얼굴이 사랑스럽다고, 내 신발이 패셔너블하다고, 내가 서 있는 풍경이 아름답다고, 기분 좋게 말해주는 거리의 사람들.

지금 내게 시카고는 그들로 기억된다. 그들이 나로하여금 시카고를 살고 싶은 도시로 기억하게 했다.


길가 잡초도 보도블록 사이 틈이 있어야 자라나듯, 새로운 나는 내게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틈이 있을 때 찾아온다. 어쩌면 새로운 나는 어디에도 있다. 여행은 새로운 나와 조우하기 보다는, 그럴 수 있는 여유를 만들기 위해 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카고에 간다는 사람에게 말한다. 시카고는 참 따뜻한 도시라고. 거기서 얻은 여유가 위로가 돼 지친 나를 잘 달래줬다고.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여행의 기술> by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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