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짧고 굵은 입사 도전기 (中)

by 립미얼론

(전 편에서 계속)


어느덧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고 AI 시대에 돌입하며 한 장소에 모여 공채 필기전형을 보는 모습은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필기전형이라는 것은 전 그룹사 신입채용 입사 지원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 인적성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오프라인 인적성 시험은 수능 시험과 비슷하게 여러 가지 과목을 연달아 치는 방식으로, 수능보다는 짧은 시간 안에 인텐시브하게 풀고 끝나는 일정이었다. (여담이지만 감독관으로 참여한 회사 명찰을 단 선배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이전의 글에도 쓴 적이 있지만 나는 많은 과목 가운데 수학을 가장 자신 없어했다. 중학교 시절 이래로 쭉 수학과 담쌓고 살았고, 대학 시절에도 수학 실력이 필요한 상경계 전공과목을 피하기 위해 철학과로 도망까지 쳤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그즈음의 나는 이차방정식이나 간단한 인수분해조차 버거운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입사를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다. 나머지 과목들인 언어 영역이나 자료 해석은 꽤 자신이 있었고, 게다가 하필 수리 영역이 어려운 것으로 유명한 ☆☆그룹 인적성 시험이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과목보다도 수리 영역을 잘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난생처음으로 풀이 시간이 부족한 시험과 마주하다


1교시는 무난하게 잘 봤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국어/언어 영역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이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풀 수 있었다. 시간이 비교적 여유 있어 모든 답안을 작성하고 잠깐 자리에 엎드려 있었는데, 뒤쪽에서 조그맣게 나는 한숨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난다. 이어지는 시간은 바로 가장 자신 없었던 수리 영역이었는데, 그래도 1교시를 무난하게 잘 본 나는 괜스레 좋은 느낌으로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2교시 수리 영역 시험이 진행되면 될수록 당황스러웠는데, 나는 그때까지 살면서 풀이 시간이 부족한 시험을 쳐본 적이 없었다. 왜냐면 자신 있는 과목은 몇 번을 다시 풀고도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고, 자신 없는 과목의 경우 모르는 문제는 빠르게 포기하고 아는 문제를 하나라도 더 맞추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나는 문해력이 뛰어난 편으로, 풀 수 있는지 여부와 별개로 문제 자체를 이해하는 속도가 매우 빨랐고, 아예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판단 또한 빨랐다. 게다가 아무리 자신 없는 과목이라 하더라도 진짜 모르는 문제는 많아야 2개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어차피 모르는 문제를 붙잡고 있을 시간에 차라리 아는 문제를 틀리지 않게 여러 번 체크하는 전략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풀이 시간이 부족한 시험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몇 분이 주어졌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20문제 중 16문제까지 풀었을 때 시험이 끝나고 말았다. 아, 이렇게 당혹스러울 수가. 이 정도로 시간 배분조차 신경 쓰지 못하고 망한 시험은 인생 처음이었다. 시험이 끝나자 맨 뒤에 앉은 사람은 시험지를 걷어갔고, 그 바로 앞에 있던 사람인 내가 답안지를 맨 뒤부터 차례로 걷어서 제출해야 했다. 인생에서 겪어본 적 없는 큰 낭패감을 느끼며 나는 답안지를 걷기 시작했다.




나, 어쩌면 꽤 잘 본 걸지도?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시기 ☆☆그룹 인적성 시험에는 오답 시 0점이 아닌 감점을 부여하는 규정이 있었다. 이는 찍기 운을 통해 고득점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으로,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그냥 빈칸으로 두어야 했다. 답안지를 걷는 내 눈에 같은 줄 사람들이 몇 문제나 답안지에 마킹을 했는지가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놀랍게도 그 줄에는 나보다 많이 푼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불과 1분 전까지만 해도 4문제나 놓치는 바람에 합격하긴 글렀다고 절망하고 있었는데, 사람의 마음은 참 딱지마냥 쉽게 뒤집어진다. 그 순간부터 어쩌면 내가 꽤 잘 본 걸지도 모르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며 마음이 편해졌다. 그 덕분인지 이어지는 과목들은 큰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풀었는데, 오히려 모의고사 때보다도 더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임했다. 어쩌면 2교시 말미에 예상치 못하게 얻은 자신감이 심신의 안정에 큰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자료 해석 과목 이후부터는 특별히 어려울 것 없는 인성 영역 과목들 뿐이었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고 쉽게 쉽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며칠 후 받아 든 인적성 시험의 결과는 합격이었다. 나중에 (회사에 입사한 후 업무상의 계기로) 알게 된 점인데, 사실 그냥 합격이 아니라 같은 해 하반기 ☆☆기업 인적성 전체 응시자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등수였다. 단 일주일 간 짧고 굵게 준비한 것치곤 매우 성공적인 결과였다. 여담으로 지난 글 말미에 '(내가 딱 한 권 골라서 풀었던) OOO 출판사의 인적성 교재는 오답이 많고 유형도 잘 맞지 않더라'라는 리뷰를 시험장 가는 지하철 안에서 봤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어쨌든 그 책 덕분에 합격했으니 좋은 게 좋은 일이다.


이제 진짜 마지막, 면접만 잘 보면 된다. 남은 시간은 단 2주, 나는 면접 당일 면접장을 뒤집어놓을 각오로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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