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머리가 좋으면 어떤 기분이에요?

by 립미얼론

회사에서 만난 친한 몇몇 동료들은 내 지능이 높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크게 떠벌리고 다니는 사실은 아니지만, 우연한 계기로 지갑에 들어있는 멘사 회원카드를 본다거나 하는 경우에 보통 들키게 된다. 회사는 소문이 참 빠른 곳이라 그 사실은 금세 사람들에게 퍼졌는데, '멘사=IQ156'이라는 식으로 왜곡된 소문이 나는 바람에 지금도 내 IQ가 156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는 웩슬러 검사 기준(SD15) 142/멘사 기준(SD24) 167이며, 156은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숫자다.)


하루는 한 동료로부터 '머리가 좋으면 어떤 기분이에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사실 저 질문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TV나 신문에 나오는 영재들을 보면서 늘 가졌던 궁금증이기도 하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 한 가지는, 일반적으로 '고지능=머리 좋음'이라고 편하게 표현하지만, 실제로 뇌는 엄청나게 다양한 방면으로 발달할 수 있고, IQ가 높다는 사실 만으로 남들보다 '머리가 좋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꼭 맞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편하게 입에 붙는 표현이니 여기선 나도 그냥 쓰겠다.


저 질문을 받기 전까지 머리가 좋아서 어떤 기분인지는 당연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야 스스로 자각한 적도 별로 없었고 남들과 눈에 띄게 다르게 행동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올려보자면,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고) 머리가 좋기 때문에 따라오는 몇 가지 재미있는 특징이 있긴 했던 것 같다.




잔머리가 매우 좋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빨리 돌아가는 잔머리를 가지고 있다. 잔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점은 업무 내외적으로 아주 큰 도움이 된다. 특히 내가 엑셀을 빨리 익힐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 빨리 돌아가는 잔머리였는데, 엑셀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놀이터와 같다.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결과물을 나만의 방법으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업무 도중 마주하는 사소한 문제 상황도 빠르고 쉽게 해결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방향이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어렵진 않지만 생각해 본 적 없는' 방법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해결한 사소한 것들이 꽤 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런 에피소드만 모아봐도 꽤 재밌을 것 같다. 나는 그냥 순간 떠오른 의견을 제시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난데없는 해결책을 가지고 나오니, 항상 '쟤는 잔머리가 좋다'라는 평가를 듣게 된다.



때때로 말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나는 면접까지 올라가면 무조건 합격할 자신이 있는, 누구보다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의외로 말을 잘 못해 어려울 때가 있는데, 바로 말의 속도를 훨씬 앞서가는 생각의 속도 때문이다. 나는 논의나 보고 자리에서 순차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할 때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설명하는 바람에 지적을 듣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예를 들어 A-B-C를 거쳐 D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점을 설명할 때, B와 C에 대한 설명을 대충 넘어갔다가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실제로 내가 (ABC)-D의 순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B-C-D 순서로 벌어지는 일이 있다면, 내 머릿속에서는 A에서 생각이 시작되면 B와 C 단계는 언어화가 되기 전에 프로세싱이 끝나고 D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설명할 때도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도입부 A를 설명하다가 곧장 D단계로 넘어가버려 이해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 점은 윗 문단에서 말한 '잔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는 점과 종종 마이너스 시너지를 일으켜, 내가 내는 의견이 확실한 정답임에도 사람들이 로직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한 번에 채택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공감하지 못하면 능률이 처참하다


이런 경향은 사실 지능이 높고 낮음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공감하지 못한 일은 하기 싫을 것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상사의 지시에 공감했을 때와 그렇지 못했을 때, 그냥 '재밌다', '하기 싫다'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결과물의 편차가 하늘과 땅 차이로 매우 컸다. 이 점은 아마도 내적 동기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 고지능의 특성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라 추정해 본다. 여태까지 몇 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나타났던 특징인데, 나는 업무의 필요성에 대해 내가 이해하고 공감했을 경우에는 바로 에이스 노릇을 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이해/공감할 수 없는 지시가 자꾸 떨어지는 업무를 받았을 때는 평균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성과로 팀에서 평가를 깔아주는 역할을 맡았다. 이건 업무가 바뀌었을 때뿐만 아니라 같은 업무를 쭉 할 때도 마찬가지로 내 이해도/공감도에 따라 들쭉날쭉한 성과가 나왔다. 물론 회사 일을 하다 보면 항상 내가 공감하는 방향으로만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고지능이 반드시 우수한 업무 성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전반적으로 써놓고 보니, 머리가 좋아서 내가 느끼는 기분은 (적어도 회사 생활에서는) 답답함에 가까운 것 같다. 엄청난 천재들처럼 심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이질적인 면을 종종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잘 몰랐는데 있었던 일들을 쭉 써놓고 보니 의외로 어느 정도는 고지능자의 스테레오타입에 부합하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그러니 다음번엔 흔히들 생각하는 고지능자의 모습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면들을 정리해서 써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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