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브>, 2007
내가 생각하는 우연한 행복 하나는, 별생각 없이 TV 채널을 돌리다 꽤 괜찮은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이다. 목요일 아침, 화분에 물을 주고 베란다 순회를 한 바퀴 마친 뒤였다. 영화 채널을 돌리다 '옛날 한국 영화' 화면에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재빨리 검색해보자 영화는 시작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잠깐 봐도 2시간 남짓한 영화의 서사가 짐작될 만큼 영화는 단순하다. 영원히 일곱 살에 멈춰버린 딸(강혜정), 아픈 엄마(배종옥). 이런 딸 앞에 나타난 말썽꾸러기 의경(정경호). 정신지체인 딸에게 단지 너는 조금 늦을 뿐이라며 씩씩하게 딸을 보듬고 사랑하는 엄마에게 - 하늘도 무심하게 -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암이 찾아왔다. 어쩐지 상은(강혜정)은 이 남자 때문에 밥을 먹어도 계속 배가 고프고 맘이 비어버린 것 같다. 이 남자가 보기에도 일곱 살 같은 이 여자는 자꾸만 맘이 쓰인다.
동막골의 강혜정과 허브의 강혜정은 다르다. 쥐어짜 낸 순수함이 아니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아이 같은 눈으로 극에 몰입시킨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속의 하루의 눈이 꼭, 스크린 속 강혜정의 눈을 빼닮았다. 순식간에 집중하고, 솔직하다. 배종옥 배우의 힘은, 엄마와 여자를 동시에 납득시킨다는 것이다. 헝클어진 머리와 단호한 눈빛만으로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가 곧 눈물이 난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카리스마 있는 여배우 역시 배종옥 배우였다. 그녀는 여성들의 로망과 애증 사이, 그 극단을 자유롭게 넘나 든다. 극 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건 배우 정경호가 아니었을까. 우리 동네 경찰서에도 저런 의경 한 명쯤은 있을 것 같다. 다소 과격하지만 제법 정의롭고 따뜻한. 이상하게 그의 툴툴거림은 모든 작품에 사랑스러운 인간미를 더한다. 어딘지 모르게 뺀질거리는 소년의 마스크가 그에게는 지금까지도 잘 어울리는 걸 보면, 그 안의 소년은 아직 살아있다.
자극적이고 복잡한 요즘 영화들과 달리 지극히 평범한 서사에 현실성과 감동을 얹은 것은 오로지 이 배우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