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문 단칸방, 유난히 내성적인 아이

by 니트


미미인형과 피아노학원


굳이 ‘가난’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며 살진 않았다. 날 때부터 너무 당연한 ‘생활’이었기 때문에. 내겐 일상생활인데 굳이 신파극에서 나올 법한 단어로 수식하긴 싫었다. ‘쟤네 집 X나 잘산다?’란 같은 반 남자아이의 조롱을 들어도, ‘엄마가 너랑 친하게 지내지 말랬어’란 친구의 말을 들어도 그다지 부끄럽지도 화나지도 않았다. 그건 걔와 걔네 엄마의 ‘문제’니까. 그래, 오기였다. 오기로라도 의연해야 했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였고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무언의 다짐만 반복했던 것 같다.



다만 이 받아들임이 꽤나 어린 나이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엔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다. 없는 집이라면 늘 그랬듯 부모님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돈 이야기로 자주 싸우셨는데, 싸움 원인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가 일곱 살이었던 것 같다. 그때 처음으로 너무너무 갖고 싶었던 게 생겼기 때문이다. 집 근처 문방구점 통유리 창문 안에 진열되어 있었던 미미인형. 윤기 나는 금발에 예쁜 눈을 가진, 노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인형이었다. 그 인형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 버렸고, 하루종일 눈앞에 아른거렸으며 꿈속에서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엄마 아빠에게 그 인형이 갖고 싶다고, 사달라고 할 수 없었다. 우리 집은 돈이 없는데, 그래서 엄마 아빠가 힘들게 사시는데 내가 그 비싼 인형을 사달라고 하면 엄마 아빠가 분명 슬퍼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에 눈만 뜨면 문방구로 달려가 길가 진열대 앞에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그 인형을 구경했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 인형을 꺼내서 머리를 빗겨주고, 옷을 갈아입히는 상상을 반복하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날도 쪼그리고 앉아 인형을 구경하다 집에 가려고 일어났다. 돌아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뜨거워진 코끝에 조용히 눈가를 훔치면서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그 이후로는 미미인형을 보기 위해 문방구로 가지 않았다.



여덟 살이 되어 형편이 좀 풀렸는지 피아노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피아노를 정말로 좋아했던 나는 학원에서 피아노 치는 게 너무 좋아서 수업이 마치면 몇 시간이고 집에 가지 않고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쳤다. 예쁘고 친절하신 선생님도, 선생님이 해주시는 칭찬도, 악보에 그리는 음표도, 점점 좋아지는 실력도 다 좋았다. 그렇게 바이엘 하권까지 끝내고 잔뜩 기대했던 체르니를 들어가려고 하던 찰나, 피아노학원을 그만둬야 했다. 남동생을 사립 유치원에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땐 남아선호사상이 남아있던 시절이라, 딸의 취미 같은 사교육보단 조금 무리하더라도 아들의 제대로 된 유치원 입학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셨다. 물론 지금도 부모님은 그때가 내내 마음아팠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정말 많이 슬펐다. 어려서 말로 표현하진 못해도, 유치원 대신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작은 학원을 나온 나는 동생 사립 유치원 때문에 그렇게나 좋아하고 잘 다니던 피아노학원을 단칼에 끊어버린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서운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포기하는 법을 하나씩 배워갔다.



제대로 된 현관문도 없는 쪽문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복닥복닥 생활하고, 민달팽이와 꼽등이가 출몰하는 현관 겸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쪽문이 달린 골목길을 돌아 나와 주인집 현관 마당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사춘기 시절 남동생과 한 방을 같이 써도 그리 불편함을 느끼진 못했다.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충분히 많을 테니,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늘 호강한다고 생각했다. 두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모님께 늘 감사했고, 장녀로서 훗날 꼭 호강시켜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은 더 힘들게 살아오신 걸 뻔히 다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의 미미인형과 피아노학원을 포기해야 할 때, 내 삶에서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걸 몸소 느낄 때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바라고 꿈을 꾸는 것. 그걸 탐하는 건 사치와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힘이 생기는 어른이 되면 내 손으로 이 상황을 꼭 탈출하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살고 싶었다. 그렇게 결핍은 오히려 내 욕구를 뚜렷하게 밝혀 주었다. 아니, 아주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말 대신 글로 숨 쉬던 아이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데다 말이 없어 매일 보는 이웃 어른들에게조차 부끄러워 인사도 하기 힘겨워했던 꼬마였다. 집안에서도 늘 말없이 혼자서만 놀았기에 타인과의 상호작용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혼자 벽보 보고 알파벳을 공부하고, 혼자서 책을 들여다보거나 조용히 찬장문을 뜯어 그 안의 물건들을 연구(?)하던 아이였다. 물론 가끔 동네 친구와 놀기도 했지만, 늘 친구의 의견에 따랐던 것 같다. 다른 사람과 말을 주고받는 건 너무도 어색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말을 하는 방법을 잘 몰랐으니 내가 원하는 표현을 잘 할리 만무했고, 클수록 점점 더 입을 닫았다.



그러던 아이가 학교에 들어갔을 땐 오죽했을까. 말도 없고, 표정도 없고. 정말이지 존재감이 없었다. 통상 단체 생활은 말로 빠르게 소통하며 시시각각 변하면서 상호작용하는 것인데, 그 부분에 취약했던 나는 학교 생활과 교우관계에 늘 자신이 없었다. 묵묵히 주어진 걸 열심히 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심한 날은 짝꿍이 “얘 오늘 하루종일 말 한마디 안 했어.”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매사 활발하고 앞에 나서길 잘하는 아이들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신선한 충격이란. 클수록 말 잘하는 사람이 주목을 더 많이 받고 인정받는 걸 보면서 열등감도 점점 커졌다. 말이 없어도 자기표현에 대한 욕구는 컸기에 스스로 답답함도 많이 느꼈다.



그때부터 글로 할 수 있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말로 다 하지 못했던 마음도 글로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글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학교에서 쓰라고 하는 일기는 정직하게 매일 썼고, 선생님과 부모님이 시키는 공부에도 충실했다. 격주로 오는 무료 이동도서관을 늘 기다렸고, 방학 숙제나 백일장으로 글을 써서 상을 타는 일이 참 즐거웠다. 글로써 표현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고, 겨우겨우 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글은 유일한 마음의 숨구멍이었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 오롯이 내가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글은 마음대로 썼다, 지웠다 하며 하고 싶은 걸 다 하도록 천천히 기다려주고 온전히 나를 드러내도록 도와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종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무용수 같았다. 창작의 고통만큼 나만이 할 수 있는 기막힌 표현을 찾았을 때의 그 카타르시스란. 어린 마음에도 이건 내가 잘할 수 있겠다는 묵직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글을 쓰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몇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다른 걸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몰입의 순간. 그 순간을 불태운 결과물은 늘 교내에 전시되었고, 큰상도 받을 수 있었다. 수차례 그런 경험이 반복되니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부터는 글 쓰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꿈이 트라우마로 변하게 되는 사건이 곧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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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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