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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성극 아카이브 Dec 20. 2019

연극 오후 네시, 갤러리 2관 앞

보편적이지 않아서 보편적인 연애.



입체낭독극 <오후 네시, 갤러리 2관 앞>은 1부와 2부 다른 연애담으로 구성되어 있고 후반부에 이 둘을 이어주는 전체적인 틀이 존재한다. 갤러리라는 배경으로 이어지는 두 레즈비언 커플의 보통의 연애사를 담고 있다.


  1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나는 그냥 스무 살, 언니는 완전 어른인 스물두 살’이다. 어릴 때 대학 내 독서동호회에서 선후배 사이로 만난 희원과 주영은 레즈비언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졸업 후 연락이 뜸해진 둘은 어느 계기를 통해 다시 연락을 주고받는다. 주영은 아주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진 지 얼마 안 됐고, 희원은 대학생 때부터 쭉, 주영을 짝사랑해오고 있다. 애인과 헤어지고 시간이 남아도는 주영과 블랙기업을 퇴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취준인 희원은 같이 성수동 카페, 홍대의 칵테일 바 등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둘은 로마로 여행까지 같이 가게 된다. 희원은 낭만의 도시 로마에서 주원과 거리를 확 좁혀 고백을 하겠다는 당찬 계획이 있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여행, 생각만큼 로맨틱하지 못했던 분위기에서 희원은 주영에게 고백하고, 주영은 어물쩡 거절한다. 그 후 둘은 반나절 따로 여행을 하며 시간을 갖는다.

  2부는 보다 우울하다. 해인과 세영은 오래된 연인이다. 해인은 교수인 부모님 아래에서 부족할 것 없이 큰 듯하지만 많은 결핍을 가졌다. 해인이 집에서 자해를 다시 시작하고 병원에 온 뒤로, 둘은 같이 살게 된다. 세영은 해인의 곁을 지키며 해인의 결핍과 우울을 감내한다. 하지만 사람은 지치기 마련이고. 둘은 여러 번 위기를 겪는다. 늘 우울하진 않았지만 같이 있을 때 참 서글펐던 커플은 결국 끝을 맞이한다. 언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는 해인. 세영은 해인과 자신이 대체 왜 헤어졌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해인의 초대장을 받고 둘이 헤어졌던 갤러리 왔을 때 세영은 깨닫는다. 둘은 그저 맞지 않았던 거다. 그런 연애도 있는 거다.


  이 공연에서 주목해야 할 건 보편성이다. 로맨스 연극인 두 단막극은 완벽하게 ‘퀴어의 로맨스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커플의 일화는 헤테로 연애사의 보편성을 무시하고 퀴어 커플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다른 성별로, 특히 헤테로 로맨스로 대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이면서 보편적이지 않다.

  희원과 주영의 첫 만남부터 그렇다. 둘은 첫 만남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읽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를 읽고 가부장제 담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독서 동아리에서의 만남부터가 이미 퀴어적이다. 가부장제 담론으로 시작한 독서동아리의 토의는 곧 퀴어 담론으로 넘어가는데, 퀴어 혐오적 의견이 나오자 주여이 커밍아웃을 해버린다. 둘이 만날 수 있는 공간, 레즈비언 클럽이나 레즈비언 어플이 아니라 일상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성적 지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그렸다. 그렇기 때문에 ‘퀴어 서사만의 우연성’이 생긴다. 희원과 주영이 다시 만났을 때, 둘은 로마로 여행을 떠난다. 같은 호텔 방에서 한 뼘 사이를 두고 싱글 침대에서 잔다. 주영은 은연중에 희원의 대시 아닌 대시를 느끼고 있지만, 아니 적어도 둘은 연애의 가능성이 있는 관계지만 둘은 같이 여행을 가고 같은 방을 잡는다.

  해인과 세영의 연애 또한 그렇다. ‘친구들이 아니라 선배랑 노는 게 더 좋아요.’ 둘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고등학교 벤치에서 서로 무릎을 베고 눕거나 어깨에 기대어 있어도 아무도 둘을 의심하지 않는 것. 그게 가능하고 아무도 둘을 놀리지 않는 것. 이게 퀴어 서사이다. 해인의 심리적 불안 또한 퀴어 커뮤니티에서는 흔한 일이다. 커플 중 한쪽이 정신과에 꾸준히 진료를 받거나, 상담사를 꾸준히 방문해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한쪽이 치료비를 내주는 일은 분명 헤테로보다 퀴어 사회에서 더 익숙함을 느낄 수 있는 관계이다.


  퀴어 서사라는 게 엄청 장황한 게 아니다. 이런 내용 하나, 디테일 하나에서 퀴어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당사자들만의 공감과 유대를 얻어내는 것, 커뮤니티를 자연스럽게 그리는 것. 그런 것들이 하나씩 모여 ‘퀴어 서사’를 만든다. 공연의 장점은 이 부분에 있다. ‘일반’의 보편성과 퀴어 보편성을 구분하고 그것들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퀴어 서사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우연성을 더해서 로맨틱한 어쩔 땐 멜랑꼴리 한 연극적 분위기를 강화시킨다. 우연성은 헤테로 로맨스 서사에서는 굉장히 보편적인 장치이지만, 퀴어 서사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런 부분에서 공연은 현실과의 거리를 살며시 벌리며 상황을 낭만화시킨다.


  공연 안에서의 소품 활용도 인상 깊었다. 이 공연은 리딩 낭독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들이 대본을 들고 나오는데, 그게 태블릿 PC였다. 대본 용도로 태블릿 피씨를 보다가도 공연 중 상황에 맞춰서 태블릿 피씨로 카톡을 보내고, 전화를 하고, 사진을 찍는 등 소품으로 활용된다. 재치 있고 영리한 활용이었다. 뒤로 비치는 영상 자료들의 전체적인 퀄리티는 아쉬웠으나 공연 규모와 리딩 공연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감안한다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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