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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성극 아카이브 Dec 21. 2019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재미와 의미를 모두 잡은 여성퀴어극

  


연극이 가진 고유 특성 때문인지 ‘연극계’는 변화가 느리다. 근대를 넘어 현대에 들어선 예술 중에서 변화가 빠른 곳이 어디 있겠느냐만, 연극계는 그중에서도 유난히 보수적이다. 연극이 400년 된 희곡을 끊임없이 곱씹는 작업을 하는 것도 연극계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영화는 천 년 전의 소재를 빌려와도 화면의 프레임은 현대의 문법을 따르고, 새로운 기술로 촬영되기 때문에 단순 재현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연극은 제한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소수의 관객 앞에서 올라온다. 이러한 연극의 공간성, 폐쇄성은 같은 연극을 여러 번 올리게 만들고 ‘오리지널’을 주기적으로 끌어올리게 한다. 그렇다. 연극에선 유난히 고전을 곱씹는다. 옛날의 희곡이 희곡으로 남아 있지 않고 끊임없이 현대의 대학로에서 살아나기 때문에 현대의 관객과 창작자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어떻게 하면 400년 전의 희곡을 올리면서 현대의 관객에게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까?

  고전을 어떻게 현대의 시점에서 올리느냐는 아주 섬세한 고민이 필요한 문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경우 그 명성에 비해 현대의 관객들은 서사 자체에 대해서 감동받지 못한다. 첫 번째로, 그때와 지금의 사랑에 대한 시각과 방법이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나오는 가장 큰 장벽이자 고난인 ‘가문’이 현대의 관객들에게 비극적 요소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가문이 장벽이 되는 사랑이야 있다. 하지만 그 ‘가문’이 400년 전처럼 불가항력의 절대적 장벽은 아니다. 납득 가능한 보편적 비극적 보편에서도 벗어난다. 이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의 최대 단점은 연극적 대사나 미사여구의 공감 불가능이 아니다. 연극의 틀을 설정하는 대전제인 ‘가문’에 있다. <줄리엣과 줄리엣>은 이 두 가지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연극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 중 하나인 사회와 약자에 대해 다뤘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2202

  각색의 지점은 간단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줄리엣과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로 바꾼 것이다. 이 간단한 변화로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은 많은 부분에서 현시대의 관객과 닿을 수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이 강화되는 시점은 이 둘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시도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루어질 수 없음이라는 불가항력 같은 사항에 가문 대신 퀴어의 사랑을 넣었다. ‘가문’보다 ‘퀴어’는 21세기 관객에게 훨씬 쉽게 사랑의 장벽으로 다가온다.

  <줄리엣과 줄리엣>에서 가문과의 불화는 이들의 장벽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원작을 교묘히 이용하여 연극은 좋은 장면들을 뽑아낸다. 자신의 여동생이 여자와 사귄다는 걸 알아챈 티볼트 케플렛이 줄리엣 몬테규(한송희 배우)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쏟자, 줄리엣 몬테규의 동생 로미오 몬테규는 자신의 누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 반지는 사실 내가 전해주라고 한 거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티볼트는 바로 태도를 바꾼다. 줄리엣 몬테규와 로미오 몬테규 둘 다 몬테규 가문의 사람이지만, 남성 로미오의 허락 없는 청혼은 젊은이의 귀여운 도전이 되고, 줄리엣의 청혼은 더럽고 타락한 일이 됐다. 이렇게 연극은 영리하게도 현시대와 동떨어진 장면을 동시대로 끌어오기 위해 몇몇 개의 작은 장면을 삽입한다.

  줄리엣 몬테규를 이해해주는 듯했던 로미오 몬테규가 던지는 ‘그냥 적당히 살면 안 되냐.’ 같은 말들이 그러하다. '적당히'라는 단어에 줄리엣과 줄리엣의 사랑은 없다. 남들 다 불같이 사랑해서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 적당히 결혼해서 적당히 둘이 알고 지내라. '적당히'란 그런 단어이다. 누구보다 줄리엣 몬테규를 응원하고 아끼는 로미오 몬테규의 대사이기에 줄리엣 몬테규는 더 충격을 받는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내가 받을 상처를 걱정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는 장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미오 몬테규의 이 대사는 그 어느 대사보다 더 못처럼 박힌다. 그리고 이 '적당히'는 현시대의 퀴어들이 맞닥뜨린 커다란 장벽이다. '적당히'라는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은 가끔 무시되고, 피곤한 사람이 된다. 이렇게 연극은 몇몇의 작지만 강한 장면들을 삽입해서 비극적 사랑의 공간을 셰익스피어 시대에서 단번에 현시대로 연결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이 공연에서 동시대를 본다.

  티볼트 케플렛이 내뱉는 폭언들도 이와 비슷하다. 폭언들은 잔인할 정도로 현대적이다. 줄리엣 몬테규와 줄리엣 케플렛(김희연 배우)이 소중하게 들고 있던 무언가를 티볼트는 말 몇 마디로 가차 없이 뭉갠다. 또한 줄리엣 케플렛을 무작정 싸고돌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취급하는 줄리엣 케플렛의 집안이 이러하다. 가문과의 사랑은 빠지고, 그 안에 퀴어의 사랑과 현시대의 딸을 바라보는 시선-예쁜 공주 취급하지만 절대 가문의 대소사에 끼워주지 않는-이 들어갔다. 줄리엣 케플렛이 아무리 사랑한다고 외쳐도 집 안의 남자들은 그저 친구가 더 좋은 어린 여자 취급이나 한다. 



  줄리엣과 줄리엣이 사랑을 속삭이는 그 언어들은 거의 각색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 밀회의 언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느낄 수 있다. 줄리엣과 줄리엣이 서로를 바라보며 뱉은 미사여구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둘을 응원하게 된다. 이젠 수명이 다 했다고 생각한 대사와 서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이렇게 <줄리엣과 줄리엣>은 앞서 말한 장면들로, 그리고 적절한 각색으로 현대의 관객을 공연 안으로 끌어와 집중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이 대사들에 집중하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본래 갖고 있던 비극성을 이렇게 잘 살린 현대적 시점의 각색이 또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줄리엣과 줄리엣은 좋은 지점을 잡아냈다.

  두 줄리엣을 도와주는 종교인이 동양에서 온 스님이라는 설정도 재치 있는 각색이었다. 기독교는 21세기에도 가장 퀴어 배제적인 종교다. ‘신부님’은 가문의 사랑은 허락할지 몰라도 동성의 사랑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스님이 등장한다. 이런 재치 있고 섬세한 부분들이 공연의 리얼리티를 살린다.


  나름 여성극을 챙겨봤다고 말은 하지만, 부끄럽게도 여성 퀴어극을 만난 적은 극히 드물었다. 중년 여성이 주인공인 뮤지컬을 만나느냐, 여성 퀴어가 주인공인 연극을 만나느냐. 거의 세기의 대결이다. 어쩌다 여성퀴어극이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어서 찾아보면 공연 기간이 길어야 한 달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줄리엣과 줄리엣>은 여성 퀴어극이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취득한다. 본래 고전이라고 불리는 서사를 각색하면서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준 것만으로도 이렇게 신선하게 느껴진다.

  대학로엔 흔히 말하는 남성 투톱극이 있다. 그리고 그중 고정 비율은 남성 퀴어에 대해 말한다. 가끔 그저 남성 배우 둘의 도전, 헤테로 남성들의 연기 풀 늘리기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공연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남성 퀴어극은 극장의 규모를 가리지 않고 꽤 올라온다. 적어도 한국 공연 생태계에서는 나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이기쁨 연출과 한송희 극작은 ‘로미오와 로미오’가 아닌 <줄리엣과 줄리엣>을 선택했다. 정말 안타까운 말이지만 현 중소극장 시류를 본다면 ‘로미오와 로미오’가 더 보편적인 선택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줄리엣과 줄리엣>은 의미를 띤다. 연극 내에서의 여성 퀴어 가시화는 아직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연극은 같은 소수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성 퀴어에 대해서만 몇십 년 동안 말했지, 여성 퀴어의 이야기를 조명하진 않았다. <줄리엣과 줄리엣>은 몇 없는 여성 퀴어 연극을 올려 매진시켰다는 것,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했다는 게 가장 큰 의미이다.


같이보면 좋은 에세이 

https://brunch.co.kr/@nebula17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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