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모두 책 먹는 행복한 여우가 될 수 있다
책 덮고 그만 먹어라
책 보고 싶으면 빨리 밥 먹고 저쪽 가서 봐
너희들과 식탁에서 늘 주고받는 대화다. 특히 첫째 네가 그러하니 요새는 줄줄이 동생들이 따라 하는구나.
엄마 어렸을 적 시절을 떠올려보면 엄마도 그랬던 것 같아. 책 보는 것을 멈출 수 없어서 먹으면서도 보았었다. 시험기간에는 아예 공부할 책을 펴놓고 먹기도 했었다. 너희들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려니 하면서도 엄마 입장에서는 먹는 것과 보는 것을 따로 행동했으면 하는 바람도 생기더구나.
그런데 먹는 것과 보는 것이 진정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 아니었을까? 엄마와 아빠의 어린 시절과 지금의 너희들의 모습을 보니 그 생각을 떨구지 못하겠구나. 이러한 생각이 어쩌면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자 습성이 아니었나 싶다.
벨기에의 한 여성 데보라 드라이온(Debora Drion)은 어린 시절부터 레스토랑과 서점을 한 공간에 마련하여 운영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 꿈을 펼치기 위해 남편과 함께 모든 자금을 모아 브뤼셀(Brussel) 외곽에 쿡앤북(cook & book) 서점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쉽게 시도하지 못했을 꿈이다. 남편의 전직이 변호사였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의 꿈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고 단순하게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동안의 숨은 노력과 이 꿈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분위기와 주변 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본인의 가치관과 새로운 시대를 펼칠 수 있도록 기능적 역할을 하는 가치관이 진심으로 부러울 뿐이다.
- 각종 매체와 잡지에 소개된 쿡앤북. 이 외에도 다양한 매체에 소개되어 있다(홈페이지 참고)-
벨기에는 만화강국이라 불린다. 그만큼 만화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넘쳐나는 국민들이 대다수이다. 만화박물관과 만화 전문서점이 있고 도서관에는 만화 전문 코너가 있다. 벨기에 국민에게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캐릭터인 스머프과 틴틴이 여전히 살아있는 나라다. 문화강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싶은 국가의 정책적인 후원도 무시 못한다. 어린이 그림책 역시 만화책이 많다. 양질의 만화책이 어린이를 위한 권장도서로 정해져 있으며 수많은 그림책 작가들의 훌륭한 작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곳이 벨기에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 자란 이들에게 기존의 밋밋하고 건조한 배열로 책을 판매하는 서점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개성을 중시하는 유럽인들의 심성이 이 곳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각자의 개성과 생각을 현실화시킬 공간을 세련된 디자인 감각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이 넓디넓은 1500㎡ 면적에 9가지 테마를 가진 건물들이 능선처럼 이어진 건물이었으니 그 자체로 거대한 책 테마파크에 왔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건물 이름도 너무나 맛깔스러운 쿡앤북(cook & book)!
너희들에게 처음 이 서점을 가자고 이야기했을 때 첫째부터 막내까지 모두 흥분하였다. 서점과 카페, 레스토랑이 동시에 있는 서점이고 가끔 요리 이벤트도 한다고 소개했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모두 쿠킹스튜디오라고 생각하며 일 년 내내 요리하는 것을 보고 맛보고 책도 보는 맛동산으로 기대를 한 것 같다. 엄마인 내가 설명을 잘 못 한 것인지 너희들이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만.
처음에는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각 섹션별로 차별화를 두어 책을 배치한 레스토랑을 보며 이내 곧 함성을 질렀었다. 그림책이나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책을 품은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으니 말이다. 팔색조 같은 공간이 펼쳐질 때마다 너희들은 서점에 온 것이 아니라 책놀이터에 왔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처음 들어간 책방에서 우리는 새장에 들어왔나라고 착각할 정도의 놀라운 광경을 보고 말았다. 천정에 가득 매달린 책들의 날갯짓에 탄성을 질러댔다. 예약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하느라 바쁜 직원들 속에서 우리는 매달린 책들을 구경하고 책꽂이 사이사이에 놓인 탁자들을 보며 흥겨워하였다.
영어서적 섹션은 아예 영국을 통째로 옮겨 놓은 데코였다. 와인바가 있는 곳에는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피아노와 CD가 놓여 있다. 어린이 책 섹션에는 슈퍼맨과 배트맨이 우리를 반겨주고 수많은 만화 주인공들이 줄줄이 환대해주기도 했다.
서점 각 섹션에서 콘서트와 영화 상영, 요리 워크숍, 작가와의 만남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 요리 서적 섹션, 간단한 요리 도구와 요리책이 구비되어 있다 -
- 예술 섹션 - 빨간색 네온 색상의 책꽂이와 연두색 큐브가 눈에 띈다 -
고전 책과 어린이책 섹션- 가족들이 모임을 하고 어린이들은 위층에서 책을 보고 논다
어린이책 섹션- 장난감과 각종 캐릭터도 함께 구비되어 있다. 현관에서 슈퍼맨과 배트맨이 반겨준다
영어서적 섹션 - 영국을 상징하는 차와 붉은 양탄자와 국기로 데코 한 것이 특징이다
음악서적 섹션-각종 CD와 LP가 있다. 옆에 와인바가 있으며 원하는 이는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다
이런 곳에서 먹고 마시며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기막힌 휴가 아닌가? 몸과 마음의 양식을 배 불리는 가장 현명한 장소가 아니던가?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구를 창의적인 발상으로 구현해 낸 곳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대형서점 한 구석 또는 한 층에 마련된 카페테리아가 부설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먹는 것과 읽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지식욕과 식욕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아예 전제하고 있는 공간이다. 어차피 지식욕과 식욕은 글자 하나 덧붙임 차이일 뿐. 흔히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들이 있다. '아는 것이 많으면 먹고 싶은 것이 많다'. 정설로 확인되지 않은 말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주고받는 문장이다. 이는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을 표현한 말이기에 쉽게 공감하는 말이자 자연스럽게 내뱉는 말이다. 그러하기에 이 서점을 기획한 이는 정말 영리한 서점 주인이라 볼 수밖에 없다.
너희들 모두 즐겨 읽었던 '책 먹는 여우'
그 책에서도 책을 읽는 것을 먹는 것으로 비유하고 표현한다. 먹는 것은 우리들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행동이다. 읽는 것은 우리들의 지적 성장을 위한 비타민 같은 행위이다. 지식 (知識)과 음식( 飮食)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이 곳. 뜻은 다르지만 같은 음을 가진 '식'자에 대한 개념을 동화적으로 표현한 이 곳.
얼마나 너희들이 기특했는지 모른다. 쿡앤북에서 원래 목적대로 먹고 책 보고 그랬어야 했는데 책만 보고 눈만 배불려 준 무심한 엄마를 그래도 이해해주니 말이다. 이 멋진 서점을 눈으로만 즐기게 해서 미안한 마음을 이미 너희들은 헤아리고 있었단다. 선뜻 먹기에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그래도 배를 불리지 않았아도 좋은 책과 멋진 곳을 구경시켜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너희들에게 엄마는 사랑의 빚을 진 것 같다.
책을 가지고 놀고
책을 좋아하고 읽고
책을 구경하고
책을 아끼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여행이어서.
그. 러. 나.
엄마는 너희들의 아름다운 마음 가득 담긴 책 한 권을 소유하게 되어 진심 행복한 서점 여행이었다.
& 출판전문매거진 '출판저널' 484호(2016년 5월호)에 게재된 브뤼셀 서점에 대한 글 중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