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달리며 때로는 느리도록 걷는 그 순간들이 일구어내는 참맛
네덜란드는 어딘가 모르게 우리나라와 닮아있었다. 그래서 더 살갑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문명의 힘보다 자연적인 부대낌으로 만난 네덜란드 구석구석에는 언제나처럼 자전거가 있었다. 그래서 자전거 여행이 더 호흡하기 쉬운 숨결이었나 보다.
자전거가 지나간 길 위에 근육 무늬가 찍힌다
둥근 바퀴의 발바닥이 흙과 돌을 밟을 때마다
당신은 온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비포장도로처럼 울퉁불퉁한 바람이
당신의 머리칼을 마구 흔들어 헝클어뜨린다
당신의 자전거는 피의 에너지로 굴러간다
- 김기택 「자전거 타는 사람」 中에서 -
네덜란드에서는 '빨리빨리'라는 말을 좀처럼 들을 수 없다. 비록 마음속에 그 단어들이 꽉 채워져 있어 혀끝으로 내뱉고 싶어도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그 잠깐의 다급함을 이기지 못해 마음의 여유를 팽개쳐 버린 어리석음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북이 등껍질처럼 달라붙은 감정적 습관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 못된 습관은 시간을 공간 속에 녹여내는 일들로 시나브로 바뀌어 가고 있었고 성숙과 풍요를 향해 내딛음을 치고 있었다.
김 훈의 '자전거 여행' 속의 한 문장 하나하나에 깃든 발견과 사색의 기쁨을 들추어내면서 나도 서서히 풍경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풍경은 내게 친절하게 답하지 않았지만 새롭게 다가온 모습들은 내게 친절하게 기억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최대 국립공원인 호흐 페일루어 공원(Nationaal Park Hoge Veluwe)은 사계절 내내 색색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곳에 가야 만날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참 좋다. 봄 여름 가을에 가보았다. 눈 내리는 겨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도 가슴 벅차다. 하루 종일 자전거로 달려도 그 공원 전체를 다 둘러보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이 곳은 조금씩 아껴가며 다녀야 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보려 하다가는 체할 것이다.
드러난 풍경과 감추어진 풍경 사이에 숨바꼭질하며 나타나는 자연의 존재감은 사람 마음이 얼마나 더 비워져야 저 멋진 풍광들을 품을 수 있을지를 알려준다.
그래서 더 태고의 분위기를 간직한 공원이다. 숲이 나타나면 숲을 즐기고 사막이 나타나면 사막 가운데를 걷고 초원이 나타나면 초원을 달리면 된다.
그러다 자연을 닮은 화가 고흐의 꽤 많은 작품이 걸려있는 크뢸러뮐러 미술관에 들려 잠시 숨고르기를 하면 더없이 행복하다. 생전 처음 본 낯선 꽃들과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야생동물들과의 조우는 생명의 비밀스러움을 경험케 하는 배움터이다.
아침 일찍부터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곳에서 며칠 동안 머물며 시간을 채워가는 자전거 여행자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확 트인 초원길 같은 자전거 길에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과 동화 같은 하얀 구름을 눈 앞에 바라보며 자전거를 타는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여행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다. 자주 자전거를 멈추고 그 진경들을 바라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멈추지 않는다면 여행이 아니다. 바라보고 품어야 하는 시간이 절대 필요한 공간 섞인 시절이기 때문이다.
「정감록」에 따르면 환란은 세상으로부터 온다.
자연과 인간의 직접성을 훼손하는
모든 인위적 장치와 제도가 재앙이며 환란인데,
인간은 이 사나운 세상이 쫓아올 수 없는 오목한 땅에 터를 잡고 깊이 숨어서
생명의 위엄과 생명의 자연성을 보존해야 하며,
이 은둔과 보존이야말로
저 사나운 세상을 향하여 최후의 총반격을 감행할 후방기지인 것이다.
김훈, 「자전거 여행」 中에서
국립공원이지만 언뜻 보면 아무것도 관리하지 않은듯한 공원이다.
썩어가는 나무, 쓰러진 나무 방치된 것 같은 숲과 늪지대 같은 질퍽거리는 땅. 바로 그것을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그 공원을 살리는 특별관리법이었다. 실로 대단한 용기이자 철학이다.
그러한 자연을 버무려 놓은 곳에서 자전거로 유랑하며 다니는 것은 회복을 꿈꾸는 삶의 전형이다.
하얀 자전거가 수두룩하게 대기하고 있는 바로 그 공원에서의 삶이다.
유럽 곳곳에는 운하로 이루어진 도시들이 있다. 수상도시라고 불려지는 그곳은 이탈리아의 베니스가 대표 명사가 되어 비슷한 생태구조만 형성되면 베니스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콜마르는 프랑스의 베니스, 밤베르크는 독일의 베니스, 브뤼헤는 벨기에의 베니스.
네덜란드에도 더치 베니스라고 불려지는 곳이 있다. 운하를 끼고 있는 마을은 동화책 속에서나 나올듯한 외양을 하고 있다. 히트호른을 처음 대한 날의 그 눈부신 설렘은 두고두고 생각나게 만든다.
아기자기한 색상의 꽃들이 심어진 마당, 이엉으로 엮어진 지붕을 가진 소담스러운 집, 물에 비추어진 집과 하늘의 모습마저 세상의 유일한 풍경화가 되어버리는 그림 같은 마을, 이 마을은 자동차로 다닐 수가 없다. 자전거나 배로만 다닐 수 있다. 물론 마을 어귀까지 자동차로 들어올 수는 있다.
마을 사람들 모두 느리게 사는 사람 같아 보인다. 그것은 여행자들의 상대적인 시선이지 그들은 결코 느리지 않다. 놀랄 만큼 부지런하다. 느리게 산다면 그것은 바쁘기만 한 삶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와 너그러움을 삶 속에 펼치며 살아가는 모습일 게다. 단지 서두르지 않고 재촉하지 않기에 느리게 사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이다. 그래서 이 마을이 좋다.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의 아름다움이 소문나서 사람들의 방문이 잦아졌다. 네덜란드 마을마다 하나둘씩 있는 레스토랑이나 아이스크림 가게 그리고 공방과 작은 박물관 이게 전부다.
요란한 상업적 광고도 없고 장삿속이라 불려질 만한 것들이 별로 없어서 청순한 느낌이 드는 이 아날로그적 마을이 그저 좋다.
여기서 자전거로 다니려면 자전거 타는 실력이 꽤 좋아야 할 것 같다. 중간중간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좁은 길도 잘 살피며 다녀야 한다. 외길처럼 좁다란 길에 오가는 사람들과 부딪혀도 잠시 자전거를 세우는 여유도 가득해야 할 것이다.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한 그곳의 사계절이 참 아름답더라.
마을 이름도 독특하다. 히트호른은 염소뿔이란 뜻이다. 1170년 자이더세이(Zuiderzee)에 일어난 대홍수가 이 지역까지 미쳤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이 이 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수장되거나 사장된 수많은 염소뿔을 발견하여 마을 이름을 이리 지었다고 한다.
아픔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간 그들의 노력이 첨단의 기술이 아니라 느릿느릿한 인간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이 잔잔한 감동으로 어우러지는 감흥의 마을이다.
앙증맞은 소녀가 어여쁜 원피스를 입고 튤립 피어있는 곳에서 방긋 웃고 있는 모습이 연상되는 풍차가 있는 마을. 이러한 모습을 동화책이나 달력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 있다.
풍차마을이라고 하여 수많은 여행자들이 찾아가는 잔세스칸스(Zaanse schans) 말고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 풍차마을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곳이기에 더욱 소중한 곳이다.
수로를 끼고 있는 길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면 18세기에 만들어진 19개의 풍차를 지나치며 볼 수 있다.
그중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풍차도 있다. 풍차가 생각보다 크고 넓어서 그 안에 일반 가정집으로 개조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빨래가 널린 풍차도 나름 운치가 있다.
펄럭이는 속옷들은 멀리서 보면 새하얀 구름이 잠시 땅 위에 내려앉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전거길과 산책길이 나란히 놓여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기분 좋게 산책하는 사람들도 모두 풍차 마을의 첫 모습을 간직한 멋에 취해 잠시 머뭇거린다.
이내 사람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풍차는 네덜란드의 목가적 풍경을 완성시켜주는 감상적인 장치가 아니라 오랜 세월 끊임없는 물(水)과의 싸움과 생존이 점철된 삶의 굴곡이 새겨진 역사적 유물이라는 것을!
자전거를 탄 풍경이 이 곳에서는 단순한 여행자의 감상으로 맞게 되면 미안해질 것이라는 것을!
바다보다 낮은 땅에 사는 민족의 힘겨운 투쟁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숭고한 터전이었음을 조심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네덜란드 전역은 튤립으로 넘실댄다. 튤립축제가 이루어지는 꾀이껀호프(Keukenhof)에는 잘 다듬어진 정원을 볼 수 있다면 네덜란드의 드넓은 밭은 튤립이 가득 심긴 투박하고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속도로 양 옆에 초록 풀밭 속에 화려한 튤립밭은 얼핏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묘하게 자연스러운 화려함을 만들어낸다. 빨강, 노랑, 분홍, 하얀색이 잔뜩 심어진 꽃밭을 자동차로 쌩~달려가며 바라보는 묘미가 남다르다. 튤립축제가 이루어지는 공원으로 가는 길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꽃들의 이어짐이다.
실제로 튤립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자전거를 대여해주는 곳이 있다.
밭고랑 사이를 조심스레 걸어가며 마치 튤립밭에 파묻힌 감격으로 수줍어하는 튤립 꽃송이들을 보는 감격은 첫 만남처럼 쑥스럽고 경쾌한 추억이 되어 버린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속도로 튤립을 마주 대하며 그 향을 맡는 시간들을 품고 있다는 것은 남모른 비밀문서를 꼭꼭 숨겨두는 놀이다.
드넓은 튤립밭을 바라보는 것조차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낙농과 화훼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네덜란드인의 강인함을 저 붉게 타오르는 튤립밭에서 슬쩍 엿볼 수 있다.
동시에 튤립 한 송이가 몇 채의 집값과 맞먹는 가치를 가졌던 네덜란드 황금기에 일어난 수많은 에피소드를 짐짓 떠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지는 봄꽃의 넘실거림은
지금이 인생의 봄날이라고 느끼고 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다독여주고도 남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튤립축제에 몰려드는 것일까?
2015년은 고흐 사망 125주기로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곳곳에서 특별전시가 이루어졌다.
특별전시뿐 아니라 특별한 조형물도 만들어졌는데, 에인트호번(Eindhoven)과 반 고흐가 머물렀던 마을 누에넌(Nuenen) 사이에 아름다운 자전거길이 만들어졌다.
네덜란드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인 단 로서하르더(Daan Roosegaarde)가 도로에 설치된 조약돌과 태양열 LED 조명으로 만든 자전거길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자전거길의 일부를 명화 '별이 빛나는 밤'으로 형상화한 길이다.
세상이 빛을 잃어갈 무렵 서서히 길에서 빛이 새어나온다.
그 역설의 빛남을 온몸으로 부대끼는 시골길이다. 주변에 내세울만한 근사한 볼거리는 없다.
소박한 자전거길이다.
그 소박함에서 흘러나오는 반고흐의 진심을 자전거 페달로 느낄 수 있는 예민함이 있다면
이 자전거길은 잊지 못할 사색과 감상의 길이다.
어린아이들은 길바닥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신비로움에 소리 지르며
연인들은 둘만의 영롱한 사랑의 추억 때문에 흥분할 것이다.
어른들은 돈 맥클린의 'starry starry night' 노래를 흥얼거리며 인생을 회고해보는 그런 길이다.
반짝이는 길이 끝나는 곳에서 여전히 이어진 기존의 자전거길은 건조해 보이나 처음부터 함께 했던 존재감 뚜렷한 시골 자전거길이다. 그 길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