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100억이 당첨돼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할꺼야?"
예전에 친구들이랑 이 주제로 잠깐 얘기 나눈 적이 있었는데,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종류가 뭐가 됐건 '일'이라는 것을 계속 하긴 할 것 같다고 했고.
사명감으로 불타올라서 일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대부분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일이라는 것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가끔씩 '이렇게 사는게 맞나? 이런 질문을 하게될 것이다.
웹/앱 디자이너는 이렇다. 내가 관심도 없는 제품의 스펙을 연구하고, 내 취향이 아닌 타인의 취향에 맞춰 색과 폰트를 고른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디자인 하는 직업이 아니라 남들이 원하는 대로 디자인 해야 하는 비중이 크다. 사람은 본래 본인을 표현 할 때 쾌감을 느끼기 마련인데, 상업 디자인이라는 일은 자아는 침묵하고 타인의 세계를 관찰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다 문득 공허함이 밀려온다.
'이렇게 사는게 맞나?'
'앞으로 몇 십년을 계속 일어게 살아도 괜찮을까?'
이러한 무언가에 대한 갈증은 결국 다음 3가지 종류의 결핍에서 기원한다.
1. 비교로부터 오는 경제적 상대성
갈수록 점점 내 자신보다 타인을 더 자주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다. 주변 사람, 혹은 SNS 너머 화려한 일상을 누리는 이들과 내 자신을 비교하다 보면 ‘부의 격차’가 느껴져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2. 시공간의 제약이 주는 구속감
회사에 출근하던 시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내 시간이지만 내 시간을 온전히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일상이 답답했다. 내 시간을 스스로 운용할 수 있는 자유, 마음껏 어디론가 떠날 자유를 저당 잡힌 채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하루가 반복됐다.
3. 존재의 이유, 즉 삶의 의미 부재
단순히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단계를 넘어,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스스로 그 의미를 또렷하게 알고 있지 못하면 결국 '일'이라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1번 문제가 해결되면 2번 문제도 어느정도 해결 가능해진다. 1번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꾸준히 발전하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3번에 대한 솔루션만 생각해봤다.
내가 하는 일: 자아성장, 밥벌이 도구 → (X)
내가 하는 일: 자아성장, 밥벌이 도구 + 사회적 불만 개선해주는 도구 → (O)
돌이켜 보니, 내 '개인'의 성장만 바라 보고 달려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는 허무감이 온다. 이렇게 노력해서 뭐 하지?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때 의미를 만드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찾아 봤다. 이런 방법이 있었다.
세상의 수많은 부조리 중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 하나를 ‘내 성장’과 연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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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부조리가 (또는 비효율, 결핍 등) 나를 가장 짜증나게 하는가?"
(예) 똑같은 모양, 똑같은 크기의 상자 (획일화, 다양성 배척)
이 사회가 개개인에게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일정한 틀. 예를들어 대학은 꼭 가야 하한다던가 대학을 졸업 하면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 해야 하고, 취업하면 30 이 넘기전에 결혼 해야 하고, 결혼 하면 아이는 당연히 꼭 낳아야 하며, 집은 몇억 이상의 아파트를 사야 하고, 차는 어떻고 저쩌고.. 등등.
나는 나이고 싶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특히 내 속도 대로 걷고 싶다. 타인과 내 스스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그러기 위해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공존했으면 좋겠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 제 속도로,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갔으면 좋겠다. 건강하지 못한 비교는 그만하고 싶다.
오지랖
이 '오지랖'이라는 것은 '획일화된 사회'의 사은품, 또는 1+1같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게 특히 심한 것 같다.
나이가 차도 결혼을 안한 사람 있으면 별로 안 친한 지인이든 심지어는 오며가며 우연히 마주친 택시기사든 할 거 없이 왜 결혼을 안 했느냐, 한국 출산율 걱정이다, 결혼은 꼭 해야 한다.. 라는식의 온갖 오지랖이 아무렇지도 않게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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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있는 일이 그 사회적 불편함을 개선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진짜 바꿀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다. 관점을 바꿔보자는 것이 포인트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내가 하는일이 하루 아침에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아주 작은 스크래치는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든 그 작은 스크래치와, 다른 사람들이 만든 스크래치가 쌓이고 쌓이면 작은 균열이 생기고 그게 누적되면 결국 예상치 못했던 어떠한 큰 변화를 민들 수 있지 않을까. 개인의 '성취'를 넘어서 사회적 '공헌‘을 하게 되는 셈이다.
여튼 내 일이 어떻게 앞서 적어봤던 '사회적 불만'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일 중 '상세페이지 디자인'하는 일
→ 사람들이 본인답게 온라인 쇼핑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기
= 무조건 판매량만 늘리려고 하기보다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기.
= FOMO를 자극해서 구매하게 하기, 유행에 따라 쇼핑하게 하기, 남들 시산 의식해서 구매하게 하기보다는 본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뭔지 알게 해주고 꼭 필요한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기
= 회사 입장에서 보면 단기적으로 보면 당장 매출이 줄어드는게 아닐까 걱정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 방법이 더 회사의 브랜딩에도 좋고 반품율, 낮은 구매 후기도 줄여줄 수 있을 듯. 성공적인 브랜딩은 충성 고객을 늘려주고 장기적 매출에 도움 될 것.
= 즉, '나다움' 만들어주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여러 일 중 하나는 상세 페이지 제작이다. 이 일에 위와 같이 사회적 의미를 더하면, 상세페이지 디자인은 이제 더이상 단순히 제품을 많이 팔기 위한 일이 아니다.
'나다움'을 설계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남들과 다른 선택, 가장 본인스러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화면을 구성하는 일이다. 내가 만든 앱/웹사이트를 사용하는 순간만큼은 사용자가 자신만의 고유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유도된 선택이 아닌 자율적 탐색이 가능한 동선을 설계하며 '나다움'을 응원하는 가치를 심는 작업이다.
내 작업물들은 단순히 예쁜 디자인의 모음이 아니길 바란다. 세상의 문제를 나만의 시각적 언어로 해결해 나간 '솔루션의 기록'이고 싶다.
이렇게 내가 싫어하는 불편함와 내 업무를 연결하면, 디자인 가이드 한 줄을 긋는 행위도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는 일이 된다. 내 작업에 디자이너로서의 개인 성장을 위한 연습임과 동시에 누군가의 삶에서 '비교'를 줄여주고 '다양성'을 지켜주는 작업으로 프레임을 씌우면, 로또 100억이 당첨돼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긴 할 듯. 살짝 종류가 바뀌고 빈도가 달라질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