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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병현 Oct 20. 2019

학회에 가고 싶었던 공익 (3)

코딩하는공익

산굼부리 오름 갈대밭

  처음 몰아보는 SUV의 엔진은 굉장했다. 오르막에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원래 차가 뒤로 밀려야 정상인 줄 알았는데, 스토닉은 슬금슬금 앞으로 나가더라. 가속도, 감속도 필자가 밟는 대로 즉각적으로 반응해 줘서 감동이었다. 애초에 신형 풀옵션 SUV를 2012년형 스파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이긴 하다만, 정말 필자의 자차와 비교해 모든 면에서 우월했다. 차선변경시 경고알림을 주는 기능도 너무 좋았다. 창문을 모두 내리고 바람을 맞으며 30분가량을 달렸다. 제주도의 바람은 안동의 그것과는 냄새부터가 달랐다. 모든 경험이 다 소중했다.


  산굼부리 오름은 억새 맛집이다. 억새풀이 가득해 누가 놀러와도 인생샷을 건져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필자도 당장 셀카봉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고에서 수학여행을 오는 바람에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지만 꿋꿋하게 셀카봉을 꺼내 혼자서 사진을 찍었다. 바로 전날 불빛정원에서도 혼자 놀았는데 여기라고 못 놀 게 뭐가 있겠는가?


학회에서 바로 도망쳐 온 거라 정장 바지에 넥타이까지 끼고 있었다.

  관광지에서 정장을 차려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자. 주변에 출장을 왔다가 도망쳐나온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여튼 혼자 저러고 있으니 학생들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 죄송한데 저희 사진좀 찍어주시겠어요?"


  네 팀인가 다섯 팀인가를 찍어줬다. 오빠라고 불러준 팀은 정성스럽게 찍었고 아저씨라고 불러 준 팀은 초점이 나가거나 사람이 잘려나가게 찍어 줬다.


  뭐. 왜. 문제 있나?


  그나저나 여기도 커플 명소였다. 눈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시야에 커플이 안 보이는 각도를 찾을 수 없었다. 젠장. 이번 여행에는 뭐가 꼈나보다.


  갈대숲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두 바퀴나 돌았다. 갈대밭에서 두 시간 가량이나 시간을 보내고서 성산 일출봉으로 출발했다. 사실 이 타이밍에 학회장으로 돌아가면 공짜 점심을 먹을 수 있었겠지만 제주도까지 왔는데 굳이 점심 때문에 일정을 바꿔서야 되겠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며 차에 올랐다. 이번에도 크루즈컨트롤 기능을 맘껏 누렸다. 운전은 정말 좋고, 안 피곤한 운전은 더 좋다!


바람이 너무 셌다

  성산 일출봉은 바람이 매서웠다. 30분동안 드라이한 머리 쑥대머리가 되어버리는 데 3초면 충분했다. 눈도 제대로 못 떴다. 일출봉에는 무료관람 코스와 유료관람 코스가 나뉘어 있는데, 유료관람 코스에는 수학여행 온 꼬꼬마들이 가득했다. 필자는 그냥 산세 구경만 하면 충분할 것 같다 생각해 무료관람 코스만 구경하고 내려왔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굉장히 많았다. 여기에서도 단체사진 요청을 받았다. 하긴, 이런 부탁은 일행이 있는 사람 보다는 혼자 온 사람에게 하는게 편할 것 같기는 하다.


  일출봉에서 바람을 맞으며 지도를 펼쳤다.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하는게 좋을까? 일단 바닷가를 보면서 운전을 좀 하고 싶으니 해안을 따라 내려가보기로 했다. 지도에 보니 쇠소깍이라는 장소가 있더라. 뭐 하는 곳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이름이 신기해서 저기에 가 보기로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쇠소깍 초입에서부터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상하게 생긴 하얀 바위로 가득 들어찬 계곡이 필자를 반겨줬다. 와, 이런 경관이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했다. 그런데 거기서 졸졸 흐르는 물이 바다와 만나는 구간이 있다. 이 곳이 쇠소깍이다. 경치도 예쁜데 그 위에 조각배가 동동 떠 있더라.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노를 저으며 신선놀음을 즐기고 있었다.


  저런 액티비티를 마다할 필자가 아니다. 배 한 척에 두명씩 타게 되어 있었는데, 이걸 혼자 타면 비용부담은 두 배가 될지언정 저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배를 한 척 빌려서 노는 비용은 2만 원 이었다.


  매표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필자의 차례가 되었다. 2만 원을 내밀며 말했다.


  "성인 한 명이요."


  카운터에 계신 분이 뒤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 혼자 오신 분 계신데요?"

  "여기를 혼자 온다고?"

  "네. 혼자래요."

  "만원 빼드려."

  "네. 혼자 오신 손님, 만원만 주세요."


  제주도 사람들은 혼자 온 손님에게 친절하구나. 안 친절해도 되고 2만원 다 내도 되니까 제발 좀 조용히 해 주면 좋겠다. 뒤에서도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 혼자 왔대."

  "우리가 네 명이서 와서 아깝다. 세 명이면 네가 저 사람이랑 타면 되는데."

  "왜 하필 난데?"

  "네가 제일 못생겼잖아."

  "꺄르륽"


  다 들었다, 나쁜 사람들아.


  익수사고로 소지품이 물에 젖을 수 있다는 약관에 서명을 하고 주의사항을 안내받았다. 구명조끼를 받아서 입고 조금 걸어내려가니 선착장이 보였다.


  "여기 혼자 오신 분 계신데요?"

  "먼저 태워드려!"

  "네! 혼자 오신 분! 이리 오세요!"


  악몽이 재현됐다. 아, 진짜 친절한 제주도 사람들. 다시는 제주도 혼자서 안 온다. 서러워서 살겠나.


  "어머, 저 사람 혼자 왔대!"

  

  뒤에서 들려 오는 쑥덕거림은 이제 필자의 멘탈에 스크래치를 내지 못 한다. 이왕 혼자 온거, 배를 넓게 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 이렇게라도 장점을 찾아 합리화를 해야지 맘이 편할 것 같았다. 다른 배는 커플끼리 마주보고 앉아서 놀더라. 남자친구가 노를 젓고 있으면 여자친구가 인생샷을 찍어 주는 식으로 재미있게들 놀고 있었다.


  필자도 그렇게 놀고 싶었다. 다행히 필자는 반쯤 양손잡이다. 오른 손으로 셀카봉을 들고 왼 손으로 노를 지으며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그러니 왼 손이 남자친구 역할을 하고, 오른 손이 여자친구 역할을 한 것이다. 슬프다. 아니, 하나도 안 슬프다. 진짜다. 흑흑.



왼 손 만으로 배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현란한 손놀림을 보라.

  넥타이까지 차려 입은 사람이 혼자서 셀카봉과 노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으니 이목이 집중됐다. 저 위쪽 전망대에서 수학 여행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일행이 이쪽 보고 소리를 지른다.


  "거기 자주색 오빠! 손 흔들어 주세요!"


  열심히 흔들어 줬다. 아저씨라고 했으면 가운뎃 손가락을 들어서... 흠흠.


  

배의 조향보다 셀카가 중요하므로 셀카봉을 오른손에 쥐었다.

  물이 무척이나 맑고 투명했다. 예전에는 아크릴로 된 투명카약을 운행했다는데 시에서 금지시켰다고. 안전을 생각하면 옳은 조치이긴 하다. 눈에 잘 보이는 나무배끼리도 접촉사고가 엄청나게 발생하던데 투명한 재질이면 더더욱 그렇겠지.


  필자는 여기서 의외의 재능을 발견했다. 필자의 노 컨트롤 솜씨는 매우 비범했다. 접촉사고가 나기 전 상대 배를 밀어서 방향을 바꿔 주고, 바위에 닿기 전 부드럽게 바위를 밀어내어 암초지대를 탈출하고. 수백년 전에 태어났으면 뱃사공이나 어부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팔이 저려서 더 이상은 노를 젓기 싫어질 때까지 실컷 놀았다. 조금 놀다 보니 주변 커플들도 신경이 쓰이지 않더라. 배를 제자리에서 회전시키고, 후진하고, 급커브를 도는 등 기교를 부리는게 너무 재미있었다.


  쇠소깍 관광이 끝나니 갈 곳을 잃었다. 이제 어디를 갈지 고민을 하다가 일단 중문관광단지 라는 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이것저것 모여있다길래. 그리고 페이스북을 열었다.


소원이 이루어졌어

  세상에. 독자분 중에 카카오에서 일하는 분이 계셨고, 그 분께서 사옥에 계시는 분께 따로 부탁을 드려 주셨다. 카카오 본사로 초대를 받게 된 것이다.


  배재경님의 연락처를 전달 받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당장 전화를 걸었다.


  세상에, 카카오래 카카오!


  커플명소일 가능성이 0%인 곳이라 더 좋았다. 여자친구 생기기 전에 제주도 다시 오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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