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병현 Oct 17. 2019

학회에 가고 싶었던 공익 (2)

코딩하는 공익

  학회 첫째날 아침이 밝았다. 9시까지만 가면 되지만 너무 설레어서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열심히 씻고, 꽃단장도 하고, 성경 묵상까지 했지만 시간이 남아서 결국 학회가 열리는 곳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나온 직후에 찍은 사진

  제주도도 길거리는 뭐 다른 동네랑 크게 다를 게 없더라. 출근하느라 바쁜 사람들, 돌아다니는 관광객들, 가게 문 여는 사람들. 숙소는 동문시장 건너편이고 학회장은 라마다프라자 호텔이다. 대충 바닷가가 보일때까지 쭉 걷다가 바닷길을 타고 왼쪽으로 쭉 걸으면 되는 여정이었다.


PyconKR 에코백

  여행이나 출장 중에 짐을 최대한 간소하게 하기 위하여 에코백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돌돌 말아서 캐리어에 넣으면 수납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저번에 파이콘에서 받은 에코백을 챙겼다. 원래 학회에는 다른 컨퍼런스 굿즈 들고 가는게 예절이라 배웠다. 누구에게 배웠냐고? 그런 거 물어보지 말자.


  제주도에서의 첫 아침. 짭짤하고 습한 바닷바람 섞인 길거리. 첫 학회 참가. 그저 설레고 또 설렜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서 태어난 사람인지라 바다가 있는 도시에 가기만 해도 설렌다. 그런데 제주도는 섬이고, 학회장도 바닷가고, 곧 바닷길을 걸을 수도 있지 않은가? 두근두근!


물고기 동상을 봐서 신났다. 흥이 도를 넘어갔다.

  심지어 바닷가에 가니 물고기 동상이 있었다. 너무 신났다. 흥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필자는 물고기를 좋아한다. 양가 일족의 숙명이 나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린고 하니, 할아버지는 민물에서 낚시를 해서 생계를 유지한 적이 있는 분이시며 외할아버지는 낚싯방을 운영하셨다. 당연히 낚시와 물고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교육환경에서 자랐다. 물고기는 좋다.


  한층 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해안길을 걸었다.


이렇게 탁 트인 길을 걷는데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가 봐도 이공계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필자와 같이 화구통을 메고 있는 사람도 보이기 시작했다. 학회에 가는구나. 점점 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학회 배너


2층으로 가니 학회 등록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



필자의 이름도 발견

  필자의 이름을 확인한 뒤, 등록번호를 알려드리고, 무언가 가득 들어있는 쇼핑백과 등록증 따위를 받았다.


보따리를 풀어 보았다

  쇼핑백 안에는 우산으로 추정되는 굿즈와 학회 포스터, 자료집, 시간표 등이 들어있었다. 좌상단에 보이는 상자는 학회에 제출된 프로시딩(논문)들이 저장된 USB가 들어있다.


접어서 목걸이에 넣으면 된다.

  별도로 받은 종이에는 명찰과 영수증 등이 인쇄되어 있었다. 접어서 명찰에 넣으면 되는 구조다. 우측 상단에 있는 티켓이 가장 중요한 물건이다. 저게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 특히나 ICTC는 뱅큇(연회) 음식이 끝내주기로 유명하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티켓이다. 그치만 필자는 다이어트중이므로 저 티켓을 잃어버리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맛있는 음식들을 눈 앞에 두고 자제를 할 자신이 없거든.



상상텃밭 김수빈 대표와의 카톡

  허허. 라마다호텔에서 라마단을 하게 생겼다. 하지만 김수빈 대표가 간과한 게 있다. 라마단은 해가 지고 나면 음식을 먹는다는 점이다. 츄릅.


너무 설레는 바람에 제일 먼저 왔다

  포스터 자리가 꽤 괜찮았다. 너무 설레는 바람에 제일 먼저 와서 포스터를 붙였다. 이제 저 앞에 한 시간 반 동안 서서, 질문을 받으면 된다. 물론 필자 역시 열심히 돌아다니며 재미있어 보이는 연구가 있으면 질문을 할 것이다.


좀 학자 같은가?

  여튼 요즘 하도 사람들이 필자를 문돌이 취급해서 시무룩해 있었는데 이 기회를 틈타 공돌이스러운 사진도 찍었다. 참고로 저 넥타이는 필자가 가장 아끼는 녀석이다. 흰색 무늬는 사실 하나 하나가 전부 강아지 모양이다. 가까이서 보면 귀여워서 심장이 멎을 수도 있다.


  포스터 세션이 시작되고, 정말로 열심히 돌아다녔다. 카이스트 로고가 붙어있는 포스터가 있길래 슥 다가갔다.


  "혹시 몇 학번이세요?"

  "석사 18학번입니다."

  "아, 나는 박사 18학번인데. 자퇴했지만."

  "선배님!"


  혼자 서 있었으면 많이 뻘쭘했을 것이다. 말동무를 주웠다. 서로 사진도 찍어줬다. 그런데 그 후배분, 사진을 잘 못 찍는다. 그래서 안 올릴거다. 둘이서 대화하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분이 슥 끼어드신다.


  "아. 내가 카이스트 박사 02학번인데."

  

  황급히 도망쳤다.


  여러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요즘 어느 분야에건 딥러닝을 가져다 쓰는 추세인 것 같다. 그 중 국방과학연구소 아저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워낙 재밌는 주제인데 설명도 잘 하시길래 다른 분이 설명을 듣고 계시는 사이 옆에 물끄러미 서서 같이 들었다.


  "설명을 굉장히 잘 하시네요, 제게도 한 번 설명 부탁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혹시 GAN에 대해서는 사전 지식이 있으신가요?"

  "많이 아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러시면 설명이 쉽겠네요."


  포스터세션임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레이져포인터까지 준비해 오셨다. 굉장한 열정이셨다. 연구를 요약하자면, 보통 북한쪽에서 남한을 공격할 때 42일정도 캠페인을 돌리고 중단한다고 한다. 그 쪽에서도 보고서를 작성해서 상부에 제출하고 실적발표를 하는 데 처리되는 행정 소요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 공격을 빨리 잡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 선생님께서 만든 기술이면 첫 5일간의 공격패턴을 분석해서 이후 38일간의 공격을 모두 잡아내는게 가능해진다고 한다.


  "와 진짜 대단하십니다. 재밌는 것 하셨네요. 그런데 왜 Augmentation을 원본의 6배만 하셨어요? 성능도 되게 좋아보이는데 더 불리시지."

  "굉장히 좋은 질문이십니다. 사실 저희는 퇴근할 때 디바이스를 다 끄고 가야 되거든요. 일과중에 쭉 돌리기 힘든게 저도 행정업무도 봐야 하고."

  "아..."

  "저희는 PIP도 못 쓰고요, 아나콘다도 못 써요. 패키지 한번 깔려면 외부망에서 휠을 받아서 7번에 걸쳐서 넘겨야 합니다. 사유서 쓰고."


  순간 너무 공감이 되어서 눈물이 날 뻔 했다.


  "선생님, 저는 노동청에 있는데 저희도 망분리 돼있거든요. 저는 기관 IP차단도 먹여봤어요!"

  "아아 저와 비슷한 처지의 분을 만나다니. 사실 제 연구 성과보다는 이런 상황에서 개발하는 노하우에 대해서 더 발표하고 싶거든요."

  "십분 이해합니다. 저는 말이죠."


  학회장에서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랑 부둥켜안고 울뻔했다.



  포스터 세션이 끝나고 다음 일정을 대충 둘러봤다. AI세션은 첫째날에는 더는 없더라. 그래서 망설임없이 쏘카를 예약하고 떠나기로 했다. 학회장에 제주시 공무원들이 출장 나와서 관광안내도 도와주고 계셨다. 지도를 한 장 받아서 차에 올랐다.


학자 모드 off, 관광객 모드 on

  이번에는 큰 맘 먹고 SUV를 빌려 보기로 했다. 지능형 운전보조장치까지 달린 걸로. 기아 스토닉을 빌렸는데 레이보다 두 배 이상 비쌌다. 흑흑. 하지만 돈 값을 하더라. 자차가 스파크인데, 정말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 성능이 뛰어났다. 밟으면 밟는 대로 가속되고 오르막에서도 뒤로 밀리지 않는다니. 크루즈컨트롤도 태어나서 처음 써 봤는데 신세계였다! 너무 신나서 이 날 200km를 넘게 달려버렸다.


  우선 전날 택시기사님이 추천해주신 산굼부리 오름으로 향하기로 했다. 거기서 구경을 하고 좀 더 오른쪽으로 달리면 성산 일출봉을 볼 수 있다. 그 다음 일정은 일출봉에서 고민하자. 출발이다.


  학회를 열심히 듣고 오겠다던 공익은, 이렇게 학회 시작 2시간만에 탈주를 해버린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사실 제주도에서 가장 가 보고 싶은 곳은 카카오 본사."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학회에 가고 싶었던 공익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