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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병현 Oct 17. 2019

학회에 가고 싶었던 공익 (1)

코딩하는 공익

  ICTC 2019라는 학회에 프로시딩 두 건이 붙었다.


  왜 여기 냈냐면, 저렴한데다가 국내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공익 월급으로는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에 참석할 수 없다. 지원금이 나올 구석도 없고.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제주도에 3박 4일간 머무르는것조차 비용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수소문했다.


  "혹시 학회 참석 안 해도 프로시딩 나가나요?"


  

학회측에 보낸 메일

  학회에도 따로 연락을 넣어 포스터 세션으로 배정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오럴 스피치로 배정되었다가 펑크가 나면 세션 진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포스터 세션 정도는 빠져도 행사 진행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다.


  그래, 공익놈이 무슨 학회냐. 관공서에 앉아서 청소나 열심히 해야지.


  학회 40일 전 부터 이미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14일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니, 이번주 수목금 제주도에서 학회가 열리는데! 두 편이나 붙어서 등록료도 백만 원 넘게 내놨는데! 그런데 가지도 못 한다니 억울했다. 눈을 감고 제주도 해안도로를 달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름도 모르는 학자들과 처음 보는 기술을 두고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하는 상상도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다녀와야겠다.


  그래서 당장 휴가를 올려버렸다. 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휴가를 결재받고 곧바로 비행기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공익생활 중에 재산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중간에 좀 빨리 소모한다고 죽기야 하겠나? 먹고 살 길은 다 생기겠지. 내친김에 숙소까지 예약했다.


  그리고 관광지는 전혀 알아보지 않았다. 제주도에 대한 정보는 굳이 필요할까 싶었다. 놀러 가는게 아니라 학회 참석하는거니까. 낮에는 학자로써 보내고 밤에는 작가로써 시간을 보내면 족하지.


  무척이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15일 오전. 안동에서 대구로 운전을 했다. 주말에 갔어야 될 병원을 미리 들리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근처 공영주차장은 모두 만차표지가 되어 있기에 잠시 헤메다가 사설주차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루 주차요금 8천 원. 무난한 것 같다. 게다가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밴으로 공항까지 데려다 주시기까지 하셨다. 서비스 대박.


모르는 사람이 찍어 준 사진

  공항에 도착하니 텐션이 너무 올라서 주체할 수 없었다. 복무를 시작하고는 비행기를 처음 타 보는거다. 그 전에는 많이 타 봤냐고? 아니. 정확하게 여섯 번 타 봤다. 제주도에 내려와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도, 필자는 비행기를 타 본 회수가 10번이 되지 않는다.


포스터를 운반하기 위한 화구통

  다 좋았다. 정말 좋았다. 그런데 화구통은 너무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웠다. 다음에는 그냥 전지 한 장에 인쇄할 게 아니라, a4용지 여러 장에 인쇄해 가서 붙이고 그 자리에서 버리고 와야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아니면 접어도 되는 천 같은 재질에 인쇄하던가.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캐리어는 수화물로 부치고 화구통은 들고 타기로 했다. 비행기에서 전파 없는 한 시간을 보내려면 지루할테니 성경책도 챙겼다.


구름보다 높이 올라가는 순간이 너무 좋다

  비행기에서 알차게 보내려던 한 시간짜리 계획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저 사진을 찍자마자 기절하듯이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착륙할 때의 덜컹거리는 충격에 잠에서 깼다. 눈도 채 못 뜬 채 화구통을 들고 비행기에서 내려 셔틀에 탑승했다. 제주공항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후 4시 30분 무렵이었다. 부랴부랴 친구들에게 수소문해 이 시간에 둘러볼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오설록 티뮤지엄 가. 박물관은 볼 필요 없고, 거기 가서 롤케익이랑 차 한 잔 마시면 된다."


  오케이, 접수. 관광지도 안 알아보고 그냥 왔는데 렌트카를 알아보고 왔을 리도 없다. 필자는 그냥 맘편하게 쏘카를 예약했다. 제주공항에는 렌트카 업체들을 위한 셔틀버스 탑승장소가 따로 있었다. 여기에서 쏘카 셔틀버스를 타고 쏘카존으로 이동했다. 포토존도 꾸며져 있고 주차장도 넓고 되게 좋았다.


육지에서도 섬에서도 경차 인생이다

  대충 가장 저렴한 레이를 빌려서 티뮤지엄까지 달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제주도 운전자들은 대구 운전자들보다도 훨씬 험하다! 도로 위의 자동차 대부분이 하, 허, 호 번호판이 붙어있는 렌트카였다. 세상에. 도로사정도 좋지 않은데 타지 와서 텐션 올라간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달려야 한다니!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비매너 운전자의 방해로 인해 차선변경에 실패해 엉뚱한 길로 잘못 빠지게 되었다.


  요즘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며 마음을 넓게 쓰고 있다. 그래, 처음 제주도에서 운전해 보는 데 신기한 길도 구경해 보면 좋지. 운 좋게 주유소를 발견해 기름도 넣고, 조금 달리다 보니 말을 키우는 목장도 있었다. 대로변에 있는 승마체험 목장이 아니라 정말로 말들이 풀을 뜯고 뛰노는 목장. 운전중이라 사진은 못 찍었지만, 그렇게 많은 말이 한 곳에 모여있는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좀 더 헤메다 보니 불빛정원이라는 곳도 보였다. 슬슬 어스름이 들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거기서 뿜어져나오는 형형색색의 LED조명은 필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저 곳은 틀림없이 야간개장을 하리라.


  대충 첫날의 관광루트가 완성되었다. 네비 누나의 잔소리를 들으며 오설록 티뮤지엄에 도착하니 여섯시 반이 되어 있었다. 마감이 7시까지라니 부랴부랴 친구들의 추천메뉴를 주문했다.


친구들의 원픽

  롤케이크 한 조각과 '달빛걷기'라는 이름의 녹차를 한 잔 주문했다. 차 맛이 정말 끝내줬다. 별이 잔뜩 내려앉은 제주도의 밤바다를 형상한 블렌딩 티라는데, 녹차 특유의 향 뒤로 시트러스의 상큼한 향이 은은하게 밀려온다. 너무 좋았다. 롤케익도 장난이 아니었다. 녹차 케이크 속에 크림치즈를 꽉꽉 채워두다니, 맛이 없을 수가 없잖아. 비겁하다. 치트키를 사용하다니.


드라이를 30분 했으나 공항에서 비를 맞아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맛있는 것을 먹으니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첫끼니였다. 들뜬 기분에 평소에는 절대 안 찍던 셀카도 찍었다. 남은 녹차를 홀짝이며 선물용 간식 코너를 기웃거렸다. 여기 녹차 초콜릿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안 살 수 없잖아? 부모님과 상상텃밭 친구들, 그리고 교회 꼬꼬마들과 목사님께 드릴 선물까지 넉넉하게 샀다. 마음은 풍족해지고 잔고는 빈곤해졌다.


  대충 마감시간 직전까지 버팅기며 녹차의 역사 따위의 기록물을 읽으며 휴식을 취했다. 대구에서도 운전을 너무 오래 했고, 제주도에서도 벌써 두 시간 가까이 운전을 했다. 그것도 경차로.  피로가 꽤 쌓여있었다. 사실 피로가 그 뿐만은 아니었다. 토요일에 상상텃밭 황재민 형님의 결혼식 축가가 있어서 그 전 며칠간 연습하느라 잠을 잘 못 잤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전 교인 체육행사가 있어서 또 잠도 못 잔 채로 운동을 했다. 사진에서 표정은 웃고 있지만 전신 근육통에 결린 목으로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다.


  하지만 여행지의 들뜬 기분은 이런 피로를 씻어내기에 충분하다. 너무 설레서 운전 내내 볼빨간 사춘기의 '여행'과 레드벨벳의 'Power UP'을 흥얼거렸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빌린건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 캐리어와 화구통, 게다가 묵직한 선물까지 몽땅 뒷석에 실어 두고 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아까 전에 봐 두었던 불빛정원을 네비에 찍고 또 신나게 달렸다.


  불빛정원의 입장료는 만 이천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주 예쁜 야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불빛을 굉장히 좋아했다. 구식 기름 램프나 양초 하나만 켜 두면 불이 완전히 꺼질때까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불빛만 쳐다보고 있을 수도 있다.


필자의 자취방의 일부

  오죽하면 필자의 자취방에도 온갖 LED 조명이 가득하다. 상상텃밭에서 스마트팜을 하면서 LED 지식만 잔뜩 늘어서, SMPS나 PCB LED 따위를 사 와서 잔뜩 꾸며놨다. 이사 첫 날 한 게 조명 꾸미는거였다. 방 자랑은 나중에 다시 해 보도록 하겠다. 여튼 어둠 속에서 빛나는 형형색색의 조그만한 전구들을 생각하며 설레는 표정으로 매표소로 향했다.


  "혼자 오셨어요?"


  이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티켓을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정원을 즐기는 방법을 안내해 주는 직원이 계셨다. 주의사항이나 역광이 안 번지게 사진 찍는 요령을 안내받는데 직원분께서 또 물어보신다.


  "그런데 혼자 오셨어요? 여기를요?"


  왜지? 혼자 오면 안 되나? 그런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혼자 온 사람은 필자 뿐이었다

  아. 잘못 들어왔구나. 이 곳은 커플을 위한 곳이라는 사실을 들어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래도 기분 좋았다. 형형색색의 불빛들을 볼 수 있어서. 혼자 열심히 셀카를 찍고 돌아다녔다.


입장 직후에 신난 모습

  필자가 좋아하는 파란색과 보라색 조명으로만 꾸며진 공간도 있었다. 너무 신나서 혼자 쪼르르 뛰어가서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더니 직원 한 분이 다가오셨다.


  "여기를 혼자 오셨어요? 세상에. 이리 와 보세요. 폭죽 무료로 드릴게요."

  "아니 굳이 안 주셔도 되는데."

  "받으세요. 자, 두 개."

  "아니 왜 하필 두 개 주시는거에요 하나만 주세요."

  "받으세요."


폭죽 두 개를 한 손에 쥐었다. 극도로 신난 표정을 보라.

  하. 착잡하다. 갑자기 커플명소에 혼자 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직원들이 필자를 배려해 주는 이유를 깨달았다. 아니야 괜찮으니까 배려해 주지 마요 배려가 더 아파 아냐 필요 없어 제발.


  "여기를 혼자 오셨어요? 불꽃놀이 체험도 공짜로 한 번 해 드릴게요. 원래 만원이에요."

  "아니에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얼른 이리 와요. 원래 남자가 위에 잡고 여자가 여기 얇은 곳 잡으면 되는데."

  "저 안 할래요."

  "자 불 붙였어요 이리 와요."


너무 신나서 다소곳해졌다. 하.

  그렇게 불꽃놀이가 발사되는 요상하게 생긴 막대기를 혼자서 들고 5분 동안 서 있어야 했다. 이렇게 요란한 것을 혼자 들고 있으니 당연히 관광객들이 몰렸고 어느새 필자를 둘러쌌다.


  "와 오빠 저거 재밌겠다 우리도 하자."

  "근데 저 분 혼자 오셨나봐?"

  "쉿, 들리겠다."

  

  네, 다 들었습니다.


  그래도 입장료는 냈으니 혼자서 꿋꿋이 둘러보고 다녔다. 퇴장 직전에 여기서 찍은 사진 한 장을 인화해 주는 서비스가 있다. 줄이 꽤 길었다.


  "세상에, 혼자 오셨다구요? 여기를요? 남자 혼자서? 사진 두 장 인쇄해 드릴게요. 골라보세요."


  직원분의 과도한 친절이 아팠다. 흑흑.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는 덤.


좋은 추억을 남겼다

  여행으로 들뜬 텐션이 가라앉으면서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대여시간이 두 시간이나 남았지만 그냥 쏘카를 일찍 반납하고 숙소로 가기로 했다.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님께 여쭤봤다.


  "기사님, 제주도에서는 뭘 먹으면 좋을까요?"

  "돼지고기나 회가 유명하죠. 지금 가시는 곳에 동문시장이라는 곳이 있어요. 거기 둘러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관광지는 어디가 유명한가요?"

  "안 알아보고 오셨어요?"

  "네."

  "허허."


  그렇게 관광지 몇 곳까지 안내를 받았다.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온 관광객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현지 택시기사님께 여쭤보는게 아닐까?


  숙소에 가방을 내려놓고 동문시장을 어슬렁거렸다.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떨이빔을 맞아버렸다.


  "몇 명이서 먹어요?"

  "저 혼자요."

  "제주도를 혼자서 왔어요?"


아 살찌는데

  방어회와 갈치회를 합쳐서 만 원에 주시겠단다. 하, 참. 제주도 사람들. 다이어트 해야 하는데. 다이어트를 방해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성의를 봐서 안 먹을 수가 없잖은가?


  그래서 전혀 예정에 없던 야식까지 배부르게 먹었다.


  첫 날 이 정도 놀았으면 관광은 충분히 했지 뭐. 이제 학회에서는 열심히 구경 다니고, 밤에는 글도 쓰는 알찬 휴가를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은 불과 열두시간만에 박살나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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