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11/20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그 무렵에,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땅 위에는 네피림 이라고 하는 거인족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창세기 6:1-4 RNKSV
6장 전반부에서 네피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는 6장의 전개를 해칩니다.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그러나 노아 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창세기 6:7-8 RNKSV
6장은 인간의 죄악과 이로 인한 홍수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갑작스럽게 네피림이 등장하는 것은 전개구조가 깨어지는 것이죠. 편집을 통해 삽입된 것은 확실한데 의도를 파악하기 힘듭니다.
차라리 5장에 있었다면 아담의 계보에 이어서 아담의 후손들이 천사들과의 동침으로 인하여 네피림이라는 종족이 생겼다는 뜻으로 깔끔하게 전달되어 6장에서의 홍수이야기가 더 부각되었을텐데요. 왜일까요.
제 해석은 이렇습니다.
인간과 천사의 혼혈인 네피림은 강한 전사로 이름을 날린 거인족입니다. 편집자는 인간보다 네피림이 우월한 존재라 묘사하러 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보다 천사가 우월하다는 전제도 깔려 있고요.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오로지 노아의 가족들만 빗겨갑니다. 멸망의 대상에 네피림들도 모두 포함됩니다.
천사의 혼혈인 네피림마저도 정결치 못하고 악행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거든요. 이는 창세기를 저처럼 지나치게 꼼꼼하게 읽을 독자들에게는 일종의 기대감을 품게 하는 장치로써 작동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의 내러티브에서 이어지는데요,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이어진 원죄는 천사의 피가 섞이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순수한 인간의 혈통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일종의 신앙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로써 6장 초반이 기능했을 것 같고, 또 어찌보면 원죄가 얼마나 강력한지 부각하는 장치도 된 것 같고요.
결국 네피림 내러티브는 예수 초림과 죽음에 대한 당위성을 예견하는 것까지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당시 편집 당시에는 원죄를 부각하기 위함이었겠으나 신약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까지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어서 6장에서는 홍수 이전에 노아에게 미리 경고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항상 구원과 함께합니다. 인류는 절멸할 예정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종족이 끊어지지 않을 기회를 남겨주십니다.
노아 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 꼭 그대로 하였다.
창세기 6:22 RNKSV
노아는 흠이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으므로(9절),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를 그대로 꼭 지킵니다. 이는 네피림을 비롯해 세상의 썩은 육신들과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장치가 됩니다.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썩어 있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 하나님이 노아 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창세기 6:12-13 RNKSV
이렇게 홍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1/21
주님께서 노아 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니,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라고는 너밖에 없구나. 너는 식구들을 다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거라. 모든 정결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그리고 부정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두 쌍씩, 네가 데리고 가거라. 그러나 공중의 새는 수컷과 암컷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 남게 하여라. 이제 이레가 지나면, 내가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려서, 내가 만든 생물을 땅 위에서 모두 없애 버릴 것이다.” 노아 는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
창세기 7:1-5 RNKSV
40일간의 홍수가 시작됩니다. 성경에는 40이라는 숫자가 참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동양권에서 10이나 100을 추상적인 엄청난 큰 숫자로 받아들이듯 유대인 문화권에서도 40이라는 숫자에 어떤 관념적인 의미가 있지는 않았을까요.
노아 가 육백 살 되는 해의 둘째 달, 그 달 열이렛날, 바로 그 날에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로 쏟아졌다.
창세기 7:11-12 RNKSV
비가 하늘에서만 쏟아진것이 아니로군요.
그런데 중목된 서술이 반복됩니다. 편집의 흔적이겠죠? 한글본으로 봐서는 별다른 출처구분은 힘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을 없애 버리셨다. 사람을 비롯하여 짐승까지, 길짐승과 공중의 새에 이르기까지, 땅 위에서 모두 없애 버리셨다. 다만 노아 와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과 짐승들만이 살아 남았다. 물이 불어나서, 백오십 일 동안이나 땅을 뒤덮었다.
창세기 7:23-24 RNKSV
물이 빠지는데는 150일이 추가로 필요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노아 와 방주에 함께 있는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을 돌아보실 생각을 하시고, 땅 위에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땅 속의 깊은 샘들과 하늘의 홍수 문들이 닫히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그쳤다. 땅에서 물이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서, 백오십 일이 지나니, 물이 많이 빠졌다.
창세기 8:1-3 RNKSV
홍수가 멎어들고 물이 빠집니다.
사십 일이 지나서, 노아 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서, 까마귀 한 마리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 까마귀는 땅에서 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기만 하였다. 그는 또 비둘기 한 마리를 내보내서, 땅에서 물이 얼마나 빠졌는지를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땅이 아직 모두 물 속에 잠겨 있으므로, 그 비둘기는 발을 붙이고 쉴 만한 곳을 찾지 못하여, 그냥 방주로 돌아와서, 노아 에게 왔다. 노아 는 손을 내밀어 그 비둘기를 받아서, 자기가 있는 방주 안으로 끌어들였다.
창세기 8:6-9 RNKSV
까마귀와 비둘기에도 어떤 은유가 담겨 있을텐데.. 뭘까요.
그 비둘기는 저녁때가 되어서 그에게로 되돌아왔는데, 비둘기가 금방 딴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으므로, 노아 는 땅 위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았다. 노아 는 다시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비둘기가 그에게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창세기 8:11-12 RNKSV
비둘기가 귀소본능도 있는 똑똑한 조류기는 하죠. 그래서 이런 내용이 생겼나봅니다. 아닌데, 지능은 까마귀가 더 높은데. 정말 뭔가 은유가 담겨있는 것 같기는 한데 해석이 안 되니 답답합니다.
노아 는 주님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주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창세기 8:20-22 RNKSV
하나님께서 땅을 축복하시며 다시는 물로써 생명을 멸하지 않으리라 선언하십니다.
이로써 홍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비둘기와 까마귀 은유를 해석하고 싶은데 워낙 제가 가진 정보가 적으니 답답합니다.
여튼, 홍수 사건은 선악과에서 이어진 원죄의 내러티브가 절정을 맞이하는 구간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행위는 점점 더 겉잡을 수 없는 책임으로 부풀어나 창조주께서 직접 인류절멸을 고려할 정도로 심각해집니다.
그런데 네피림은 방주에 안 탔나요? 일단은 인간이라고 보아 안 태운 것인가. 하긴 짐승이라 보기는 힘들기는 하겠습니다.
원죄의 내러티브는 신약에서 박살나고, 인과응보의 신앙론은 욥기에서 박살납니다. 홍수 사건은 훗날 신약을 읽을 때 배경으로써 역할을 부여하고, 더이상 해석하지 않겠습니다.
11/21
하나님이 노아 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에 사는 모든 짐승과, 공중에 나는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에 사는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다 너희 손에 맡긴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채소를 너희에게 먹거리로 준 것 같이, 내가 이것들도 다 너희에게 준다.
창세기 9:1-3 RNKSV
창세기 2장과 같습니다. 인간에게 만물을 지배할 권능을 직접적으로 인정하십니다. 2장에서는 아담이 세상의 생명체에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에서 인간의 위계성이 은유적으로 드러났고, 9장에서는 아예 직접적으로 선언합니다.
포로기 후기 지탱할 곳을 잃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필요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게는 창세기의 창조-타락-홍수 내러티브가 애가(sad song)로 읽힙니다.
창세기 1~9장은 국가의 멸망과 포로생활을 겪은 백성들의 절규와도 같이 제게 다가옵니다. 의지할 곳을 잃은 비통함을 달랠 곳이 없어 이들은 에스라에게 부르짖습니다. "율법을 가져다 주세요!"
모든 백성이 한꺼번에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학자 에스라 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 에게 명하신 모세 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라고 청하였다.
느헤미야기 8:1 RNKSV
급조된 성전, 덜 세워진 성벽, 하나님과 함께하면 무적일 줄 알았으나 바빌론의 손에 의해 찢어진 유다왕국.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이들은 에스라에게 청합니다.
의지할 곳을 달라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권능이 아직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알게 해 달라고요.
침묵기 기간에 타나크 대부분이 완성되었고, 코흘렛이 등장하고. 다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여하튼 창세기로 돌아와, 창조의 내러티브에서 편집자들은 인간의 존귀함을 강조합니다.
선악과와 원죄의 내러티브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동시에 예배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장치가 됩니다.
홍수의 내러티브는 하나님의 절대자로써의 권능과 사랑, 동시에 네피림보다도 정결한 인간을 귀하게 택하여 살아남게 하시는 모습에서 또다시 인간의 존귀함이 부각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에서 가장 정결한 사람인, 유일한 생존자 노아의 후손이라는 뜻이 되죠.
이후에는 맨 처음 소개한 말씀에서 아예 인간이 만물 중 으뜸임을 못 박습니다.
이리도 따뜻한 위로가 토라의 맨 앞에 배치된 이유는 그만큼 치유가 필요한 상처가 깊었다는 뜻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창세기 전반부가 애가처럼 읽힙니다.
창조부터 홍수까지의 이야기는 보편적이고, 시대와 상황을 초월한 위로의 내러티브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낍니다. 따뜻합니다. 큰 위로와 축복을 받은 기분입니다.
11/22
한 번은 노아 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가나안 의 조상 함 이 그만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가서, 두 형들에게 알렸다. 셈 과 야벳 은 겉옷을 가지고 가서, 둘이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다. 그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노아 는 술에서 깨어난 뒤에,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 가나안 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 저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다.”
창세기 9:21-25 RNKSV
노아의 술주정으로 함이 저주를 받습니다. 엄청 억울할 것 같은데요? 뭐 장막 문은 알고 열었나...
홍수로 지상이 쓸려나갔지만 죄악은 씻겨나가지 않습니다. 원죄는 그대로 물이 빠져나간 땅에 남아 새로운 씨앗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10장에서는 또다시 족보가 나옵니다.
창조 -> 아담의 계보
홍수 -> 노아의 계보
구조적으로 동치이죠.
노아의 후손 중 이런 서술이 달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스 는 또 니므롯 을 낳았다. 니므롯 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이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니므롯 과 같은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창세기 10:8-9 RNKSV
토라 편집당시 JEPD 4문서 외에 속담까지 인용한 흔적입니다. 그런데 4문서 외의 다른문서 인용은 생각보다 성경에서 흔합니다. 여호수아 묵상때 "야살의 서" 가 등장한게 기억납니다.
여튼 역사비평적으로 재미있는 떡밥으로 보입니다만 사료에 접근할 수 없으므로 넘어갑니다.
이들이 각 종족의 족보를 따라 갈라져 나간 노아 의 자손 종족이다. 홍수가 난 뒤에, 이 사람들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와서,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창세기 10:32 RNKSV
홍수가 이로써 완전히 막을 내립니다.
악을 절멸시킨다는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아이러니하게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요.
따라서 예수 초림이라는 상황이 당위성을 또 가지는군요.
11/22 저녁묵상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창세기 11:1 RNKSV
바벨탑 내러티브의 시작입니다. 아담이 기준이 되건, 노아가 기준이 되건 언어가 하나에서 출발하였다는 이야기는 말이 됩니다.
언어학에서는 언어의 계보를 연구하는 homology라는 학문이 있는데.. 음.. TMI 자제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창세기 11:6-7 RNKSV
또다시 복수형 명사로 하나님을 지칭한 부분이 나옵니다. RNKSV기준으로 창세기에서 두번째로 등장합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엘로임계 문서 출신이겠군요.
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 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창세기 11:8-9 RNKSV
바빌론의 이름의 유래가 등장하며 바벨탑 내러티브가 끝납니다. 이는 창조와 노아의 홍수 내러티브에 당위성을 더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한 뿌리에서 출발하였다면 왜 문화권마다 언어가 다른가요?" 라는 의문에 에 대한, 과학적 연구기법이 없던 시절의 해소방법이죠. Homology가 있었다면 언어의 뿌리까지 파헤쳐 한 개의 언어에서 출발했음을 증명했겠지만 그 당시엔 이런 기법이 없었습니다. 현대에는 기법은 있지만 사료가 없고요.
엘로임계 전승의 이 짧은 일화가 굳이 노아의 홍수 직후에 삽입된 이유는 이로써 명백합니다.
이후 셈과 데라의 계보가 소개되며 창세기 11장이 마무리됩니다. 독자는 셈과 데라의 후손의 이야기가 등장할 것임을 기대하게 되겠죠.
11장 마지막에서 데라는 아브람을 낳고, 페르시아 만의 우르에서 출발해 하란에 도달합니다.
구약의 파노라마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