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서사
12/6 저녁묵상
하나님이 야곱 에게 말씀하셨다.
“어서 베델 로 올라가, 거기에서 살아라. 네가 너의 형 에서 앞에서 피해 도망칠 때에, 너에게 나타난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쳐라.”
야곱 은, 자기의 가족과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였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이방 신상들을 다 버려라.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이제 우리는 이 곳을 떠나서, 베델 로 올라간다. 거기에다 나는, 내가 고생할 때에 나의 간구를 들어 주시고, 내가 가는 길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다니면서 보살펴 주신,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치고자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귀에 걸고 있는 귀고리를 야곱 에게 가져 왔다. 야곱 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밑에 묻었다.
창세기 35:1-4 RNKSV
야곱 휘하 사람들의 우상숭배 정황이 드러납니다. 야곱은 이를 모두 정리해 땅에 묻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단을 쌓고 복을 받습니다.
다른 신들을 정리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율법적인 구속과, 동시에 하나님을 통하여 복을 받는 광경이 등장합니다.
야곱 이 라헬 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묘비가 라헬 의 무덤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35:20 RNKSV
베냐민을 낳다가 라헬이 죽습니다. 여기에 창세기가 후대에 편집된 흔적도 대놓고 드러나있습니다.
이스라엘 이 다시 길을 떠나서, 에델 망대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장막을 쳤다. 이스라엘 이 바로 그 지역에서 머물 때에, 르우벤 이 아버지의 첩 빌하 를 범하였는데, 이스라엘 에게 이 소식이 들어갔다. 야곱 의 아들은 열둘이다.
창세기 35:21-22 RNKSV
통일성이 사라진 절이 두 절 삽입됩니다. 여기에서는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이 축복하신 대로 이스라엘이라 기록합니다. 바로 앞 절에서는 그를 그대로 야곱이라 칭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사건이 없습니다. 무언가 삽입되었다가 잘려나간 흔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막내 베냐민. 익숙한 스토리가 시작되려 합니다.
야곱 은 자기 아버지가 몸붙여 살던 땅 곧 가나안 땅에서 살았다. 야곱 의 역사는 이러하다. 열일곱 살 된 소년 요셉 이 아버지의 첩들인 빌하 와 실바 가 낳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는데, 요셉 은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이스라엘 은 늘그막에 요셉 을 얻었으므로,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 을 더 사랑하여서, 그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서 입혔다.
창세기 37:1-3 RNKSV
37장에서도 이스라엘과 야곱이라는 칭호가 병기됩니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 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다.”
창세기 32:28 RNKSV
28장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뒤로는 이런 표기가 없었거든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내용이 후대에 재편집되어 삽입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포로기 후기 백성에겐 큰 위로가 되었겠죠.
여하튼, 고운 색동옷을 입은 요셉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요셉 이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꾼 꿈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셔요. 우리가 밭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내가 묶은 단이 우뚝 일어서고, 형들의 단이 나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였어요.”
형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우리의 왕이라도 될 성싶으냐? 정말로 네가 우리를 다스릴 참이냐?”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더 미워하였다. 얼마 뒤에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들어 보셔요. 또 꿈을 꾸었어요. 이번에는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
그가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할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었다.
“네가 꾼 그 꿈이 무엇이냐? 그래, 나하고 너의 어머니하고 너의 형들이 함께 너에게로 가서, 땅에 엎드려서, 너에게 절을 할 것이란 말이냐?”
그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
창세기 37:6-11 RNKSV
요셉이 꿈을 꿉니다. 형들이 먼저 요셉을 경배하고, 이어 모든 가족이 요셉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내용입니다.
형들의 첫 방문과 가족의 이주에 대한 예언이죠.
그래서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갈 때에, 형제들이 요셉 을 구덩이에서 꺼내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스무 냥에 팔았다. 그들은 그를 이집트 로 데리고 갔다.
창세기 37:28 RNKSV
요셉이 팔려나갑니다.
르우벤 이 구덩이로 돌아와 보니, 요셉 이 거기에 없었다. 그는 슬픈 나머지 옷을 찢고서, 형제들에게 돌아와서 말하였다.
“그 아이가 없어졌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그들은 숫염소 한 마리를 죽이고, 요셉 의 옷을 가지고 가서, 거기에 피를 묻혔다. 그들은 피묻은 그 화려한 옷을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말하였다.
“우리가 이 옷을 주웠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그 옷을 알아보고서 부르짖었다.
“내 아들의 옷이다! 사나운 들짐승이 그 아이를 잡아 먹었구나. 요셉 은 찢겨서 죽은 것이 틀림없다.”
야곱 은 슬픈 나머지 옷을 찢고, 베옷을 걸치고, 아들을 생각하면서, 여러 날을 울었다.
창세기 37:29-34 RNKSV
르우벤은 그나마 양심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그조다 덜하지만 조금 양심이 있었고요.
또다시 선악과로 인한 원죄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창세기는 따뜻한 위로의 글이지만 동시에 타락의 역사입니다. 역시 창세기의 등장인물은 다들 어딘가 뒤틀려 있습니다.
동생을 죽이려고 공모하고, 구덩이에 던지고, 팔아 넘기는 끔찍한 죄악의 현장이 벌어집니다. 성경의 제일 첫 장에서부터 그리스도가 오셔야 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셨기에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는 죄인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창세기의 인물이 할례를 받았다고 죄를 안 짓게 되는게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뾰로롱 한순간에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인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이를 명심하고, 항상 회개하며 선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미디안 사람들은 이집트 에서 요셉 을 보디발 이라는 사람에게 팔았다. 그는 바로 의 신하로서, 경호대장으로 있는 사람이었다.
창세기 37:36 RNKSV
요셉은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갑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조차 뿌리쳤죠. 과연 요셉은 기록이 끝나는 시점까지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인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12/8
유다 가 오난 에게 말하였다.
“너는 형수와 결혼해서, 시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해라. 너는 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
그러나 오난 은 아들을 낳아도 그가 자기 아들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형수와 동침할 때마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정액을 땅바닥에 쏟아 버리곤 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난 도 죽게 하셨다.
창세기 38:8-10 RNKSV
현대의 정조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형수와 동침하여 대를 이으라니,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위반이 아닌가요? 야곱의 아내들이 야곱을 몸종과 동침하도록 한 것도 그렇고. 유대인의 관점은 현대인의 관점과 매우 다른가봅니다.
여튼, 가톨릭에서 피임을 금기시하는 이유가 이 말씀에 근거를 둔게 아닐까 생각되네요.
길을 가던 유다 가 그를 보았지만,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유다 는 그가 창녀인 줄 알았다. 그래서 유다 는 그가 자기 며느리인 줄도 모르고, 길가에 서 있는 그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너에게 잠시 들렀다 가마. 자, 들어가자.”
그 때에 그가 물었다.
“저에게 들어오시는 값으로, 저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창세기 38:15-16 RNKSV
유다.. 음..
유다 가 물었다.
“내가 너에게 어떤 담보물을 주랴?”
그가 대답하였다.
“가지고 계신 도장과 허리끈과 가지고 다니시는 지팡이면 됩니다.”
그래서 유다 는 그것들을 그에게 맡기고서 그에게 들어갔는데, 다말 이 유다 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창세기 38:18 RNKSV
다말이 시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음..
유다는 또 다말이 창녀인 줄 알고 매춘을 하죠. 잠언에서는 이걸 분명히 악으로 규정했었는데. 역시 창세기의 인물입니다. 죄 짓지 않는 인물이 없어요.
이번 장에서는 성과 관련된 죄악에 대한 경계를 받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선악과의 유혹은 일시적이었고, 선악과를 씹어 삼키는 과정 또한 일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파급력은 창조의 그날로부터 심판의 때까지 이어집니다. 인류가 등장하여 일몰하는 그 순간까지 쇠락하지 않고 세를 부풀려 나갑니다.
덕분에 창세기 인물들로부터는 의로운 면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존재가 하는 행동은 사탄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이게 창세기를 읽는 내내 가슴아팠던 부분입니다. 의롭고 정하게 창조된 인간이, 타락하여 온갖 죄악에 물들어 있잖아요. 안타깝고 슬픕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물로써 인간을 쓸어버렸지만 죄악의 종류와 깊이가 더 다양해질 뿐이었습니다. 노아까지도 멸하고 새로이 창조하셨어야 되는게 아닐까요.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는 타락과 원죄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심으로써 우리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워 졌습니다. 죄인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나 의인의 옷을 입고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창세기는 예수님의 등장을 예언하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초림하셔야 하는 당위성을 절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없이는 결코 정결할 수 없습니다.
이신칭의 라고 하던가요. 긴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12/9
주인은, 요셉 이 눈에 들어서, 그를 심복으로 삼고, 집안 일과 재산을 모두 요셉 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였다. 그가 요셉 에게 자기의 집안 일과 그 모든 재산을 맡겨서 관리하게 한 그 때부터, 주님께서 요셉 을 보시고,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이, 주인의 집 안에 있는 것이든지, 밭에 있는 것이든지, 그 주인이 가진 모든 것에 미쳤다. 그래서 그 주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요셉 에게 맡겨서 관리하게 하고, 자기의 먹거리를 빼고는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요셉 은 용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미남이었다.
창세기 39:4-6 RNKSV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내린 축복을 알아보고 보디발이 요셉을 아낍니다. 보디발의 집안은 요셉으로 인해 복을 받고, 요셉은 노예이나 먹거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게 됩니다.
가장 불합리한 지위에서 가장 큰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집시보다도 자유로워 보입니다.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도 자유할 수 있다면 그게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요.
요셉 의 주인은 요셉 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다. 그 곳은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곳이었다. 요셉 이 감옥에 갇혔으나,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 주시고, 그를 한결같이 사랑하셔서,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하셨다. 간수장은 감옥 안에 있는 죄수를 모두 요셉 에게 맡기고, 감옥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을 요셉 이 혼자 처리하게 하였다. 간수장은 요셉 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요셉 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요셉 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 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39:20-23 RNKSV
보디발의 아내의 간청을 거절하여 왕의 감옥에 수감되어서도 요셉은 자유를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부자연스러운 환경에서도 자유를 허락하십니다. 제 이야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생각이 많아집니다.
오늘은 감사기도를 조금 더 오래 드려야겠습니다.
바로 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시종장은 직책이 회복되어서, 잔에 술을 따라서 바로 의 손에 올리게 되고, 빵을 구워 바치는 시종장은 매달려서 처형되니, 요셉 이 그들에게 해몽하여 준 대로 되었다. 그러나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은 요셉 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는 요셉 을 잊고 있었다.
창세기 40:21-23 RNKSV
하나님의 빅 픽쳐가 시작됩니다. 시종장의 꿈을 해몽하고 바로 복직되어 봐야 다시 보디발의 종으로 돌아갔을 것이며, 보디발 아내의 유혹과 보디발의 불신을 받으며 견뎌야 했겠죠. 파라오를 접견할 기회 따위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더욱 크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기다림을 허락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서, 바로 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 을 불러오게 하였고, 사람들은 곧바로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냈다. 요셉 이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니, 바로 가 요셉 에게 말하였다.
“내가 꿈을 하나 꾸었는데, 그것을 해몽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나는 네가 꿈 이야기를 들으면 잘 푼다고 들었다. 그래서 너를 불렀다.”
요셉 이 바로 에게 대답하였다.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주실 것입니다.”
창세기 41:14-16 RNKSV
마침내 요셉이 파라오를 접견합니다.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요셉이 통치자 앞에 나아가 꿈을 해몽합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왜이렇게 제 공익생활과 겹쳐 보일까요.
바로 가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을, 이 사람 말고,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느냐?”
바로 가 요셉 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이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리셨는데, 너처럼 명철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어디에 또 있겠느냐? 네가 나의 집을 다스리는 책임자가 되어라. 나의 모든 백성은 너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내가 너보다 높다는 것은,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뿐이다.”
바로 가 또 요셉 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를 온 이집트 땅의 총리로 세운다.”
창세기 41:38-41 RNKSV
보디발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재현됩니다. 파라오는 요셉이 아니라 요셉의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요셉을 등용합니다.
명심해야 할 구절입니다.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며, 내 성취는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요셉 은
“하나님이 나의 온갖 고난과 아버지 집 생각을 다 잊어버리게 하셨다”
하면서, 맏아들의 이름을 므낫세 라고 지었다. 둘째는
“내가 고생하던 이 땅에서, 하나님이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셨다”
하면서, 그 이름을 에브라임 이라고 지었다.
창세기 41:51-52 RNKSV
요셉은 타향살이의 고통을 자식을 보며 이겨냈나봅니다.
재미있는 부분을 또 발견했습니다.
야곱 이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이집트 에 곡식이 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그리로 가서, 곡식을 좀 사오너라. 그래야 먹고 살지, 가만히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
창세기 42:2 RNKSV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으므로, 이스라엘 의 아들들도 곡식을 사러 가는 사람들 틈에 끼었다.
창세기 42:5 RNKSV
1. 야곱을 지칭하는 두 이름이 상이합니다.
2. 화자의 시점이 전지적 시점에서 3인칭 관찰자로 옮겨갑니다.
3. 이미 앞 장에서 기근이 찾아왔다는 정황을 설명했는데 굳이 다시 기근을 언급합니다.
5절은 전승 과정 내지는 편집에 의해 삽입된 구절로 보입니다. 워낙 창세기 내용이 길다 보니 한 번에 읽으려 들면 중간에 길을 잃을 수도 있긴 하겠죠. 주의를 환기시키는 용도로 효용성이 있는 문장입니다.
그 때에 요셉 은 나라의 총리가 되어서, 세상의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요셉 의 형들은 거기에 이르러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요셉 에게 절을 하였다.
창세기 42:6 RNKSV
이 또한 앞 장에서 이미 설명된 상황을 재차 설명중입니다. 이 절은 요셉이 팔려나가기 전 꾼 꿈과 구조적으로 대응하고 있죠. 해몽과 관련된 은사를 부각하기 위하여 요셉 본인도 꿈을 꾸는 에피소드를 삽입해 신비함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맥거핀을 훌륭하게 해소하기 위해 함께 삽입된 절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어 번역본에서도 흐름이 깨지는 구간이 드러나는데, 코이네그리스어로 된 칠십인역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재미가 있을까요. JEPD 4문서로 구분짓고자 한 신학자들의 충동을 십분 이해합니다.
요셉 은 사람들을 시켜서, 그들이 가지고 온 통에다가 곡식을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이 낸 돈은 그 사람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에서 먹을 것은 따로 주게 하였다. 요셉 이 시킨 대로 다 되었다.
창세기 42:25 RNKSV
요셉은 형들에게 곡식 값을 받지 않습니다. 요셉의 호의가 형들에게는 시험으로 다가옵니다. 그들은 이를 몹시나 두려워합니다. 야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염탐꾼으로 몰려 시므온이 잡혀 있는 상황에서 돈자루까지 발견되니, 이제 다시 에굽을 방문하면 염탐꾼 혐의에 점유이탈물 횡령까지 추가되어 큰 죄를 물게 생겼습니다.
야곱은 이런 상황에서 베냐민을 에굽에 보내는 것을 탐탁치 않아 합니다. 하지만 기근은 지속됩니다.
그들이 이집트 에서 가지고 온 곡식이 다 떨어졌을 때에,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다시 가서, 먹거리를 조금 더 사오너라.”
창세기 43:2 RNKSV
야곱은 살을 찢는듯한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아껴서 색동옷을 혼자 입혀 길렀던 요셉을 잃어버렸는데 베냐민까지 잃을 수는 없었겠죠.
하지만 모두가 굶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 이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이렇게 하도록 하여라. 이 땅에서 나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토산물을 너희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가서, 그 사람에게 선물로 드리도록 하여라. 유향과 꿀을 얼마쯤 담고,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를 담아라. 돈도 두 배를 가지고 가거라. 너희 자루 아귀에 담겨 돌아온 돈은 되돌려 주어야 한다. 아마도 그것은 실수였을 것이다. 너희 아우를 데리고, 어서 그 사람에게로 가거라. 너희들이 그 사람 앞에 설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주시기를 빌 뿐이다.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 도 너희와 함께 돌려 보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는 것이지,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
창세기 43:11-14 RNKSV
확실히 야곱은 처세에 능합니다. 에서의 화를 풀었던 방법을 그대로 총리에게 사용합니다.
요셉 이 집으로 오니, 그들은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선물을 요셉 앞에 내놓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창세기 43:26 RNKSV
요셉의 꿈이 또다시 실현됩니다.
관리인이 맏아들의 자루부터 시작하여 막내 아들의 자루까지 뒤지니, 그 잔이 베냐민 의 자루에서 나왔다. 이것을 보자, 그들은 슬픔이 북받쳐서 옷을 찢고 울면서, 저마다 나귀에 짐을 다시 싣고, 성으로 되돌아갔다.
창세기 44:12-13 RNKSV
베냐민이 죽게 생겼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는 부분이죠.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 아이 없이, 제가 어떻게 아버지의 얼굴을 뵙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제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44:33-34 RNKSV
유다가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변모하였음을 볼 수 있었겠지요.
감동에 찬물을 좀 끼얹어야겠습니다.
어찌하려고 은잔을 훔쳐 가느냐? 그것은 우리 주인께서 마실 때에 쓰는 잔이요, 점을 치실 때에 쓰는 잔인 줄 몰랐느냐? 너희가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매우 고약하구나!’ 하고 호통을 치시오.”
창세기 44:5 RNKSV
요셉 이 호통을 쳤다. “당신들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소?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쳐서 물건을 찾는 줄을, 당신들은 몰랐소?”
창세기 44:15 RNKSV
아직 모세의 율법이 정립되기 전이며 레위기 편찬 전이다 보니 레위기와 충돌하는 부분이 보입니다. 점을 치는 행위는 레위기에서 돌로 쳐 죽여야 할 대상으로 규정합니다.
아직 유대교가 이집트 신앙과 분리되기 전의 과도기적인 모습도 레위기에서 등장합니다. 인신공양에 대한 규례라거나. 요셉 역시 당시에 완전히 분리된 유대교가 아니라 이집트의 신앙과 섞인 형태의 신앙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창세기 45:7 RNKSV
요셉이 정체를 밝힙니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나온 까닭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보전하기 위함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 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 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 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
창세기 46:3-4 RNKSV
출에굽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요셉 이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제, 내가 당신들의 몸과 당신들의 밭을 사서, 바로 께 바쳤소. 여기에 씨앗이 있소. 당신들은 이것을 밭에 뿌리시오.
창세기 47:23 RNKSV
여기서도 요셉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야곱의 자손 답습니다. 차례대로 시장에서 화폐와 가축, 부동산을 고갈시킵니다. 비로소 백성들이 가진 것이 노동력밖에 남지 않았을 때 이를 활용하여 대대적인 농경을 시작합니다.
파라오 눈에는 요셉이 정말 예뻐 보일 수 밖에 없겠네요.
그런데 이스라엘 은, 에브라임 이 작은 아들인데도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 의 머리 위에 얹고, 므낫세 는 맏아들인데도 그의 왼손을 므낫세 의 머리 위에 얹었다. 야곱 이 그의 팔을 엇갈리게 내민 것이다.
창세기 48:14 RNKSV
야곱이 죽기 전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데, 장자가 아닌 둘째에게 더 큰 축복을 내립니다. 본인도 둘째임에도 이삭의 축복을 독차지했었죠. 요셉의 인간미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의 열두 지파이다.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을 축복할 때에 한 말이다. 그는 아들 하나하나에게 알맞게 축복하였다.
창세기 49:28 RNKSV
야곱은 유언으로 자식들을 축복하고, 자식들의 이름이 곧 열 두 지파가 됩니다.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거쳐 내려온 하나님의 축복이 구체적인 결실을 맺는 순간입니다.
여기서부터 축복과 예언은 역사가 됩니다. 포로기 후기 백성들이 느꼈을 전율이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제3자인 먼 조상님이 받은 축복이 현재까지도 임재함을 깨달았을 때 그 감동은 말로 쉬이 설명하기 힘들 것입니다. 에스라 앞에 선 군중이 소리지르며 우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요셉 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요셉 이 자기들을 미워하여, 그들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셉 에게 전갈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요셉 은 이 말을 전해 듣고서 울었다.
창세기 50:15-17 RNKSV
또다시 눈물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요셉이 형들의 불안에 침묵을 고하고자 애씁니다. 형들은 아직까지도 요셉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업의 무게란 이렇게도 무겁습니다.
번제를 드려도, 회개기도를 드려도 정결함을 입는 것이지 당사자인 피해자가 느낄 감정까지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요셉이 죽으며 창세기가 마무리됩니다.
제 공익생활을 자꾸만 요셉의 생애에 대입시켜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어떻게 사용하시고자 이렇게 날카롭게 벼려진 날을 품게 하셨을까요? 무슨 일이건 하나님께서 뜻대로 저를 휘둘러 주시기를 기도드릴 뿐입니다.
다만 제게 솔로몬의 지혜를 허락하사 하나님의 뜻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여 따를 수 있도록 앞길을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창세기는 가장 따뜻한 위로의 글이자, 가장 애통한 슬픔의 노래입니다.
포로기 후기 백성들이 에스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창세기 말씀을 들으며 느꼈을 위로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광장이 눈물바다가 되었을 것 같아요.
반면 타락에서 이어지는 비통한 죄업의 역사는 너무나도 슬픕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프고 화가 나셨을까요. 비통한 슬픔의 문학입니다.
환희의 눈물이건 애통의 눈물이건 창세기는 결국 눈물이라는 키워드로 이어집니다.
야곱과 에서는 눈물로써 원한을 씻어내리며, 요셉은 통한을 눈물로써 씻어내렸습니다. 견고하게 쌓은 마음의 벽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길 때 비로소 우리는 눈물을 마주하게 되고, 새로움을 입게 됩니다.
창세기를 읽는 내내 제가 가진 선악관과 창세기 등장인물의 행동의 괴리로 인해 혼란스러웠습니다.
제 해석은 이러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은 선악과로부터 기인합니다. 사회적 합의로 인해 현대의 윤리관은 도덕에 호소하기보다는 사회적 효용성을 해치는 행위를 지양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습니다만, 이 또한 그 뿌리는 선악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씹어 삼키는 순간 심어진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대를 이어 내려오며 조금씩 다듬어지고 원숙해진 것입니다. 결국 현대의 선악관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잖아요.
그래서 성경에서 등장하는 죄에 대한 판단 기준은 시대에 따라서, 독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기준에서는 요셉을 제외한 창세기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죄인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죄인을 또 하나님께서는 애지중지하시고 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헤세드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놀라우신 은혜를 곱씹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묵상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