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과 사람들은 필자가 주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이야기입니다. 필자는 어느 모임에 가서도 항상 주변 사람들의 개성 있는 모습을 놓치지 않는 편입니다. 호기심이 많기도 하고, 관찰력이 좋기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제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소중하고 특별해 보이지 뭡니까. 그래서 어딜 가면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역시 이 중에 정상인은 나밖에 없어."
그리고 놀랍게도 어느 모임을 가도 무수한 욕설과 신변에 대한 위협이 답변으로 돌아옵니다. 힝.
이 시리즈도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제게는 참 소중하고 특별한 인연들인데, 이걸 한번 재조명해 보고 싶었습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그 맛집을 주변에 소문내고 싶은 욕구와 비슷하달 까요?
"이렇게 특별한 사람들을 나 혼자서만 알고 있자니 너무 아까워!"
정연욱 님
오늘의 주인공은 빵장수 단팥빵 안동점의 정연욱 님입니다!! 남원식 점장과 각별한 사이라고 하는데요!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너무 궁금합니다!
Q1. 반갑다. 방금 점장 인터뷰하는 걸 봤을 거다. 비슷한 인터뷰를 해 보고 싶은데 괜찮겠나?
좋다. 재미있을 것 같아 보인다. 근데 어떤 이야기를 인터뷰해보려고 그러나?
원식: 저 친구 인생 정말 다이나믹하게 사는 친구다.
Q2. 아, 그런가? 그 이야기를 몇 번 전해 듣기는 한 것 같다. 그러면 그 비범한 커리어의 시작이 언제인가?
음 언제부터 비범했지?
원식: 고등학교 자퇴한 거.
Q3. 와 시작부터 엄청 세다.
아 맞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봤다. 이 정도면 비범한 커리어라고 해도 되겠는가?
Q4. 물론이다. 혹시 고등학교를 자퇴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나쁜 이야기인가?
나쁜 이야기는 아니고.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를 나가는걸 별로 안 좋아했다. 중학교까지는 어떻게 버텼는데 고등학교는 도저히 3년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Q5. 그래서 의무교육기간이 끝나자마자 자퇴한 것인가?
그렇다. 주입식 교육을 받고, 내 삶에 별로 와 닿지 않는 것들까지 공부하는 것이 답답했다. 자퇴를 하고 내가 갈망해 오던 자유를 누려 보고 싶었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면, 나는 에너지가 굉장히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도전에 거리낌이 없는 편이다. 하지만 학생 신분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데 제약이 많이 따랐다.
Q6. 그렇구나. 이해한다.
내 열정에는 이미 불이 붙을 준비가 되었는데 이걸 3년이나 늦추는 게 답답했다.
필자가 먹은 빵값을 계산하는 중
Q7. 그런데 그렇게 자퇴를 결심했을 때, 주변에서 많이 말리지 않았나?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굉장한 반대에 시달렸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퇴는 너의 선택이고, 앞으로의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 큰 갈림길이니까 신중하게 결정해라."라는 것이 학교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안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우리 집안은 조선시대 느낌이 아직 물씬 풍기는 집안인 데다가 종갓집이다. 할아버지도 제일 큰할아버지고 아버지도 제일 큰 아들, 나도 첫째 아들이다 보니 검정고시를 치는 데에 대해서 집안에서 엄청나게 반대를 했다.
Q8. 그랬을 것 같다. 더군다나 안동은 보수적인 지역이 아닌가.
그런데 유치원 시절부터 내가 부모님 말씀을 거스르거나 일탈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 문제는 완고하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부모님 말씀을 얼마나 잘 듣는 아이였냐면,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하시면 그걸 어기고 늦게까지 논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내가 완고하게 주장하는 모습을 부모님께서도 처음 보셨기에 "한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봐라."라며 결국에는 허락해 주셨다.
Q9. 그렇구나. 항상 말을 잘 듣던 아들이 확신을 갖고 밀어붙이니 한 번 져 주신 것인가.
대신 뜻하던 게 잘 안 되면 나중에 18살이건 19살이건 늦은 나이에라도 고등학교를 다시 들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Q10. 부모님 입장에서 사실 그 정도면 타협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물러나 주신 게 아닐까 싶다. 훌륭한 부모님이시다.
다행히 검정고시는 한 번만에 합격을 했다.
Q11. 공부하는 게 힘들지는 않았나?
공부하는 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었다. 공부를 기초부터 다지고 있던 차에 게임에 빠져 버린 것이다. 게임을 열심히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검정고시는 일 년에 두 번 있다. 매년 4월과 8월에 있다. 4월 시험을 앞두고 있다가, 2월 무렵이었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너 공부 잘 안 하고 게임 많이 하는 것 알고 있다. 너 만약에 조카가 와서 삼촌한테 뭐 먹고 싶은 게 있다고 이야기했을 때, 삼촌 된 도리로써 사 줘야 될 상황인데 삼촌이 돈이 없다고 이야기해야 되는 상황이 오면 너는 어떻게 할 거냐?"
할 말이 없었다. 당시 나이 차이가 많은 누나가 있어서 조카가 두 명 있었는데, 아버지 말씀을 듣고 정신이 확 들어버렸다. 아 내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안 되겠구나.
Q12. 아버지가 굉장히 현명하신 것 같다. 매를 드신 것도 아니고, 납득이 갈 만한 비유를 들면서 깨달음을 주시고. 존경스럽다.
한 달 반 정도 남은 시점에서 정신 차리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검정고시를 한 번에 합격할 수 있었다.
Q13. 붙고 나서는 어땠나? 원하던 고졸 학력을 손에 쥐었잖아.
붙고 나서는 이제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하하하.
Q14.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다녔구나. 하하하.
당시 우리 학창 시절에 서든어택이 아주 유행했었다. 근데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 것 치고는 서든어택을 거의 안 해봤었고 이때 서든어택을 열심히 했었다. 내 게임 인생에서 첫 프로게이머 커리어는 서든어택이다.
서든어택 / 넥슨(주) 서비스
Q15. 프로게이머? 진짜인가?
내가 17살에 자퇴를 하고, 18살 4월에 검정고시를 쳐서 합격하고, 그 해에 서든어택을 해서 프로게이머를 했다. 당시 대회에서 예선을 통과하고 방송에 나가면 프로게이머 자격증을 발급해 줬다. 정식 프로게이머 자격은 아니고 준프로게이머 자격증이다.
Q16. 와 대단하다 그때 몇살이었다고? 18살이다.
Q17. 아무튼 검정고시도 바로 붙고, 일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성과를 내서 프로게이머로써 인정도 받고, 역사를 써버린것 아닌가? 대단하다.
대회에는 한 번밖에 안 나가기는 했다. 16강까지 갔다.
Q18. 그런데 아까 '첫 프로게이머' 커리어라고 하지 않았나. 그 뒤에도 몇 번 더 도전을 했다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서든어택 뒷이야기도 궁금하다.
19살 때 이제 친구들이 모두 고3일 때 나는 대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다. 그 당시에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이 출시되어서 거기에 푹 빠져서 시간을 보냈었다. 한국 서버가 나오기 전 북미 서버에서부터 플레이했다.
롤을 한동안 안 했었는데 나중에 한국 서버가 출시되고 주변 친구들도 롤을 많이 하게 되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다시 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전에 북미 서버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 혹시 프로게이머를 해 볼 생각이 없냐고 연락을 줬다.
리그 오브 레전드 / 라이엇 게임즈 서비스
Q19. 아 그런가? 그분은 어떤 분인가?
그분은 알고 보니 프로게이머 지망생들을 발굴하는 데 힘쓰던 코치였다
Q20. 와 대박이다. 게임을 얼마나 잘하길래 프로를 길러내는 사람 눈에 들었나? 될 놈은 된다더니 진짜다. 그래서 그 제안을 수락했는가?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는데 당시 대한민국에서 롤이 흥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리그를 시청하면서 꿈을 키웠고 뒤늦게나마 그 제안을 수락했다. 입단 테스트를 봤는데 다행히 한 번에 합격했다.
Q21. 정말 대단하다. 후보로 들어간 상황인가?
그런 셈이다. 그게 2012년도다.
Q22. 2012년 도면 다른 우리 93년생 또래들은 한창 대학교에 신입생으로 합격해서 엠티 다니고 술 먹고 적응하는 시기가 아닌가. 그 시기에 이미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었다는 게 참 대단한 것 같다. 유명한 힙합 아티스트들이나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람들 중에 자퇴하고 올인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비슷한 케이스였던 것 같다. 혹시 자퇴를 고민 중인 학생들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해 주고 싶은 게 있다면?
자퇴를 고민하고 있다면... 음... 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Q23. 그렇게 자퇴를 열망했던 분께서 자퇴를 하지 말라고 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갈망하던 자유는 찾았는데. 확실히 다른 친구들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잘 지내는 걸 보면 부럽다.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 없다는 게 아무래도 좀 신경 쓰인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힘들더라도 고등학교 3년을 견뎠더라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지금까지도 잘 지낼 수 있지 않았겠나 생각한다.
Q25. 일단 친구 풀이 좁아지는 게 자퇴의 가장 큰 문제점이구나. 그런데, 사실 치기 어린 마음으로 어린 시절에 자퇴해서 잘 된 케이스가 많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남들보다 일찍 노력을 시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퇴를 선택해 독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 잘 된다고 어디서 주워 들었는데, 정말로 자퇴를 꼭 하기로 결심을 한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는 게 좋은가?
일단 학교생활을 안정적으로 하고 있다면 자퇴는 고려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마음가짐인 것 같다. 자기가 도저히 학창생활에 압박을 느껴서 이 이상 가게 되면 한계에 부딪힐 것 같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때 한 번쯤 고려를 해 봐도 좋은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빵을 진열하는 중인 정연욱 님
Q26. 결과적으로는 검정고시도 한 번에 붙어서 고등학교를 3년 다닌 친구들보다 더 빨리 대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그동안 프로게이머 자격증도 따고, 입단 시험도 통과하고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어떤 스토리가 있나?
그 뒤로는 스토리가 없다. 군 문제가 큰 고민이었다. 나는 당시 안일하게 군대를 다녀와서도 내가 프로로써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단이 확정되기도 전에 군 입대를 결심해 버렸다. 군대를 가게 되면서 이제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로써의 커리어는 끊어지게 되었다.
Q27. 입단 기회가 날아간 것인가?
내가 군생활하던 때에는 멀티방이라는 게 생겨서 군대 안에서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싸지방이랑 비슷한데 게임만 할 수 있는 컴퓨터가 비치된 곳이다. 거기서 리그 오브 레전드를 플레이할 수 있긴 했는데, 실력이 너무 빠르게 녹스는 게 느껴졌다. 연습 시간이 충분히 확보가 되지 않으니, 전역 후 다시 프로게이머를 지망하려면 0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원래 AOS게임을 잘하는 편도 아니었다 보니 이걸 다시 시간을 투자해 복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Q28. 그러면 그 뒤에는 어떤 일을 했나?
전역 후에는 일본어 과외를 했다. 뭐라도 잘하는 분야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일본어를 공부했었는데 전역 후에 지인들의 소개로 기회가 잘 맞아서 가정교사 같은 형태로 기초 일본어를 과외했다. 당시 인천에서 살았는데, 인천의 아파트 단지를 돌면서 수업을 했다.
Q29. 잠깐만 잠깐만, 그러면 고등학교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도 치고, 대학교도 가고, 서든어택이랑 리그 오브 레전드로 프로게이머 문턱도 밟아 보고, 군대까지 다녀오고, 과외선생님까지 해 본 것이 아닌가?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넓다. 거의 남들이 평생에 걸쳐서 하는 것 한번씩 다 해 본 것 아닌가?
그런가? 열심히 살긴 했다.
Q30. 그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
원식 : 아직 더 있다.
Q31. 아직도 더 있다고? 빨리 들려달라.
전역 후 인천에서 살았지만 대학교가 안동에 있었다. 그래서 원룸을 잡고 내려와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학교를 한 달 다녀 보니까, "아 이거 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자퇴 이후 두 번째 일탈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Q32. 그런 다른 길을 볼 수 있는 안목이나 경험을 갖고 있었던 것 아닌가. 요즘 사실 대학교 자퇴는 흔하지 않은가? 나도 사실 대학원 박사과정 자퇴를 했다.
자퇴까지는 아니고, 부모님 반대도 있고 해서 휴학을 하고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지인의 소개를 통해로 관광객들을 따라다니며 통역을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Q33. 통역도 어떻게 보면, 남들은 엄청나게 노력을 해서 겨우겨우 얻는 일자리가 아닌가. 폄하하려는 건 아닌데, 기회를 정말 쉽게 쉽게 잘 잡는 것 같다. 물론 일본어 실력을 벌써 갖추고 있는 등 미리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잡을 수 있었겠지만, 기회를 잘 놓치지 않는 성격인 것 같다.
기회가 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면 놓치지 않는 편이다. 다만 기회가 찾아오더라도 내가 투입해야 되는 노력이 크다 싶으면 신중하게 결정하는 편이다.
Q34. 그러면 판단이 빠른 편이구나.
기회가 오면 내가 할 수 있는지 견적을 내 본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할 수 있겠다 싶으면 하는 거다.
Q35. 마치 오늘 인터뷰처럼?
그렇다.
Q36. 재밌다. 그러면 통역하면서도 재밌는 일이 있었나?
아무래도 일본어 쪽이다 보니 일본인 관광객들을 많이 안내했는데, 일본인들이 매너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다 보니 통역을 하면서 트러블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떤 일본인 여성 관광객이 내가 마음에 든다더라고.
Q37. 오오오오.
통역 업무가 오후 5시까지였는데,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기에 10분 거리에 있다고 했더니 혹시 괜찮으면 저녁에 같이 술을 먹자고 하더라. 그래서 같이 술을 마셨다. 굉장히 기쁜 일이었지만 이 분은 어차피 일본으로 돌아가야 될 거라 생각해 아쉬운 마음으로 등을 돌린 적이 있다.
Q38. 신은 불공평한 것 같다. 혹시 남 점장님은 이런 경험 없었나?
원식 : ...없었다.
Q39. 알겠다. 자 그러면 통역 일은 얼마 정도 했나?
일 년 가량 했다.
Q40. 아 오래 했다. 그 통역 업무를 끝낸 게 몇 살 때인가?
스물... 넷? 오버워치를 한 게 스물다섯 살이니까.
오버워치 / 블리자드 서비스
Q41. 잠깐만. 보통은 이 정도 경력 쌓으면 최소한 마흔 살 아닌가? 정말 단기간에 남들 인생 3~4인분은 산 것 같다. 굉장히 재밌는 인생을 산 것 같다. 그러면 통역을 그만두고 나서 오버워치를 시작한 건가?
정확하게는 오버워치를 하기 위해 통역을 그만뒀다. 당시 나는 자격증을 갖춘 전문 통역인이 아니라 아르바이트 같은 거였다. 그래서 자리를 소개해줬던 지인에게 이야기하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었다. 당시 정말로 프로게이머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함께 프로게이머를 준비해 보자고 꼬드긴 친구가 있었다.
Q42. 그 친구가 혹시 남원식인가?
맞다.
원식 : 난 또 다른 녀석이 꼬셔서 하게 되었다.
Q43. 요약을 해 보자면 제삼자가 프로게이머를 하자고 남원식 점장을 꼬셨고, 점장은 또다시 프로게이머를 하자고 정연욱 님을 꼬신 것인가? 다단계구나.
...
Q44. 암튼 그래서 팀 엘리(Ely)가 만들어진 것인가?
그렇다. 그리고 내가 아무래도 프로게이머 관련해서 활동 경험이 있었기에 팀장을 맡게 되었고.
당시 기사 일부 캡처
Q45. 굉장히 믿음직스러운 팀장이었을 것 같다.
원식 : ... 어디 가서 싸움 질 일은 없다.
Q46. 멋지다. 그럼 된 거다.
원식 :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팀원이 6명인데 그중 두 명이 특출 나게 덩치가 컸다. 우리가 다 같이 찜질방을 갔는데 누군가가 "저 두 명의 몸무게를 합치면 나머지 네 명의 몸무게를 다 합친 것보다 무거운 것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제기했다.
Q47. 에이 어떻게 사람 두 명이 사람 네 명 보다 무거울 수 있는가.
원식 :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때부터 우리가 어디 가서 현피(현실 pk, 게임에서 시비가 붙어 현실에서 싸우는 행위)가 일어나면 질 리는 없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Q48. 팀을 처음 결성하고 훈련기간을 거쳤나? 아니면 바로 대회에 나갔나?
훈련기간은 두 달 정도를 가졌고, 하루에 8시간가량 훈련했다. 아무래도 멤버를 모아놓고 보니 나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프로 경험이 없었기에 부득이하게 연습기간을 길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팀원이 여섯 명이나 되다 보니 합을 맞추는 게 힘들었지만 연습시간을 길게 잡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름이 알려진 팀이 될 수 있지 않았나.
팀 엘리의 승전보
Q49. 그 두 달 뒤에 처음으로 나간 대회가 바로 내가 뉴스에서 본 그 대회가 맞는가? 3대 0으로 크게 이겼다던.
맞다. 3대 0으로 이기고, 3대 0으로 졌다.
원식 :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팀이다.
Q50. 그때 당시 뉴스가 두 건이 검색이 된다. 당시 프로를 지향한다고 했던 이야기 뒤에 이런 노력들이 있었구나. 그럼 그 팀은 어떻게 해체하게 되었나?
팀은 7월부터 활동을 하기 시작해서 9월 중순까지 유지를 했고, 그 대회에서 8강 탈락을 하게 되면서 팀을 해체했다. 팀을 해체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팀원 간의 실력 격차 때문이다.
Q51. 팀이 해체된 이후에는 복학을 했나?
복학을 했다. 과 대표가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TV에 나왔다고 나를 알아보더라.
Q52. 유명인의 길을 걷게 되었구나. 반갑다. 사인해달라.
하하. 학과에서 조금씩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한창 국내에서 오버워치 인기가 올라가던 시기다. 과대가 나한테 더 이상 프로게이머는 안 하냐고 물어보더라. 자기가 나 만큼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면 몇 번이라도 더 도전해 봤을 거라고 하더라. 하고 싶어도 실력이 안 돼서 못 하는 사람도 많다고. 실력이 너무너무 아깝다고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런가? 생각을 하기도 했고 3대 0으로 졌다고 바로 프로를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마음이 있었다. 한 달가량 고민하고 다시 프로판에 뛰어들었다.
Q53. 팀 엘리(ELY)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건가?
연습경기 때 용병으로 뛰어 주다가 알게 된 팀이 있는데, 거기 팀장의 초대로 그 팀이 리빌딩할 때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한 달 정도 활동을 했다. 공식 대회는 딱 한 번 나갔는데 예선에서 실격당했다.
Q54. 실격?
원식 : 허허허허....
허허허허...
Q55. 무슨 사정이 있길래 그렇게 웃는가? 나도 좀 웃자.
당시에 이런 결심을 했다.
'나도 이제 스물다섯 살이고, 이번에 안 되면 더 이상 이 꿈을 좇지 말고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다.'
비장한 각오로 대회 준비하는 2주 동안 개인 연습을 엄청나게 했다. 잠자는 시간과 게임하는 시간을 통제하니 실력이 단기간에 몰라보게 올라갔다. 덕분에 예선을 다 통과하고 이제 1승만 더 하면 TV에 방영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실격패 판정을 받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멤버 중 한 명이 본인 명의 계정이 아니라 부모님 명의의 계정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그게 본인 명의 계정인 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실격패 당하고 오버워치 프로 쪽은 접게 되었다.
Q56. 그게 몇 살 때라고?
스물다섯 살이다.
Q57. 인생 사는 속도가 진짜 다이나믹하다. 스물여섯에는 뭐했나?
학업을 마무리하고 코스모스 졸업을 했다. 그리고 부모님 농사일을 좀 도와드리다가 경산에 내려가서 음식점에서 일을 했다.
이건 설정샷이다
Q58. 지금 또 빵가게에서 일하고 있는데, 점장님이 못되게 굴지는 않는가? 나에게만 몰래 말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