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병현 Nov 30. 2018

노동청과 공익과 성난 사람들

코딩하는공익(6)

  오늘은 IT 이야기가 아니다. 코딩하는 공익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공익 이야기다.


  노동청은 노동과 관련된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공공기관이다. 노동청에서 수행하는 업무는 그 범위가 굉장히 넓지만 노동청을 제 발로 찾아오는 대부분의 방문객은 약자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는 해고를 당해 실업급여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 혼자서는 취업이 어려워 정부의 도움을 받아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임금을 체불받거나 최저시급에 미치지 못하는 적은 월급을 신고하러 온 사람들. 당장 한 두 푼이 아쉬운 사람들도 정말 많이 찾아오고, 억울함을 풀 길이 없어 잔뜩 격양된 채로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다.


  진상 민원인을 만나거나 황당한 전화를 받더라도 그들의 사정을 듣고 나면 그들의 행동에 이해가 가고, 화가 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콜센터 업무라도 보는 날이면 수시로 감정이 격양됐다가 내려앉았다가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마냥 감정 소모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요가 없을 수가 없는 이상한 감정노동터. 그게 바로 노동청이다.


  노동청 민원인들 중 일자리를 찾아 찾아온 민원인들이 가장 쉽게 뜻하는 바를 이루는 편이다. 노동청에서는 구인구직 활성화를 위한 '워크넷'이라는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으며, 구직자들에게 무상 교육과 생활비 일부를 지원해 주는 '취업성공 패키지'라는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어두운 표정으로 찾아와 "일자리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민원인을 취업성공 패키지 담당자에게 안내해 주면 그들은 대부분 밝고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돌아간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물론 취준 중인 대학생도 취업상담 패키지 혜택을 누릴 수 있으니 가까운 노동청에 꼭 문의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실업급여 업무의 경우 실업 인정이라는 절차를 통과해야 하는데, 여기서 고배를 마시는 민원인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 본인의 의사로 사직서를 작성하고 나온 경우에는 실업급여 혜택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소리를 지르다가 성이 난 채로 돌아가는 민원인들이 꼭 있다. 실업급여를 타는 데 성공한 민원인들은 마찬가지로 밝은 표정으로 돌아간다. 무시하지 못할 수준의 금액이 몇 달간 들어오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퇴직하신 분은 꼭 노동청을 방문해 실업급여를 신청해 보자!)


  이외에는 신용등급이 낮은 서민들의 소액 부채 탕감을 도와주는 서민금융창구가 운영되고 있고, 노동청 업무 전반에 대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민원실이 운영되고 있다. 사업주가 아닌 일반 노동자(또는 노동자가 되고 싶거나 노동자였던 사람들)가 노동청에서 방문할 만한 부서는 이 정도가 있다.


  사람들이 노동청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업무인 근로조건과 관련된 사건의 해결 문제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흔한 업무는 임금체불이나 퇴직금 미지급 등 돈을 떼인 근로자가 방문하는 경우다. 노동청에서는 중재를 시도하고, 중재가 잘 안 될 경우 고발절차를 통해 사업주에게 처벌을 내린다. 노동자는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임금 일부를 미리 나랏돈으로 지급받거나 민사소송을 걸어 사업주에게 나머지 돈을 받을 수 있다. (근로 중 문제가 생겼다면 가까운 노동청 민원실을 방문하라.)


  그만큼 마음속에 억울함을 품고 노동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매번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공무원들도 속이 터지는 경우가 있다. 분명 민원인의 말을 들어보면 굉장히 억울한 상황임에는 공감이 가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사안인 경우가 없지 않다. 공직자 입장에서는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에 좌절하고 돌아가는 민원인도 있지만 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이글거리는 민원인도 있다.

 

  


  10월 중순.


  3~40대로 보이는 남성이 노동청에서 분신자살을 하겠다는 내용의 협박을 노동부에 보냈다.


  그 사람의 얼굴이 찍힌 사진 두 장이 전국 노동청에 퍼졌고, 각 청은 대비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필자가 1층에서 경비를 섰다.  


  유사시를 대비해 소화기 하나가 지급되었다. "대구 50사단 신병교육대대 중대장 훈련병의 경계근무 솜씨를 지켜보십시오!"


  문제의 남성은 당일 오전 동대구역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미 그때부터 맘을 놓고 있었다. 동대구역에서 안동시까지 오는 방법은 많지 않으며, 가성비도 별로다. 게다가 분신자살을 할 거면 사람이 엄청나게 많을 서울이나, 본청이 있는 세종시로 가지 않겠는가? 그래야 언론에도 제보되고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억울함이 풀리지. 안동 같은 시골에서는 사건이 터져봐야 지역신문에 나는 정도로 끝날 것이므로 저렇게 마음에 독기를 품은 사람은 안동으로 올 리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KTX를 타고 대도시로 갔겠거니 하며 리액트 공부나 해 볼 심산이었다. 웹은 너무 낯설다.

 

  그런데 지청의 미화원 어르신이 너무 무서워하셨다. 여기 불이 나면 어떡하지? 불붙은 사람을 못 구하면 어떡하지? 불붙은 채로 뛰어들면 어떡하지?

  

  그래서 점점 필자의 마음도 무거워져 갔다. 본인이 억울한 사정이 있고, 그걸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해서 전혀 무관하고 선량한, 당사자의 사건에 전혀 개입조차 하지 않은 미화원 어르신까지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 지청뿐 아니라 다른 지청에서도 긴장하고 있을 터다.

  

  그전까지는 그 남성의 억울한 사연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으나 이제는 순수하게 그에게 일말의 동정도 생기지 않았다. 억울한 민원인이 테러리스트로 재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오후 2시쯤 경계태세가 해제되었다. 


  필자는 다시 3층으로 올라와 여느때처럼 우편물을 정리했다.




  안동경찰서에 집회가 신고되었다.


  오늘 오전 9시부터 K모 기업 하청업체 13개가 연합해 100여 명이 진행하는 것으로 시골 치고는 꽤 규모가 있는 집회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 집회를 노동청에서 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멀쩡한 기업체 청사를 두고 왜 노동청에서 시위를 하겠다는 걸까요?"

  "회사 앞에서 시위하면 진짜로 해고당할 수도 있잖아."

  "아..."


  공무원들은 며칠 전부터 긴장했다. 남자 직원들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 청사 정문 자바라(철제문)를 자물쇠로 잠가 두고 민원인은 확인 절차를 거쳐서 통과시키자는 구체적인 매뉴얼부터 4층 지청장실 문을 폐쇄하여 보안을 지키겠다는 이야기까지. 시위대의 규모도 규모지만 노동청의 적극적인 대응 때문에 더 무서웠다.

  

  오늘 오전 출근길에 보니 경찰차 3대와 기대마(의경들이 탄 경찰버스) 한 대가 와 있었다. 무력시위는 없기를 바라면서도 '여기서 잘 다치면 전역판정 나는 거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했다. 점잖은 척 하지만 역시 아직 철이 없나 보다.


  다행히 시위는 별문제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중간중간 화장실 사용을 원하는 시위대원들을 인도해 화장실도 사용하게 해 줬다. 시위대도 노동청 직원들에게는 불만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노동청에서도 최대한 협조해 주는 분위기 안에서 집회가 진행되었고, 최종적으로 시위대가 고발장을 들고 들어와 접수하는 것으로 시위가 마무리되었다.


  필자는 시위 진행 내내 1층에서 대기했다. 시위 현장에 휘말려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충돌 없이 무탈하게 진행되어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이래서 집회를 하는구나. 테러 협박을 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동한다.




  아무쪼록 직업과 관련하여 마음속에 억울함을 간직한 사람들이 노동청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용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대한민국의 행정관청 중 가장 서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관청이 노동청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보다 파급력이 너무 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