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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병현 Jun 23. 2019

네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폭력이야!

서울 국제도서전을 다녀와서

  [작가님의 글이 <작가의 서랍전>에 전시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브런치에 등록하신 이메일을 확인해 주세요.]


  브런치 앱에서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알람이 왔다. 작가의 서랍전이 뭘까? 내 글이 어디에 전시된다는 것일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필자 또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이게 무슨 소식인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메일함을 열어본다. 브런치에서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브런치에서 온 메일


  메일만으로는 정황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브런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추가적인 소식이 오픈되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서울 국제도서전 개막일이 되었고 브런치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문학'하면 떠오르는 이상적인 이미지를 상상 속에서 그대로 꺼내온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의 부스 사진이 올라왔다. 브런치의 전시 테마에 대한 짤막한 설명도 올라왔고, 리미티드 굿즈를 나누어 준다는 소식 또한 올라왔다. 브런치 부스를 방문한 유명 작가님들의 사진도 올라왔다. 단 하루 동안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몇 장의 사진들이 필자의 마음을 확 잡아끌었다. 서울이 너무 멀어 갈까 말까 망설였으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즉시 휴가를 올리고 다음날 퇴근하자마자 서울로 출발했다. 개장 시간부터 줄을 서 있다가 곧장 브런치 부스로 뛰어가겠노라 결심했다. 리미티드 굿즈에는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이 인쇄되어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그렇다면 필자의 글도 인쇄되어 있다는 뜻 이리라. 집이 시골이라 서러웠다.


  이왕 서울을 방문하기로 한 김에, 세창출판사에 연락을 넣었다. 코딩하는 공익 출판 계약을 한 곳이다. 이제 책 한 권 쓰기에는 충분한 에피소드들이 모였기에 본격적으로 편집자와 미팅이 필요한 단계였다. 출판사 측에서도 금요일에 도서전에 방문한다고 하여 코엑스에서 미팅을 하기로 했다. 벌써부터 금요일 일정이 가득 찬 기분이었다.


  목요일. 설레는 마음에 반비례해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예민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보고 싶어 근무지를 이탈했다는 군인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때마침 복무지에서 사건도 많았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우여곡절 끝에 목요일 퇴근시간이 다가왔고,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상상텃밭 일로 뜻밖의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취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배가 너무 부르고 힘이 들었다.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온몸이 노곤했다. 친구 집 자취방에서 눈을 붙였다. 몇 시간 자지 못 할 것 같다. 큰일이다. 내일 중요한 일정이 많은데.

  

  알람을 들으며 억지로 눈을 뜨고 일어났다. 외대 입구역에서 출발하여 10시까지 코엑스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술자리가 없었다면 코엑스와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을 것이다. 잠이 덜 깬 채로 일어나 빽다방 커피를 마시며 어리둥절하게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는데 오늘은 그런 여유를 즐길 새도 없을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드라이어가 없었다. 아뿔싸. 술도 아직 덜 깬 것 같다. 황급히 짐을 챙겨 가까운 사우나로 향했다. 오늘 하루는 최대한 말쑥하고 단정하게 시작하고 싶었다. 성인 5천 원. 다행히 가격이 아주 저렴했다. 이미 한 차례 몸을 씻고 나왔으므로 빠르게 목욕을 마치고 머리 손질에 시간을 들였다.



코엑스

  분주하게 움직인 탓에 늦지 않게 코엑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몸이 무겁다. 눈이 자꾸만 감기려고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오늘 할 일 많은데. 내일은 미술관에도 가야 되는데. 갈아입을 옷을 챙기는 바람에 무거워진 가방이 원망스러웠다. 아, 아이패드는 또 왜 들고 왔대. 일정 중에 글이라도 쓰려고 했니? 너 참 어리석은 욕심쟁이로구나! 하루 전의 자신을 자책하며 매표소를 찾아다녔다. 브런치에서 제공해 준 티켓을 수령하고 돌아서니 그 사이 수십 미터나 되는 줄이 생겨 있었다. 도서전의 대단한 인기를 이제야 체감할 수 있었다. 약간의 시간을 기다려 입장할 수 있었다. 세상에나. 행사장은 너무나도 넓었고 부스들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와, 대체 5일짜리 전시회에 돈을 얼마나 쓰는 거야? 돈 많은 출판사는 역시 다르네."


  입구에서 나누어 준 지도를 펼쳤다. 브런치 부스를 찾으려면 정말로 지도가 필요할 것 같았다. 오직 브런치 부스를 보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휴가까지 쓰고 서울을 방문했으므로 필자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성큼성큼 걸었다. 조금씩 잠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웨이팅이 없었다. 나중에 브런치 인스타그램을 통해 듣자 하니 관람객이 많아 30분씩 기다려야 입장이 가능했다고.


브런치 부스 일부 전경
브런치북 역대 수상작들이 전시된 브런치 책방

  부스의 외부부터 대기장소, 입구는 물론 모든 구간 하나하나에 굉장한 정성이 스며 있었다. 부스의 전체적인 색감에 맞추기 위하여 가구를 도색하는 수고를 들이는 것은 물론이며 조명의 개수와 색상, 위치까지 꼼꼼하게 고민한 것이 틀림없었다. 따뜻하고 품격 있으며, 몽환적이면서도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이었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자세로 창 밖에서 노려보고 있다

  이런 필자의 마음을 예측하였다는 듯이 창 밖에서 카카오프렌즈가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감히 감상에 젖은 필자를 훔쳐보다니, 아주 대담한 녀석들이다. 특히 무지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이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폐관 시간까지 브런치 부스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이것까지 의도한 것일까? 실없는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브런치 부스의 콘텐츠를 즐겨보기로 했다.


  브런치에 올라온 글들 중 미래에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이 높은 글 100편을 선정했다고 한다. 이들은 각각 10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으며, 방문객이 마음에 드는 카테고리를 하나 고르면 그 카테고리 안에서 랜덤 하게 글을 추천해 주는 방식이었다. 필자는 <감성 충만 에세이> 카테고리를 택했고, 수경 작가님의 <싸움의 해결 - 노 액션 노 리액션> 작품을 추천받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떠나기는 아쉬웠다.

 

  "저기, 제 글도 여기 전시되어 있거든요. 혹시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두꺼운 종이에 글 제목과 QR코드가 인쇄되어 있다.

  결국 한 장 받았다. 신난다! 어떤 글이 뽑혔을지 궁금했는데, 역시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글이 뽑혔구나 싶었다. 이 글은 <일잘러의 업세이>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었다. SNS 이벤트에도 참여해 브런치 한정 굿즈도 수령했다.


브런치 한정 굿즈 내부

  우측에는 브런치의 '글쓰기' 메뉴 디자인을 그대로 담은 메모지와 브런치 몽당연필이 있었고 왼편에는 이번에 전시된 100편의 글이 QR코드와 함께 인쇄되어 있었다. 당연히 필자의 글도 있었다. 너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최고의 선물이야, 고마워요, 브런치팀!


  이제 볼일 다 본 기분이다. 집에 가서 자고 싶었다. 집에 가더라도 미팅은 하고 가야 하기에 일단 카페인을 충전했다. 잠이 점점 달아났다. 텐션이 올라가니 주면이 달리 보였다. 온갖 재밌어 보이는 구경거리들이 가득했다. 역시 사람은 피곤하면 안 된다.



  대형 출판사들의 부스는 정말이지 반짝거리고 화려했다. POD 업체들도 굉장히 많이 보였다. 이 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 중 글을 쓰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을 것 같았다. 평일 오전부터 시간을 내어 도서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이들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고. 즐거웠다.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어도 즐겁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텐션이 안 내려간다. 술이 덜 깬 것인가 아니면 다 마시지도 못 한 커피에 취한 것인가.


  돌아다니던 중 금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부스를 발견했다. 금서라. 천천히 부스를 관람했다. 그리고 기분이 다운됐다. 이 부스에 전시된 글에 따르면 코딩하는 공익 매거진에 연재하다가 발행 취소된 몇 편의 글들은 금서의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작가에게 작품이란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렇다면 금서 처분은 일종의 처형과도 같은 행위이며, 세상에 한 달도 채 열어두지 못 한 필자의 글에 대한 압박은 헤롯 왕의 유아 살해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악랄한 탄압이 아닌가.


  안녕하세요, 연재 한 달 만에 탄압을 받은 금서 작가 반병현입니다.


  팔 한쪽을 절단당한 기분이다. 입 안이 썼다. 반도 채 못 다 마신 커피를 버리고 싶어 졌다. 속도 안 좋아졌다.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폐관 시간까지 죽치고 있으며 거의 모든 부스를 세 번 이상은 돌아볼 요량이었지만 그 부스는 더 이상 방문하지 않고 싶었다.



  세창출판사 분들과 만났다. 두 분께서 오셨다. 도서전 내부에서 미팅을 했다. 새로 배정된 담당 편집자님은 무척이나 의욕적인 분이셨다. 기획 초기단계의 미팅이므로 아직 목차도 못 정했다고 말씀드렸더니 A4용지 10장에 걸쳐 시중 서적들의 목차를 분석한 보고서를 만들어 오셨다. 보여주신 정성에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저는 빈말로 칭찬해 주시면 진짠 줄 알고 믿어버리거든요. 그러니 칭찬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부탁드려요. 대신 비판하실 때에는 제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셔도 되니 건설적인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미팅 중에 제가 눈물 뚝뚝 흘리고 있어도 아랑곳하시면 안 돼요."

  "너무 마음에 드는데요?"

  "아까 글 잘 쓰신다고 한 것은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하하."

  "우리는 좋은 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 욕심이 생긴다. 필자의 브런치를 구독하는 독자분들께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브런치보다 더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다.



  미팅이 끝났다. 소설 처방 코너 앞으로 이동했다. 작가가 10분간 이야기를 들어주고, 즉석에서 소설을 작성해 주는 이벤트라고 한다. 너무 궁금해서 미팅 전에 예약을 해 둔 터였다. 대기시간까지 30분가량 남았다. 바닥에 대충 앉아 전자책을 켰다. 막 책에 몰입하려던 차에 익숙한 얼굴이 지나갔다. 긴가민가했으나 입은 옷과 색감이 전혀 안 어울리는 민트색 백팩을 메고 다니는 키 작은 여성이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다가가 아는 체를 하고 수다를 떨다 보면 금세 대기시간이 끝나고 소설 처방 차례가 돌아오겠지만 하필이면 그녀가 서 있는 곳이 금서 관련 부스였다. 굳이 저기를 방문해 미팅으로 좋아진 기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므로 심심하겠지만 혼자 있기로 했다.


  30분은 꽤나 긴 시간이 될 것 같았지만 윤현승 작가님의 <하얀 늑대들>에 푹 빠져 있다 보니 금세 차례가 돌아와 버렸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짜임새 있는 허구의 이야기를 설계하지는 못 할 거야. 내 일상이 비정상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겪은 일을 그대로 옮기기만 하면 되잖아?'


  실없는 생각을 하며 소설 처방을 받았다. 10분간의 상담이 끝났다. 이제 한 시간 가량 기다리면 즉석에서 작성된 따끈따끈한 소설을 인쇄해서 제공해 준다고. 다시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와 책을 읽으려 했다. 익숙한 민트색 가방이 바로 앞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흰색 텐트 형태의 소형 전시부스 안에서 책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이나 또다시 혼자 있자니 너무 심심할 것 같았다. 전시장을 돌아다니자니 피곤할 것 같았다. 다리를 움직이기보다는 입을 여닫는 것이 체력 보존 측면에서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는 체를 했고, 말동무를 줍는 데 성공했다.


하얀색 텐트 안에 몇 권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형태다.

  "말동무를 줍는다는 표현은 너무한 것 아니야? 내가 조약돌이냐."

  "왜요, 돌멩이가 아니라 동전일 수도 있지."

  "500원짜리 동전?"

  "아뇨 백 원짜리."

  "맞을래?"

  "안경 껴도 돼요?"

  "어휴."

  "근데 누나 아직도 변리사시험 준비해요?"

  "아니 작년에 취직했다."


  변리사시험 판을 떠나면서 공부하던 참고서를 카이스트 교내 커뮤니티에서 염가로 판매했었다. 이 누나는 그중 1차 시험 대비용 책을 몇 권을 사 갔던 분이다. 공부 관련 정보를 물어보고 대답해 주면서 깨달은 건데 이 누나는 코드가 특이한 사람이다. 필자가 어디 가서 말솜씨가 모자라다는 생각은 거의 안 하고 사는데 이 사람과 대화를 하면 쉽게 말려버린다. 2018년에 <실전 민사소송법>을 출간할 때 서평을 부탁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해 2차 시험에 응시했다면, 변시를 포기하고 취직을 택한 지 이제 반년이 조금 넘었을 것이다. 피차 시험에 낙방하고 도피한 사람들이니 더 이상 시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서로 조심했다.


  "에이 거짓말 이렇게 평일에 노는데?"

  "외근 나온 김에 일찍 퇴근했지."

  "와 월급도둑! 내 직원이 그랬으면 해고한다. 근데 출근하는데 그렇게 화려한 가방 메고 가요?"

  "뭐 좀 오래되긴 했지. 근데 이 가방이 좀 질긴 재질인가 봐. 떨어져야 바꾸는데 아직 튼튼하네."

  "근데 누나 올해 몇 살이에요? 서른마흔다섯 살?"

  "너 진짜 맞고 싶지?"

  "때릴 거면 즉사하게 아주 세게 때려 주세요."

  "넌 진짜 미친놈야."

  "글쎄요 그쪽에 비하면 저는..."

  "뭐."

  "아니에요 날씨 참 좋네요."

  "여기 실내거든?"


  더 까불었다간 정말로 맞을 것 같아 그만했다. 근황을 간단히 주고받았고, 누나는 내 글에 알은체를 했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글 이야기로 넘어갔다.


  "사람들이 자꾸 치켜세워주니까 부담이 커요. 나는 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베스트셀러를 낸 적도 없는데. 제가 일상이 베베 꼬여서 소재가 좋은 것뿐인 게 아닐까요? 이 소재로 더 맛있는 글을 뽑아낼 수 있는 분들이 세상에는 많을 거예요."

  "너는 너무 자신감이 없구나. 너를 너무 깎아내리지는 말아야 해."

  "겸손한 게 좋은 거 아니에요?"

  "겸손은 언제나 미덕이 되지는 않아. 박보검한테 '와! 잘생기셨어요!' 했는데 박보검이 '제 얼굴은 평균에도 못 미쳐요.'라고 이야기하면, 너같이 생긴 애는 뭐가 되니?"

  "아니 제 얼굴은 갑자기 왜요."

  "그런 겸손은 미덕이 아니야. 마찬가지로 너도. 뭐 네 글의 완성도나 예술적인 가치는 다 제쳐놓더라도 네 글은 이슈가 됐고, 출판사에서 연락도 왔어. 많은 사람들은 출판사에 먼저 원고를 돌리면서 기회를 잡으려고 애쓰고 있고, 그게 꿈인 사람도 있어. 근데 네가 자신감을 가지기는커녕 너를 깎아내리기 바쁘다면, 그 사람들은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니. 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폭력이야."

  "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마 귀까지 새빨갛게 변했을 것이다. 부끄러웠다. 이 누나는 항상 직설적이다.


  "좋은 기회 손에 쥐고도 자기 비하를 하는 게 아니라, 남들 기대를 넘어설 실력을 갖추기 위해 뒤에서 노력하는 게 진짜 겸손 아니야?"

  

  이 사람이 이렇게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와 이 사람 나이 먹더니 철들었어. 누나 진짜 몇 살이에요?"

  "죽을래, 진짜?"



  처방받은 소설이 인쇄가 끝났다. 그녀와 작별인사를 하고 브런치 부스로 향했다. 집에 가기 전에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줄이 너무 길어 안에 들어가지는 못 하고, 밖에서 서성거리며 내부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저들 중 필자의 글을 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한 명이라도 좋으니 재미있게 읽어 주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조병승 편집장님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 터치가 먹히는 광고 패널을 농락하는 노하우를 배웠다. 코엑스에 있는 스크린 하나에 잠시 까만 CMD창을 띄우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출판 쪽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원래는 친구 자취방으로 가서 하루를 신세 지고,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극심한 피로가 몰려와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안동으로 내려왔다. 수면부족과 갑작스러운 음주가 이렇게 위험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처방받은 소설을 펼쳐 보았다. 비문이 많고 줄 바꿈도 불규칙적이며 오타도 많았다. 내용도 실망스러웠다. 디테일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다. 상담 중에 필기까지 하셨는데! 아무래도 격무에 시달리던 차에 작가분께서 글을 급하게 쓰셨던 게 아닐까. 두 번 읽어도 별로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다시 펼쳐 보고 싶지 않았다.


  


  하루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했다. 여러 종류의 책임감도 부여받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주말 내내 생각이 많을 것 같았다.


  일단 고민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브런치 부스 앞에서 무지 인형탈과 함께 찍은 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내일은 하루 종일 먹고 자고 읽으며 푹 쉬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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