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의 살신성인

마틴 브룩스의 <초파리>를 읽고

by 니디


며칠 전, 아직 가을의 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푹푹 찌는 여름의 기세만이 대기 중에 만연했던 어느 날

라면을 먹으려고 꺼낸 피클에 초파리 한 마리가 떡 하니 있는 게 아니겠어요?


시큼하고 달달한 오이피클 위에 바짝 누워 죽어있던 초파리.

가만히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다리가 긴 초파리였습니다.


몸통과 얼굴에 비해 다리가 훤칠하게 뻗어있던 그 초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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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소개드릴 책은 바로 마틴 브룩스의 <초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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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마틴의 말처럼 우리는 흔히 초파리를 생각할 때 '미미한'이라거나 '하등 한'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게 되죠.


도대체 초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도 몸집이 매우 작고 행동이 너무 빠른 녀석들의

얼굴을 마주하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초파리의 눈이 빨간색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저는

녀석들의 눈 색깔과 더불어 초파리에 대한, 그리고 생물의 유전에 대한

다양하고 색다른 사실을 마구마구 알 수 있었습니다.




'돌연변이'라는 이름을 처음 발현시킨 '더프리스'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으로 점진적인 진화를 주장


미바트는 다윈의 진화설을 거부, 한 번의 도약만으로도 진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 완전함이 아니면 효용가치가 없다고 믿음


모건은 더프리스의 돌연변이설을 실험하기 위해 생애 주기가 짧고 번식력이 좋은 초파리를 실험동물로 채택함.


멘델은 완두 콩을 통해 유전적 개념을 새롭게 발견


멀러는 방사선이 사람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



이 책의 초입부터 말미까지 중심이 되는 생물학자 '모건'은 교미를 하는 초파리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초파리들이 자신들의 일상 의식에 몰입한 채
어쩌면 저렇게 바깥세상에 대해 무심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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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를 실험동물로 사용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제 지식의 가두리에는 개(특히 비글), 개구리, 쥐, 곰팡이, 세균, 바이러스, 토끼

뭐 이 정도의 동물군이 전부였거든요.


근데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초파리까지 인간의 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니.

책에 따르면 "마취제 개발로 실험에 동물을 사용하는 것이 더 간편해졌고 덜 잔혹해졌다."라고 하지만

그래도 인간 때문에 많은 생명이 잔혹스럽게 죽었을 생각을 하면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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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동물을 사용하며 우리 학자들은 작은 초파리에서 무엇을 얻었을까요?

세세한 내용이 가득하지만 그중에서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임산부는 왜 방사선 촬영을 하면 안 될까


인간이 술을 좋아하는 이유


학습과 기억을 관장하는 유전자


장수의 비밀을 간직한 유전자


종마다 수명이 제각각인 이유


암컷의 수명이 짧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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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초파리>는 아시아 태평양 이론 물리센터가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과학 고전 50'에 선정한 도서입니다.

즉 결코 이 책이 가볍거나 과학계의 가십거리를 늘어놓은 책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모두 읽은 지금 저는 더 이상 초파리를

'예전의 작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으며 그저 윙윙대기만 하는 초파리'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유전자 지도가 초파리의 것이었다는 사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수백만 종의 생물(인간 포함)이 모두 다 똑같은 화학적 자료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사실, 암, 알츠하이머, 알코올 중독, 수면 장애, 마약 중독 등의 유전적 연구에 초파리가 쓰인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하잘것없게 만 느껴졌던 그들의 존재는 이제 어느 각도로 보더라도

그저 시간을 살아내는 저보다 훨씬 위대하고 대단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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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과 유전학에 대한 관심을 촉진시키는 촉매제가 되어줄 <초파리>

모두에게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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