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증명할 수는 없다

by 니디

남편이 나에게 속상한 마음을 터놓는다


그렇지 그렇지 그럴만하지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라는 속마음대신


맞아.. 응..


힘없는 말대답만 늘어놨다


그렇지 그렇지 하는 말들을 꺼냈으면

좋았겠지만 왠지 그 말들은 너무 무거워

들어 올릴 힘이 없다


시속 85km

해가 뉘엿뉘엿 지고

내 시선에서 빠르게 머물렀다 사라지는 길가 나무들과 가로등이

어느새 모습을 감췄다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순식간에 어둠에 먹혀버린 것이다


그새 캄캄해지고 별일이다


가끔 터널을 달리다 보면 그 끝에

새로운 세상이 있을 것만 같다


하얗고 눈부시고 반짝이고




남편은 오랜 시간 쌓여있던 거야,라고 말하며

차 주차를 마치고 내렸던 창문을 올리고 시동을 완전히 끄고 나서도

남은 마음을 쏟아냈다


남은 마음을 다 쏟아냈는진 모른다

내가 당신이 아니니 죽어도 알 수 없다


있는 힘껏 도망가고 싶다

아무 노력도 하고 싶지 않다

귀도 막아버리고 싶다

마음도 꺼버리고 싶다


살기 위해 도망가고 싶다


어느 글에서 본 적이 있다


생존을 위해 도망가지 않는 건 인간뿐이라고


아내

장녀

30대 중반

무주택자

백수

무자녀

누나

사회인


요즘은 잘 불리지도 않는

내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들이 참 많다


쓸데없는 단어들에 힘겹다

저 글자들에게서 도망가고 싶다


생존을 위해서 그게 최선인 것 같다


요즘 나는

내가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주 하고 깊게 한다


구제가 불능이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