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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창섭 Dec 17. 2018

무수한 1인칭의 시간들

– 김행숙의 詩, “조각공원”에 대해

시간은 어떻게 흘러갈까. 아니, 우리는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게 될까.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온다.” 변화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시간이 흘러감을 인식한다. “봄이 지나도 또 다시 봄은 온다.” 반복이다. 우리는 이러한 반복을 통해 시간이 흘러감을 인식한다. 우리는 변화와 반복, 모두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깨닫는다.


변화와 반복이 공존한다니, 이는 어찌 보면 너무나 모순된 것 같다. 그러나 변화와 반복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논리적 사고방식은 잘 알다시피 귀납과 연역이다. 귀납은 반복이오, 연역은 변화다. 귀납과 연역은 무관하게 존재할까? 아니, 그 둘은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개체적인 사건들은 반복되며 축적된다. 우리는 그러한 반복성의 결과를 일반화하여 귀납적인 지식을 획득한다. 이러한 귀납적인 지식은 다시 어떠한 개체적인 변화나 사건을 예측하기 위한 연역의 전제로써 이용된다. 연역의 결과물은 또다시 개체적인 사건이 되어 귀납의 구성물이 된다. 연역과 귀납은 끝없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인간이 지식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 귀납이라면, 인간이 그 지식을 활용하는 방식은 연역이다. 우리는 끝없는 귀납과 연역을 반복해 나가며 시간의 앞과 뒤를 좇는다.



“비둘기 한 마리가 발가락 사이에 부리를 넣었다 뺐다 넣었다를 시계추같이 반복한다. 그의 발가락 옆에서 「무제 Ⅱ」라는 그의 이름을 보았다. 끄덕끄덕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 김행숙, “조각공원” 중 1연, 『사춘기』.



아무 변화도 없이 반복되는 것 같은 시계추의 진동은 사실 무수한 변화의 결과이다. 그 무수한 변화의 결과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반복된다. 이를 우리는 “움직임”이라 불러도 될까? “움직임”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 속에서 비둘기는 특정한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조각이라 불러도 될까? 그렇지만 같은 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우린 움직임이라 불러도 될까? 모순되지만 끝없이 공존하는 이 정중동 속에서 부여된 그 조각의 이름은 「무제 Ⅱ」이다. “무제”란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름을 부여한다. 부여된 이름은 “무제”이다. “무제”란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름을 부여한다. 부여된 이름은 다시 “무제”이다. “무제”란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름을... 꼬리에 꼬리를 물며 결국에는 끄덕끄덕 시간이 흘러간다.



“잔디를 손바닥으로 쓸면서 한 여자가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느리게 움직일 때마다 풀들은 순순히 몸의 방향을 바꿨다. 그녀가 하는 생각을 알 수 없었다.”


- 김행숙, “조각공원” 중 2연, 『사춘기』.



잔디를 쓰는 행동을 할 때마다 잔디의 풀들은 제 몸의 방향들을 바꾸어 눕는다. 그러나 쓴다는 것은 누른다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다. 손이 지나가고 나면 풀들은 다시 몸의 방향들을 바꾸어 곧추선다. 그러나 쓴다는 것은 간다는 것이 아니다. 그 손은 다시 온다. 손이 다시 제 몸을 훑으면 풀들은 다시 눕고, 손이 지나가면 풀들은 다시 몸을 곧추 선다. 이 모든 것들은 순순한 것이다. 시간에는 순방향만 존재하고 역방향이란 것이 없어서 그 모든 반복은 한 쪽 방향으로의 변화만을 지시한다. 이 방향으로 훑었다가 저 방향으로 훑었다가 하는 것을 우리는 “쓸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헝클다”라고 한다. 시간은 우리를 쓸어내린다. 우리는 순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제 아무리 누웠다가 다시 또 곧추 세워도 어제라는 방향을 향할 순 없다. “오늘”이 “어제”가 될 수 있는 건 달력에 존재하는 시간성 명사에만 해당되는 말들이다.


그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공원에 누워, 그것도 시간이라는 것을 정지시켜 놓았다 할 수 있는 조각들이 모인, 조각공원에 누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 수 없다. 잔디들을 쓸어내리며 시간성을 조율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동작들은 어쩌면 어떤 신성(神性) 같다. 우리는 마치 잔디밭의 한 풀이 되어 자꾸만 몸을 눕혔다 세웠다를 반복한다. 희한하게도 풀 한 포기도 잔디이고 그것들이 모인 것도 잔디이다. 내겐 나만이 1인칭인 것처럼, 그러나 그 모두에게도 1인칭이 있는 것처럼.


그 1인칭들의 시간이 흘러간다. 당신이란 2인칭으로 불러보는, 거기 그 1인칭의 오늘 하루는 또 어떤 반복이고 또 어떤 변화였을지?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당신의 시선으로 이 글을 쓸면 여기의 글자들은 누웠다가 당신의 시선이 지나가면 다시 곧추 선다. 그 동작은 그다지 반복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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