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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란 Feb 01. 2022

너는 서울에서 자라서 좋겠다

지방에는 입시학원도 입시상담도 없다

<우리가 알아서 잘 살겠습니다> 는 페미니스트 부부인 나와 J의 성장기를 담은 에세이다. 우리는 페미니즘 이슈 뿐만 아니라 노동문제나 사회문제 등 폭넓게 대화를 하기 때문에 출간 계약 후 원고를 쓸 때도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썼다. (이를 하나의 주제로 묶고 편집한다고 편집자님이 꽤나 고생하셨을 듯) 페미니즘과 우리의 성장으로 책의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몇 가지 제외된 원고가 있는데, 아쉬운 마음에 이 미발간된 원고를 조금 편집하여 브런치에 올려본다. 미리 말하자면, 이를 먼저 읽은 편집자님도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J는 서울에서 자라 서울 시내 고등학교를 다녔고, 나는 지방에서 한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느 날 우리는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대학 입시생활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서울-지방 간 차원이 다른 입시 상담에 충격을 받았다.



"고3 때,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하는데,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까진 지원할 수 있고 어디는 안될 거라고 하시더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그냥 재수할 마음을 먹었어."


"담임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상담해줘?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담임 선생님과 내 성적을 바탕으로 입시 상담을 해본 적이 없어."


이를 들은 J가 깜짝 놀라며 내게 물었다.


“그럼 상담을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


“어떤 학교를 희망하고 있고, 어디에 지원 예정이라는 걸 알려드렸지.”



어느 학교에 원서를 쓸 것인지, 수시 혹은 정시를 지원할 것인지 입시와 관련된 것은 혼자 알아보고 알아서 지원서를 냈다. 예정된 상담 시간에는 선생님께 이를 알려드리면 그것으로 끝났다. 배치표를 찾아보고 내 모의고사 성적으로 어느 대학의 어느 과를 갈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은 모두 혼자 찾아봤다. 어느 누구도 내게 수시 모집 기간에 어디를 내보면 좋겠고, 준비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담임 선생님이 그동안 쳤던 모의고사 성적을 분석해서 상담을 진행해주셨어. 여기는 지원하면 합격이 가능할 거고, 여기는 어려울 거다 이렇게.”


"담임 선생님이 합격이 될 거다 안 될거다도 알려줄 수가 있어?"



서울에서 자란 J와 지방에서 자란 나의 입시 경험은 너무나 달랐다. 학교 담임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입시 상담을 해줄 수 있다니? 유명 입시학원에서나 그런 입시 상담이 가능한 줄 알았다. 입시 학원에서 배포하던 배치표는 학원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는데, 내 경우에는 희망하던 학교가 어느 학원 배치표에서는 상향 지원이었고, 다른 배치표에서는 하향이었다. 그래서 원하던 학교를 지원해도 될지 혼자 끙끙거렸던 기억이 난다. J는 J대로 지원할 학교를 스스로 알아봤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혹시 나만 담임 선생님과 입시상담을 이렇게 했나 싶어 고등학교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고3 때 다른 반이었던 친구도 같은 반응이었다.


“나도 나 혼자 찾아봤는데? 그럼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예전 남자친구와도 이 주제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그가 놀라던 것만은 뚜렷하다.


“선배들이 어느 대학교에 갔는지 데이터가 다 있지 않아? 그런 걸 바탕으로 상담해줬었는데.”


요새 하는 말로 ‘선배들의 과거 입시 빅데이터 분석’을 해서 어느 학교에 지원 가능한지 상담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도 그런 데이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배들의 성적이나 지원 결과로 상담을 받아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항상 입시가 끝나고 나면 서울대 몇 명, 연고대 몇 명, 사범대 몇 명 이런 내용이 적힌 현수막 한 장이 전부였다.



주변 사람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대도시와 지방 간의 입시정보 격차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것이었다. 단순히 정보만 있다고 모두가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얻은 정보를 기반으로 원하는 학교에 가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되는지, 어떻게 공부를 해야하는지 이런 정보에 관한 접근성이 지방과 너무 차이가 났다. 지방에서는 아마 더 많은 수고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정보이거나 영영 접근할 수 없는 정보도 있었을 것이다.




입시상담 뿐 아니라 입시학원도 없없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가 수험생활을 한 고향에는 고등학생이 다니는 입시종합학원이 없었다. 학원에 있는 강사들이 수능을 감당할 정도는 안 되었던 건지, 중학생이 다니는 학원은 많았으나 고등학생이 다니는 종합학원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알음알음 정보를 얻어 영어나 수학 과외를 받았고 탐구 영역은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그마저도 고2 겨울방학이 되자 과외 선생님은 내게 하산 명령(?)을 내렸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이미 가르칠 건 다 가르쳤고, 고3 때는 혼자 공부해야 자기 것이 된다고 했다.(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고3때는 다른 사교육 없이 혼자 문제집을 풀며 입시 공부를 했다. J는 이 이야기를 듣고 또 한 번 경악했다. 


"고3때가 가장 중요한데 혼자 공부하면 된다고 했다고? 아니 뭐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있어야 자기 것이 되는 건 맞는 말이긴 한데..."


"응, 선생님이 그렇게 이야기해서 그런가보다 했지 뭐."


고3 수험생활은 오롯이 나 자신 혼자와의 싸움이었다. 어느 요일 무슨 시간에 어느 영역을 공부하고 문제집은 뭘 풀 것인지 알아보고 결정하는 것도 전부 내 몫이었다. 



당시 언어영역의 비문학 지문에서 계속 문제를 틀려서 고민하다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오르비’라는 한 입시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발견했다. 언어영역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전반적인 전략을 담은 글이었다. 그 글을 읽기 전까지 전략적으로 출제자의 의도를 분석해가며 문제를 푸는 방법은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유레카를 외치며 해당 글을 출력해서 밑줄을 그어가며 여러번 읽고, 언어영역 문제를 풀다가 막힐 때마다 그 글을 꺼내 읽었다. 내가 공부를 하다 막히면 이렇게 혼자 인터넷을 뒤져 고군분투할 때, J는 대치동에서 언어영역 일타 강사의 현장 강의를 들었다.


“나도 학원을 맹신하진 않았는데, 대치동 일타 강사 수업은 역시 다르긴 다르더라. 나도 그렇고 언어 영역으로 고민하던 주변 친구들도 그거 듣고 성적 엄청 올랐어.”


나는 J의 말을 듣자마자 그간의 고생이 허무해질 정도로 허탈해졌다. J는 3개월 남짓 언어 영역 강의를 듣고 6등급이던 언어영역을 2등급으로 상승시켰고 결국 수능에서 1등급을 받았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언어영역에서 늘상 1등급을 유지했지만, 그 1등급을 유지하기 위해 수능 전까지도 혼자 아등바등 공부했다. 주변 친구들의 경우 언어영역에서 점수가 나오지 않으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고등학생이 다니는 입시학원이 없는데 언어 단과학원이 있을리 만무했다. 성적이 나오지 않는 친구들은 그저 과거에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집안 형편이 괜찮은 친구들은 첫 수능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상경해 재수학원을 등록했고 원하던 서울 상위권 학교에 무사히 진학했다.




이 모든 정보 격차는 결국 내가 선택한 적 없는 부모님 댁의 위치에서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이 좁은 땅에 무슨 지역 간 격차가 이렇게나 많이 나는 것인지. 내가 선택하지 않은 환경으로 인해 왜 이토록 정보의 접근성 차이를 느껴야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이 괜히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의 내 모습도 온전히 내 노력만으로 결실을 이루어낸 것이라 자신하지 않는다. 언어영역 1등급을 못 받는 것을 어릴 때 책을 안읽은 탓이라며 개인의 노력 탓으로 돌린다면, 서울의 월세와 생활비와 재수학원 수강료를 감당하고 서울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것도 그 개인의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생은 재밌다 못해 아이러니하다. 내가 입시와 관련된 격차를 발견하고 허망해 할 때 J는 오히려 나의 지방 살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비록 정보는 구하기 어려울지라도 담임 선생님이 진로를 정해주지 않는 삶,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를 갈 것인지 직접 찾아보고 결정할 수 있었던 삶을 부러워했다. 나의 이야기에서 오히려 삶의 주체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선이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는 겨우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환경으로 인해 삶에 제약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부러운 형태일 수 있다니. 그렇다면 당장의 제약에 불만이 조금 있더라도, 순간 순간 충실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물론 삶에 대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것조차 기회를 더 가져본 사람, 그리고 그 기회에서 성취 경험을 남들보다 더 경험해본 사람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 당신의 모습이 못나 보일지라도 그건 당신 탓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제외된 원고는 소수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책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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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일상 글쓰기: @aran.cha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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