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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란 Apr 01. 2020

첫 결혼기념일, 시댁에서 보냈습니다

밀레니얼 며느리와 시어머니



와우 대박. 시댁에 그리 오래 함께 살다니



친구에게 생일 축하 겸 안부를 전하다가, 한 달째 시댁에서 지내는 중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란다. 어디 그것 뿐인가. 한 달 째 시부모님과 한 집에서 지내는 것도 모자라, 며칠 전 첫 결혼기념일마저 시댁에서 보냈다. 이 모든 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시아빠의 일(영상제작/편집)을 도와드리러 시댁에 왔다가, 어느 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한 주 한 주가 무서울리만큼 쏜살같이 지나간다. 시아빠의 영상을 찍고, 편집하다 보면 어느 새 한 주가 지나가 있었다. J는 거기다 원래 하던 유튜브 편집 일까지 있어서 더 바쁘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 없이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 새 첫 결혼기념일이 다가와 있었다.



첫 결혼기념일의 하루


연애 때부터 보통 기념일에 선물을 주고받는 대신 근사한 식사 한 끼를 하는 것으로 기념일을 보내곤 했다. 첫 기념일이라 하얏트 호텔 Teppan도 예약했지만, 오랜 시간 고민하다 결국 코로나 때문에 취소하게 되었다.


근사한 저녁식사도 날아간데다, 시댁에서 일하다 맞이하는 첫 결혼기념일을 어떻게 특별하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아주 짧은 브이로그(Vlog)로.


영상을 찍고보니 너무 꾸밈없는 모습으로 나온 것 같아서 J에게 내 얼굴이 안나오도록 편집해달랬더니 그러면 Vlog가 아니지 않냐며 거절당했다.(아니 그러면 왜 J의 얼굴은 안나오는가)


그래, 내년에도 또 찍고 그 내후년에도 찍어서 모아보면 달라진 내 모습을 보는 의미도 있겠지. J의 거절을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뭔가 아쉽긴 하다.


하얏트호텔 식사 대신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엄마표 세 끼를 먹었다. 아침엔 과일색과 맞춘 샌드위치, 점심엔 정원에서 막 따온 팬지를 고명으로 한 쫄면, 그리고 저녁엔 대망의 스테이크. 스테이크에 작년 스페인 신행에서 사온 와인까지 곁드니 금상첨화였다. 와인은 또 어찌나 맛있던지 생전 처음 와인이 맛있다는 걸 알게 해줘서 매년 이 와인을 마시자고 J랑 얘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 모든 음식은 시엄마가 특별한 하루가 되라며 다 준비해주셨다. 설거지도 하지말고 방에 가서 쉬라며 J와 나를 부엌에서 내쫓기까지 하셨다. 덕분에 우리는 지난 1년을 돌아보며 길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결혼기념일이 처음이라 이렇게 기록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 이번 첫 결혼기념일을 보내며 시부모님께 받은 감동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며느리를 다급하게 부른 이유


 "S야, 빨리 나와봐라 빨리!!"


자막 제작 작업 중에 시아빠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너무나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 달려나가니 시아빠가 한 손에 리모콘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TV 화면을 가리켰다.


"저 선글라스 어떠냐? 내가 아까 밑에서부터 쭉 올라갔는데 여기 선글라스를 하네"


TV에는 홈쇼핑 채널에서 쇼호스트가 선글라스를 끼며 한껏 설명중이었다. 다른 물건으로 설명이 넘어갈까봐 나를 다급하게 부른 것이었다. 시아빠는 채널 1번부터 쭈욱 올라가며 홈쇼핑 채널을 둘러보고 있었다고 했다.


저게 예쁜가? 어제 본 그게 더 예쁜가? 아냐 난 전에 본 그게 더 예쁜 것 같아. 갑자기 온가족이 TV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 어떤 선글라스가 더 예쁜지 저마다 의견을 냈다. S는 이런 스타일이 어울리던데. 아냐, 얘는 얼굴이 작아서 뭐든 잘 어울려


이 진귀한 품평회는 시엄마가 결혼기념일인데 시댁에 있어서 어떡하냐며 뭐라도 사주겠다고 던진 미끼를 내가 냅다 물면서 시작되었다. 


나는 미끼를 확 물어분 것이여


마침 TV 홈쇼핑에 패션잡화들이 방송중이었고, 저 라섹해서 선글라스 잘 끼고 다녀요, 했더니 그날부터 두 분이 TV 앞에 앉아 홈쇼핑 채널을 돌려가며 선글라스가 나오나 안나오나 눈에 불을 켜고 계셨던 것이다.


시집살이 같은 시집살이도 안시키시고, 오히려 세 끼를 내리 먹이시느라 힘드실텐데. 며느리 뭐 하나 사주려고 시부모님이 계속 채널을 돌려보시던 그 모습을 보고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며느리살이?


시댁에서의 하루를 들은 엄마는 '시부모님이 며느리살이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네' 라고 말했다. 핸드폰 너머 엄마의 목소리에서 미안함과 고마움이 전해져왔다.


그리고 이에 마지막까지 가슴을 먹먹하게 한 시엄마의 한 마디.


"며느리살이 아니고 자식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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