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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길의 애정 Sep 06. 2022

늘 꿈을 꾼다

서울 종로구 | 인사동 & 창덕궁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내가 갖고 싶던 직업을 갖기 위해 외길 인생을 걷는 것과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여 적당한 과에 진학해 적당한 스펙을 쌓고, 적당한 회사에 지원해 적당한 급여를 받으며 회사를 다니는 것 중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선택의 기로는 제각기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굉장히 일찍 찾아왔다. 나이 터울이 적잖이 나는 자매가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아오며 '부모의 지원으로 대학을 가기는 글렀구나.'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입학 등록금도 내주기 어렵다는 말을 어렵게 꺼낸 부모의 말은 어린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다. 차곡차곡 쌓아왔던 내 꿈에 대한 희망이 이뤄질 수 없고 일찍이 생계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부터 더 간절해졌지만 슬프게도 예정되어 있던 현실은 바꿀 수 없었다.


  아쉬움에 놓지 못하는 나의 꿈. 학예연구사.


 의무적으로 새 학년이 되었을 때마다 나의 장래 희망과 부모가 바라는 장래희망을 써서 제출해야 했던 학창 시절. 초등학생의 어린 나는 가본 적도 없던 아쿠아리움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아쿠아리스트를 꿈꿨을 때가 있었다. 물을 무서워하는 꼬마의 그 장래희망은 오래가지 못했고, 이듬해 새 학년이 되어 다시 작성한 장래희망란에는 다른 직업이 자리를 대신했다.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마을 문고가 생긴 이후로 도서 대여 제한수를 꽉꽉 채워 대여를 했다. 특히 탐독했던 것들은 가장 사랑하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좁은문', '데미안', '주홍글씨', 성인이 되어 관람한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지킬 앤 하이드', '프랑켄슈타인', '베르테르' 등의 원작 소설인 세계 고전 문학과 '구운몽', '사씨남정기', '운영전' 같은 한국 고전 문학, 세계사, 한국사, 미술사, 고대사, 역사 소설들이었다. 매일 세 권 이상을 읽었다. 그곳은 거대한 파도였다. 작은 마을 문고에 있던 고전 문학, 세계사, 한국사, 미술사, 고대사, 역사 소설 중에 읽지 않은 도서가 없을 정도로 끝없이 밀려오는 지식의 파도를 맞아냈고 그때 접한 책들은 어린 나를 과거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때 한국사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고고학 책을 보지 않았더라면 다른 꿈을 꾸며 아쉬움 없이 나아갈 수 있었을까. 불상을 보며 설레고 수묵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청자의 은은함에 반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을까.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에 휴일이면 아쉬움을 달랠 곳을 찾아다닌다. 한옥의 단청을 칠한 오방색에 시선을 빼앗기고, 목재 건물의 향과 멋에 취하고, 오래된 탑을 보러 다닌다. 종교는 없지만 사찰에 찾아가 탱화를 구경하고 박물관 의자에 앉아 세월의 중후함과 소박한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온다. 종로는 그런 면에서 가장 좋은 곳이다. 걷는 곳마다 한옥과 궁궐이 지척에 있고, 박물관과 미술관이 가득하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서울을 내려다볼 수 있다.

 이날도 정신없이 지나간 일주일 뒤에 찾아온 달콤한 휴일이었다. 맑은 하늘과 새하얀 구름을 보니 나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 어디를 갈지 결정하지 못했지만 발길은 늘 그렇듯 익숙한 아름다움을 향한다. 창덕궁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가다 이유 없이 하차 벨을 눌러 인사동으로 갔다. 아주 어렸던 2~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옛 모습을 잃었지만 상점 앞에 걸린 붓과 그림, 쌍화차와 대추차를 내어주는 찻집들은 아직은 이곳이 인사동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부쩍 많아진 관광객들과 외국인들을 보며 주말이면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던 그때가 떠오른다. 며칠이면 망가질 종이부채를 신중하게 고르던 고사리손, 삼청동 법련사 주지 스님으로 계시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아빠가 사주신 옛 풍문여고 맞은편에 있던 전통 찻집에서 마셨던 매큼한 수정과가,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옛 인연들과 거닐던 새벽녘 적막함이. 새로운 추억을 가져갈 그들과 지난 과거를 떠올리는 나는 같은 듯 다른 꿈을 꾼다.

 익선동으로 걸음을 옮기지만 오래 있지 못하고 정처 없이 걸었다. 고요한 종묘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이어폰을 놓고 나와 음악을 듣지 않으니 머리에 떠오르는 것들이 많아진다. '지금 살아가는 이 시간은 내가 원하는 삶일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유치원 교사와 헤어 디자이너만을 꿈꾸며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관련 학과로 진학해 결국 그 직업을 가졌던 초등학교 친구들이 지금은 그 직업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꿈꿨던 일이 내게 꼭 맞는 톱니바퀴는 아닐 수도 있으려나 생각해본다.


 10년이 넘는 직장 생활을 하며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직업을 가졌던 것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고 있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회의감으로 지고 있었다. 요즘 연이은 스트레스로 굉장히 힘들었고, 현실이 힘들다 보니 현실의 나를 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말의 시도도 해보지 않고 너무 어린 나이에 현실과 타협한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땐 그게 최선이라 믿었겠지만 그건 최선이 아니었다.

 한옥이 하늘과 산, 흙, 나무와 같은 자연과 어우러졌을 때 발현되는 아름다움이 놀라울 정도로 빼어난 곳. 자주 보면 닳을까, 자주 가면 내 발길로 박석이 닳을까 아끼고 아껴 가는 곳. 골목을 걷고 걸어 창덕궁에 도착했다. 입장권을 결제하자마자 오늘 가지고 온 렌즈가 56mm 단렌즈인 것을 깨닫고는 탄식했지만 꽉 찬 화각만큼 꽉 찬 마음을 담아 보기로 한다.

 말간 하늘 아래 둘러싸인 짙은 녹음 사이로 보이는 오방색은 잠재웠던 꿈을 다시금 꾸게 한다. 학예연구사를 꿈꾸고, 그와 비슷한 결인 국사 교사와 고고미술사학자를 꿈꿨던 그때의 나로 돌아가게 한다.


 한옥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인 현판을 보는 것은 언제나 가슴을 들끓게 한다. 바르고 담백한 글씨체가 쓰인 현판은 궁궐의 정문은 화(化)를 써 경복궁은 광화문, 창덕궁은 돈화문이라 이름 짓고 정전은 정(政) 자를 써 경복궁은 근정전, 창덕궁은 인정전이라 이름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처마 아래서 무더운 볕을 피해 본다. 뒤틀리고 색이 빠진 기둥에서 세월을 느껴본다. 앞서 관광 해설사의 해설을 듣는 사람들 뒤에서 그들과 같은 시선으로 건물을 바라보기도 한다. 편한 옷을 입고 편한 침대 위에 누운 듯 긴장하는 요소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학예연구사가 되었다면 한 번은 꼭 한옥과 관련한 기획을 했을 것이다. 한옥은 늘 그렇듯이 이날도 여러 편의 꿈을 꾸게 했다.


 특히나 좋아하는 공간인 낙선재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다. 툇마루에 앉아 낙선재를 바라보니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라고 쓴 글씨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낙선재에서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며 영면에 든 그때부터 먼 훗날까지 좋은 꿈만 꾸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본다. 오랜만에 찾은 창덕궁을 크고 넓게 눈에 담고 싶어 세세히 챙겨보지 않은 주련을 보는 것은 다음으로 기약한다.

 곧 심어진 나무마다 불긋한 색으로 물들어갈 테다. 창덕궁의 후원이 가장 아름다울 때를 그리며 어린날의 꿈을 다시금 회상해보고, 훗날의 꿈을 그려본다.


 늘 꿈을 꾼다는 건, 쳇바퀴 같은 일상을 매끄럽게 이어갈 수 있도록 윤활제를 칠해준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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