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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길의 애정 Jan 12. 2023

볕이 별처럼 느껴질 때

서울 용산구 |  해방촌

 아직 따가운 볕이 피부 틈으로 파고드는 10월 초의 어느 날. 일상을 잃어버린 듯 바삐 보내던 시간을 잠시 멈추고 일주일 간의 짧은 휴식을 갖기로 했다. 그간 부족했던 수면을 취해도 되고, 밀린 집안일을 해도 되고, 학업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던 만학도였음을 반성하며 학업에 잠시나마 열중해도 되지만 사무실에 틀어박혀 의자에만 앉아 있던 몸을 위해 밖으로 나서기로 했다. 


 아주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마친 카메라와 가장 편한 운동화, 적당히 볕을 가려줄 얇은 소재의 긴소매 상의를 입으며 채비를 마쳤다. 이미 며칠을 쉬었지만 도무지 돌아오지 않는 체력 탓에 너무 멀리 가지는 않기로 했다. 낯설지만 멀지 않아 힘이 부치면 언제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 해방촌을 가보기로 했다. 

 낮에 밖을 걸어본 지가 언제였을까. 낮이 긴 계절이었지만 늘 퇴근길 하늘에는 별이 떠 있었다. 고요하고 적막함만 가득했던 풍경. 시끄럽게 땀이 난 몸에 달려드는 여름철의 모기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낮 시간의 세상은 너무나도 생동감이 넘쳤고, 열정이 가득했다. 매일 출근을 하며 지나가는 광화문 광장이지만 어쩐지 이날은 유난히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게 됐다. 얼굴에 만연한 흥미로움. 덩달아 나도 광화문 광장에서 벌어지는 일에 흥미가 생겨 세종문화회관 정류장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소란한 환경에 놓이는 것에 예민해지는 성향이지만 버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기합 소리와 박수 소리, 마이크 소리에 괜스레 설렌다. 

 아직 여름의 위상이 맹위를 부리던 이날은 유난히도 큰 구름이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높아진 하늘은 가을이 이미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갈월동에서 작은 마을버스로 환승해 굽이굽이 골목길을 따라 올라간 끝에 닿은 해방촌은 중간고사가 끝났는지 이른 낮임에도 교문 밖을 나와 삼삼오오 재잘대는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학생 때는 몰랐던 소소한 행복이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저 볕을 맞고 싶었다. 볕이 내겐 너무도 그리웠고, 절실했다. 따스하고 포근한 봄날의 볕조차 곁을 내주지 않던 나였는데, 살갗이 발개지도록 내리쬐던 이 볕이 유난히도 반가웠다.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여러 갈래로 나뉘고 그 끝은 결국 서로 맞닿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 발견한 한 펍에 들어갔다. 시간대와 상관없이 마시고 싶은 커피 한 잔과 술 한 잔을 주문했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취향에 맞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어떤 분위기라도 오늘은 내가 맞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음료와 술을 받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초가을의 바람이 옷을 넘어 몸에 닿는다. 한기가 담겨 있는 것을 보니 가을이구나. 느껴진다.

 지금은 N서울타워로 불리는 남산타워는 내겐 낭만 그 자체다. 20여 년을 남산 아랫 자락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남산타워는 지방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지금부터 서울임을 알게 해 주는 깃발 같았고, 길을 잃었을 때 나침반처럼 방향을 알려주었다. 마치 선원들이 북두칠성을 보고 방향을 찾았다는 설화처럼 말이다. 사무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남산타워는 감옥 같던 회사 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아주 작은 즐거움이었다. 바쁜 나날들이 이어져 계절을 상실했을 때 남산에 입혀진 나뭇잎의 옷 색을 보며 잃어버린 계절감을 찾아오는 날이 여럿이었다. 


드넓은 하늘과 그 하늘을 장식하는 구름이 막힌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들었다. 마음에 드는 의자에 앉아 사놓고 읽지 못했던 책을 꺼내고, 듣고 싶던 음악을 들었다. '밝은 태양빛 아래에서 막힘없이 넘어가는 책장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알코올, 뜨거운 탄 향이 힘든 삶에 차게 식어버린 감수성과 마음을 덥혀주었다. 


 어느새 단단히 목을 죄고 있던 답답함과 불필요했던 감정이 서서히 풀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간 일'이라는 지옥에서 꺼내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결국 그 지옥에서 나를 끄집어낼 사람은 나였다. 악순환이 되는 순간을 끊어내고, 잃어가는 나를 찾을 사람은 나였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발악했던 지난날의 덧없음을 느끼며 감옥에서의 내 삶을 조절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휴가는 '진짜 나'를 완전히 찾기에는 모자란 시간이었을지 몰라도, '나를 찾아가는 길'을 찾아냄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나 보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을 보내고 가게에서 나와 목적지 없이 걸었다. 비어 있는 골목을 걸어 다니고, 비어 있는 상점을 바라봤다. 때로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볕이 별처럼 느껴진 때를 생각하며 볕을 느꼈다. 한없이 원해도 도통 손에 잡히지 않던 별과 같던 그 '별'을 이제는 손에 가득 담아 본다. 뜨겁지만 타들어 가지는 않을 듯한 적당한 열감. 온몸에 온기와 그를 넘어서는 열기가 차례로 느껴진다. 냉기가 가득한 빈 골목이지만 볕이 내려앉아 주황빛으로 색을 입혀 따뜻해 보였다. 이건 내 마음에 볕이 내려앉았기 때문이겠지.

 마음의 병을 빠뜨린 못은 너무도 깊어 그 끝을 알기가 어렵다. 심연에서 나를 구하는 건 뭍과 가까운 곳으로 스스로 헤엄쳐 나가야 한다는 마음가짐과 방법을 모색하는 노력, 그 방법을 실행하는 행동력, 그리고 내 상태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나'라는 사람만을 진료하고 치료하고 처방하는 의사가 되는 것. 이날의 나는 심연에서 나를 꺼내기 위해 '볕'이라는 새로운 치료 방법과 처방을 내렸고, 다행스럽게도 차도가 있었다. 아마 이날이 없었다면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 같다. 


 마지막 글을 작성한 날로부터 3개월이 다 되어 간다.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참고 또 참으며 바보같이 감정을 억누르고, 불편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던 것을 그만뒀다. 볕이 별처럼 느껴지던 바보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그만뒀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며 마음껏 나를 표현해 왔고, 폴라로이드 사진과 함께 나의 소중한 시간을 기록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고, 내가 나인 순간 내 삶이 가장 빛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난 늘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뚫리지 않는 방패는 될 수 없겠지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상처 없이 지켜내는 방패는 될 자신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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