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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입가경 Aug 27. 2020

<이터널 선샤인>을 졸업했다.

 Cosmic Boy - 겨울 (feat. 선우정아, 유라)

*오늘의 글과 어울리는 곡은 <겨울 Winter (Feat. sunwoojunga, youra) · Cosmic Boy>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x9IRL6ZCM8


밤에는 마음이 가라앉는다.

바쁜 날을 연달아 보내고 나면 더 그렇다. 오랜만에 버스로 돌아가는 밤이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집으로 가는 동안 들을 노래를 골랐다. 마침 밤의 서점 계정에서 추천해 준 '나랑 아니면'을 틀었다. 맞아 이 노래 좋지. 오랜만의 검정치마였다.


"야 나랑 놀자. 밤늦게까지 함께 손뼉 치면서 나랑 마셔. 너와 나의 몸이 녹아내리면 나랑 걷자 멀리까지"


심장이 툭 했다. 어렸을 적 코미디 영화로만 기억했던 트루먼쇼를 대학생 때 다시 보고 울던 날이 떠올랐다.

'나랑 아니면'이 이렇게 먹먹한 노래였나? 두 사람이 예복을 입고, 나란히 선 앨범 재킷 사진을 들여다봤다. 설레면서 단단한 표정이었다. 평생을 약속하는 예쁜 마음이 이제는 조금 아득하고 신기하다. 다른 세계에서 살던 둘이 만나 같은 마음을 먹고, 서로를 허물면서 옆에 있어주는 건 참 경이로운 일이다. 예쁜 커플을 보면 이제 먼 풍경을 보는 기분이 든다.


경험은 새로운 안경을 맞추게 한다.

다시 보는 영화에선 새로 보이는 것이 많다. 렌즈를 바꾼 것처럼 구석구석 초점이 너무 잘 맞는다. 이런 방식으로 몇 번을 돌려보던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도 졸업했다. 예전에는 마지막 복도 씬,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재회에서 '모든 단점을 안아버린 운명적인 사랑'을 봤다면, 이제는 '순간의 감정에 못 이겨 끝이 보이는 선택을 반복하는 사랑의 민낯'을 봤다. 좋아하던 영화가 불편해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씬 단위로 분석하는 리포트를 쓰고, 과잠바에 각인을 새길 정도로 아끼던 영화였는데, 상황이 많은 관점을 바꾸었다. 조엘의 말끔하지 못한 관계 정리가, 클레멘타인의 즉흥적인 선택이 상처였다. 또렷하게 과몰입한 죄로 주인공들한테 두드려 맞고 나가떨어진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영화 목록에서 <이터널 선샤인>을 지웠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허허 저 녀석들, 한 번 더 갈 때까지 가보라지.' 하면서 조엘과 클렘을 응원할 수 있게 될까? 폭풍의 바다를 지나 문을 열고 나가는 트루먼을 눈물의 박수로 응원했던 그때 그 시절처럼.


반복하니 또 다르게 들린다.

한강 지날 땐 울적하게 들리던 노래가, 집 가는 길에 걸으면서 들으니 금세 뭉클하다. 여전히 애틋하고 예쁜 노래였네.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다가 집에 도착한다.


"야 나랑. 놀자 어디 가지 말고

그리울 틈 없도록 나랑 살자.

아주 오랫동안 우리 같이 살자.

나랑 아니면 누구랑 사랑할 수 있겠니.

나랑 아니면 어디에

자랑할 수 있겠니, 나랑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넌 내게 말했지.

 날 위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알아, 나도 언제나 같은 마음이야 baby.

아마도 우린 오래 아주 오래 함께할 거야."


그래, 검정치마는 아무 잘못이 없다. 티끌만큼 쌓인 어느 경험치가, 동그랗게 남은 추억이, 그날의 조명, 온도, 습도가 문제다.


***

새로 업데이트된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

1.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2. 하나 그리고 둘 (에드워드 양)

3.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4. 비포 시리즈 (리처드 링클레이터)

5. 결혼 이야기 (노아 바움벡)

+ 그리고 <먼 훗날 우리>


아무 잘못 없는 <검정치마- 나랑 아니면>도 듣고 가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nNfjHkWo6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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