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이 돋지 않으면 안되나요

by 윤동규

0.

내가 좋아하는 몇가지 주제가 있다. 악인의 작품을 사랑하는건 금기인가. 어떠한 것을 의무감으로 사랑하는건 잘못되었나. 영원히 누릴 수 없는 체험은 인생의 득인가 실인가. 그 주제들에 관련하여 몇가지 이야기도 써보고, 많은 술자리에서 다양 한 사람과 의견을 나누었지만. 아직까지도 딱 떨어지게 결론짓지 못한다. 그래서 더 좋아하는 거일수도 있고.


1.
얼마전 현대카드 바이닐 앤 플라스틱에 다녀왔고, 우연히 펫 사운즈 앨범을 보게되었다. 관련없지만, 요즘들어 영어를 한 글 독음으로 그대로 쓰는데에 어떤 멋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팟캐스트 우리는 꽤나 진지합니다에서 자주 나오는 '코오-피' 같은 느낌의 멋이 아닐까 싶다. 한영 전환을 하지 않아도 되고, 스펠링이 틀린건지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매력적이 다. (그렇지만 펫 사운드 인지, 사운즈 인지는 헷갈렸다)
희대의 명반이라는 이야기도 많고, 비치 보이스의 음악을 평소에도 듣기는 했지만... 양심적으로 즐겨 듣는다고 표현하지 는 못한다. 끽해야 3~4년 전. 바버렛츠가 바바라 앤을 커버해서 알게 됐으니깐. 따지고보면 비치보이스보다 바버렛츠를 먼저 접하는 다소 우스운 상황인거다. 그러니까 지금, 펫 사운즈를 들으며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는게 없는'상태인거다.


2.
이런 의무감으로 음악을 들었던 기억은, 고등학교 2학년때 우탱클랜 1집도 있었다. 직접 살 용기는 없어서(지금도 그렇지 만, 당시 해외음반은 2~30퍼센트 더 비쌌다) 친구가 산 우탱클랜의 앨범을 빌리고, 돌려주기 전까지 계속해서 들었다. 친구 역시 의무감으로 샀기에, 딱히 돌려달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미술학원 내내. 그러니까, 하루에 4시간 1주일에 스무시 간이 넘게 한장의 음반만 들었었다. 그런데도 신기할 만큼 좋아지지 않았다. 물론 크림이라던지, 메쏘드맨 솔로 등은 단박에 귀에 꼽혔지만, 나머지 곡들을 포함하여 앨범 전반적으로 계속해서 귀를 빗나갔다. 당시엔 어마어마한 힙부심이 있어서, 이걸 좋아하지 않으면 진정한 힙합 매니아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흔한 결론이긴 하지만, 친구에게 앨범을 돌려줄 때가 되자 처음으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무감으로 시작했지만, 의무감이 결국 하나의 세계를 넓혀준 사건이었다.


3.
그렇게 펫 사운즈를 들으며, 우탱클랜을 생각하며. 음, 과연 의무감과 허세와 겉멋으로 인한 시작이 과연 부정적으로 바라 볼 부분인가... 라는 생각을 한번 해봤다. 물론 그 모습이 예쁘지는 않다. 와 이노래 뭐지?! 온몸에 소름이 돋고, 어느새 음반을 사서 미친듯이 들었다, 라는 이야기가 훨씬 매력적이지. 커먼의 앨범같은 경우엔, 단순히 앨범 쟈켓이 예뻐서 샀었는 데 그 길로 제이딜라, 더루츠, 탈립콸리, 블랙스타 쭉 쭉 탐음했었다. 그런 순수함이 매력적이게 쓰이긴 하지만. 시작이 어 쩌구 저쩌구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래서 지금 당장 내가 듣는 음악들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벅스에 슬그머니 우탱클랜 1집을 추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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