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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앨런이 시나리오 작법서를 내지 않는 이상, 영원한 시나리오의 스승은 로버트 맥키가 아닐까 싶다. 나만의 스승이 아닌, 거의 모든 이야기꾼들의 스승. 그가 쓴 시나리오엔 관심도 없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쓴 단 한권의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바이블이 되었다. 나도 뭐 책이 닳도록 읽은건 아니지만, 그 두꺼운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나름 핵심정리를 했고, 그 과정에서 68가지 팁이 나왔다. 물론 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건 반복해서 넣었기에, 정확하게 딱 68가지라고 할 수 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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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재미있는건, 그걸 단순히 워드 파일로 남긴게 아니었다. 왠지 이런건 카드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 하나 프린트해서 명함 크기로 잘랐다. 그런데 결국 종이잖아? 이러면 쓰면 쓸수록 찢어지고 더러워질텐데. 그래. 코팅하자. 인터넷을 찾아보다 결국 주변 동네를 돌아다니며 알파문구에서 6000원쯤 주고 코팅을 했다. 양면으로 코팅된 카드를 보니 제법 프로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 다 외우면 이런거 필요 없겠지만, 외우고 있다고 해도 시나리오를 쓰다가 깜빡 깜빡 하거든. 그러니까 책상 앞 벽면에 코팅된 카드를 붙여 놓는거다. 글을 쓰는 중간 중간 흘깃 쳐다보며, 내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뭔가 본격적으로 보여서 좋았다. 인터뷰를 한다면 꼭 내 로버트 맥키 스페셜 카드 를 꼭 보여줘야지.
2.
그리고 그 후로부터 1년 반이 지나고, 시나리오 카드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럴거면 왜 만들었을 까. 카페에서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벽에 붙이는건 좀 힘들었어! 라는 핑계를 대면서. 완성된 시나리오로 친구와 두시간 동안 떠들고, 수많은 피드백을 들고 집으로 왔다. 그때 문득 시나리오 카드가 보였고, 68개의 항목 중 지금 쓰고 있는 시나 리오에 영향을 끼치는 카드를 골라냈다. 모든 이야기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친구와 이야기했던 피드백과 비교해보니. 이럴수가. 처음부터 이거 보면서 썼으면 이런 피드백 나올일 없을건데! 이렇게 멍청할수가! 프린트에 코팅에 명함 크기로 자르기까지 했는데, 그걸 보지도 않고 시나리오를 썼다니! 죄송해요 맥키 형님.
3.
이런 글은 일기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그냥 단순히 나의 잘못을 기록하는 것도 아니고. 정체가 뭘까. 제법 진지하게, 내가 쓴 글로 책을 출판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절반 이상은 탈락시킬 생각이다. 이건 필수적으로 탈락이다. 심지어, 지금 억지로 쓰고 있는것도 아니다. 가끔 '뭐라도 하나 올려야 해!' 하고 억지로 쓰는 글들도 있는데, 심지어 지금은 무지 글을 쓰고 싶은데 아직 열두시가 안지나서, 하루에 두개 올리기 좀 그래서 하루가 지나가길 기다리다가 쓰는 글이다. 그렇지만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이라고 재미있고 완성도가 높은건 아니니까. 내 남은 인생의 존망을 걸고 이 글은 출판에 서 제외시켜야지. 마침 번호도 28번이다. 그런데 존망이란 말 적어놓고 이거 비속언가 하고 검색해봤다. 조금 창피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