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을 게 있다면

by 윤동규

0.

예전에 다녔던 뮤직비디오 프로덕션은, 술을 강요하는 회사였다.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저리도 술을 먹이려들까,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감독한테 잘 보여야 입봉작도 넘겨 줄 것이고. 뭐 많이 마시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마시긴 마셔라 정도였으니까. 다만 내 후임으로 들어온 친구가 피부병이 있어 절대로 술을 마시면 안되는 상태였고, 사건은 거기서 벌어졌다. 대판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1.

그때는 사실 누가 봐도 술을 강요하는 측이 악당이고 가해자지만. 시간이 흐르고 생각해보면, 사실 세상은 의외로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어지지 않는다. 선악으로도 아니다. 굳이 나눈다면 보통, 강자와 약자로 나뉘어진다. 강자가 하면 악은 악이 아니고, 가해도 가해가 아닌게 된다. 그게 강자가 되는 이유이다. 지 하고싶은대로 다 하고 살기 위해서다. 강자는 돈이 많아서도, 힘이 센 것도 아니다. 강자의 위치에 올라 가 있어서 강자다. 그 위치는 상대적이다. 노숙자 그룹에서 강자와 삼성전자에서 강자는 그 기준이 다를 것이다. 그 날로 돌아가서, 그 쓰레기 같은 프로덕션에도 감독은 강자의 위치였고. 조감독들은 약자의 위치였다.


2.

술 강요의 부당함을 늘어놓는 그 친구를 보면서, 묵묵히 생각을 해봤다. 이건 괴롭힘이 맞다. 하지만 괴롭힘을 대하는 방법으로 가해자를 탓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진 않는다고 생각했다. 감독은 대드는 막내에게 기가 차서 "동규 너는 내가 잘못한 것 같냐?"라고 물어봤고. 나는 그때 든 생각을 주절 주절 늘어놨다. "뭔가 얻고 싶은게 있어서 이 회사에 들어왔을거고. 그걸 얻기 위해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건 있을거에요. 뭐 술을 마시기 싫은것도 저도 술 안좋아하는데 마시잖아요. 일찍 퇴근하고 싶은데 야근하잖아요. 그냥 그런거죠, 다들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할 수는 없으니...". 나름 은근히 감독을 까는 듯이 말했지만, 감독은 내 대답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래! 얘 봐라! 하며 나를 마치 좋은 예시 다루듯이 치켜세웠다. 나는 바로 다음 주에 일을 그만뒀고, "혼난건 쟨데 니가 왜 그만두냐"며 날 설득했다. 그거야... 이 회사 일이 안 들어와서 나가는거니깐요.


3.

그 날이 생각난 이유가, 최근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얻고 싶은게 있어서 들어온 회사에 실무자들 사이의 부조리한 모습을 마주하고. 이건 부조리해요! 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9개월을 들여 고쳤으면 하는 것들을 슬금 슬금 내밀었다. 하지만 깊게 뿌리 박힌 사내 문화는 고쳐지지 않았고, 결국 나는 임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뭔가 잘 풀리는 것 같았지만, 결국 실무자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됐다. 업무적인 보복을 경험하고, 그날의 술자리가 생각났다. 나는 원하는게 있고 그걸 이루기 위해서 직장을 들어간다. 단지 돈만 많이 벌기 위해서는 더 좋은 자리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과 위치가 있었고, 그 위치를 가기 위해서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했다. 피부병이 있어도 술을 마시는 것 처럼. 아직도 모르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조리가 없는 회사만 찾아 다녀야 하는가. 회사를 차려야 하는가. 부조리에 적응해야 하는가. 부조리를 바꾸려던 지난 날들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술 안 마시는 대신 노래 한곡 부르면 안될까요?"같은 사람이 되어야 할까.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면 응당 그럴 것 같다. 나는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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