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힘을 주어 쓰는 글은, 아이러니하게도 짧고 담백하다. 필히 그러하게 된다. 얼마나 많이 늘어놓느냐가 아닌 얼마나 많이 쳐내냐의 싸움이다. 좋은 글은 경제적인 글이다. A를 이해하기 위한 BCDEFG따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A면 족하다. Z까지 쓰고도 모잘라서 가나다라를 덧붙이는 나에게. 힘을 주어 쓰는 글은 1년에 한 페이지도 벅차다. 기껏 쓴 글을 왜 퇴고해? 얘도 얘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구.
1.
그렇지만 아무리 이런 나라도, 글이 지면에 실린다거나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힘을 주게 된다. 최근에 가장 힘을 주어 쓴 글은 전 직장의 잡플래닛 리뷰인데, 한 인간에 대한 역겨움과 경멸이 글의 원동력이 되었다. 결과적으론 꽤 마음에 드는 올해의 글 수준의 리뷰가 완성되었는데, 이건 조금 곤란하다. 미워하는 마음이 동력이 된 작업은 필히 불쾌함을 가져온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심수봉씨도 세번이나 강조했다. 나의 1년에 한번도 힘든 힘을 주어 쓰는 글이, 미움에 가득찬 글이라니. 엉엉. 나는 왜 그렇게 헛된 시간을.
2.
그러다가 교묘하게 피해가는 방법을 떠올렸는데. 요는 방법의 문제다. 대다수의 직장인들과 대학생들이 잘 써먹을 수 있는 변명인데, “나는 그 것을 표현하는 방법 자체를 사랑한다”라는 방향이다. 원하지 않는 해괴망측한 음악이라고 해도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행복이에요 라며 대충 넘어가는 방식인데, 디테일을 뭉개고 더 크고 원대한 목표가 있는 것 처럼 위장하기에 아주 용이하다. 그래 그렇겠지. 범죄를 저질러도 나는 삶을 살아가는데에 가장 큰 가치가 있다고 해버리면 되니까. 이 얼마나 편한가.
3.
결국 미움으로 가득찬 글을 썼지만. 나는 그 미움을 얼마나 해학적으로 잘 표현하느냐에 집중하기로 했다. 1년에 몇 안되는 힘을 주어 쓴 글이 누군가를 고발하고 욕보이며 얻는 자기 위안이 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변명은 다행히 잡플래닛 쪽에서 적합하지 않은 리뷰로 판단.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글이 되어버리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원본 없는 변명거리라는 점에서 이 글의 가치가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올해의 두번째 힘을 주어 쓴 글이 된 것 같아서 유쾌했다. 다행히 글을 끝내기까지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다. 이런 글을 더 많이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