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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것과 만들어진 것을 보는 것의 차이는, 만드는 사람만 알 수 있지 않을까. 영화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해야 하는가. 물론 좋은 영화는 좋다. 하지만 좋은 영화란 것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조금 바꿔 표현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재미없는 영화도 잘 만들어졌다면 좋아하는가? 여기까지 오니까 조금 명쾌하게 정리된다. 나에게 재미없는 영화는 잘 만들어진게 아니다. 너한테 하는 소리에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1.
어쨌든 기준을 재미로 잡으면, 조금 기준이 모호해진다. 어둠속의 댄서가 맨하탄 살인사건보다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라스 폰 트리에는 우디 앨런보다 영화를 못 만드는 사람인가? 결국 재미란 것은 "무엇에 재미를 느끼는가"라는 기준을 개개인마다 따로 적용시켜야 하고, 그렇기에 몹시나 개인적일 수 밖에 없다. 최근에 펀치 드렁크 러브를 시큰둥하게 봤는데, 촬영과 미술에는 드문 드문 감탄하기도 했다. 시나리오적인 측면에서 시덥잖음을 느끼거나, 혹은 의도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일거다. 결국 난 영화를 이야기로서 소비하고 있고, 그건 소설이나 드라마, 만화도 마찬가지였다. 퀸즈 갬빗은 7화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도중에 때려치웠을거다. 잘 찍고. 예쁜데. 별로 매력적인 이야기는 아니니까. HIMYM은 벌써 시즌 8이 다가와도, 전혀 질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야기를 잘 쓰니까. 시트콤의 호흡으로서 캐릭터를 탄탄히 구축했으니까. 만화로 보자면 그림체를, 소설로 따지자면 문체를, 영화로 따지자면 촬영을 중요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명백한 직무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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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무슨 공무원도 아니고, 각 매체마다의 문법이 있다는 것 쯤은 안다. 나름대로 공부 좀 했다구요. 결국 그림, 문체, 촬영 모두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버드맨이 원테이크 기법을 활용하지 않았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고, 칠드런 오브 맨의 하이라이트 장면도 단순히 우리 어렵게 찍었다! 뽐내기가 아니다. 애니메이션들은 말 할 것도 없다. 기술이 곧 이야기를 받쳐준다. 그러니까 그렇다고 내가 뭐 그런걸 무시하는게 아니고. 그냥 재밌는 만화는 연습장 귀퉁이 찢어서 그리고 휴대폰으로 찍어 올려도 재밌다는 얘기다. 그리고 재미없는 만화는 제 아무리 세계 최고의 고수들 몇 명이 달라붙어서 몇년 그린다고 해도 재미가 없다. 이 재미라는 코어는, 상당히 많은 것들에 의해서 완성되지만. 반대로 말하면, 코어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것들이 들러붙어도 흩어질 뿐이다. 이미지가 나열될 뿐인 일러스트집, 뮤직비디오, 패션 필름을 떠올리면 쉽다. 뭐 그런 것들도 간간히 황홀하게 보지만. 재미의 영역은 아니지 않을까.
3.
처음으로 돌아가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만든다. 사랑이 곧 여태껏 말한 재미라고 치면, 재미있는 작품을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만드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진 것을 보는 것으로 이어지는 흐름.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재미있지 않는 작품을 보는 것은 조금 다른 연결점이다. 만드는 것을 사랑하고, 더 좋은 것을 만들고 싶은데. 나의 실력이 부족하고 방식이 부족하여, 세상의 "장인"들은 어떤 것들을 만들었을까. 교과서처럼 배우고 싶고 지식을 습득하고 싶어서 손을 대는 영화들. 나는 이걸 통틀어 <펠리니류 영화>라고 부르는데, 아직 단 한번도 펠리니의 영화를 재밌게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히치콕류 영화나 고다르류 영화는 여기에 못 들어간다. 그건 공부도 하면서 재미도 느끼잖아. 펠리니는 철저하게 공부만 해야 한다. 그러니까 당연히 손이 안 가고, 보다가 3번이나 잠들었지. 끝까지 본 것 자체를 칭찬해줘야 하는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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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정말 쓸데없이 길었는데. 결국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은 좋아하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은 싫다는 얘기다. <LP 매니아> 라든지, <AMY>, <엔딩 노트>, <프랑스 다이어리>같은건 보지말라고 애원해도 볼거다. 하지만 액트 오브 킬링이 제 아무리 잘 만들었다고 해도, 이런 영화를 찾아서 보고 싶진 않다. 모처럼의 점심시간에 영화를 볼까 하다가, 도통 다큐멘터리 영화에는 손이 가지 않길래. 한번 변명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