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시간 활용법

by 윤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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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시간을 못 가진다. 일하거나 쉬거나, 놀거나의 삶이다. 노는게 애매한 시간 아니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노는 시간은 노는 시간이다. 쉬는 시간 역시 쉬는 시간이다. 쉬는 시간에 짬을 내서, 노는 시간을 줄여서, 혹은 뭐 자는 시간을 아껴서 이런 선택은 나와 맞지 않는다. 한 평생을 체험하며 느낀거니깐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그래서 선택한게 먹는 시간이고, 점심시간 한시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벌써 이 다짐이 2년이나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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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이후 점심시간 한시간. 최소한 하루에 한시간은 애매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어느새 꽤 큰 의미가 되었다. 오히려 하루종일 애매할 수 있는 주말이나 휴일은 오히려 한시간도 애매해지기 어렵다. 애매한 시간은 의외로 까다롭다. 너무 늘어지고 나른하면 쉬는 시간으로 넘어가고, 너무 타이트하게 활용하면 어느새 일하는 시간이 된다. 우리는 애매한 시간의 조건을 한번 더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사실 나도 지금 막 이름 정한거라 무슨 조건인지는 모른다.​


2.

먼저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안된다. 그래서 애매한 시간에 어떤 영상을 보는건 위험하다. 다 보고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지는 영화도 많기 때문이다. 어제 본 어디갔어, 버나뎃이 그 경우였다. 다행히 초반 한시간은 꽤 괜찮았지만, 이틀에 나눠 봤다면 둘째날엔 후회했을거다. 그렇다면 뭔가 체험하기보단 뭔가 만드는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괜히 만들었어, 하는 작업은 있어도. 괜히 만드느라 시간 썼어, 하는 시간은 없다. 어떤 쓸모 없는 작업도 작업을 만드는 나는 남는다. 그럼 조심스럽게 첫번째 조건은 무언가를 만드는 시간, 으로 하자.

3.

하지만 그러다보면 손쉽게 일하는 시간이 되어버린다. 가끔 정말로 일하는 시간으로 쓸 수는 있지만, 그게 기본이 되어서는 안된다. 애매한 시간에는 무언가를 만들더라도 그게 일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다보니 편집이나 촬영, 디테일한 작업은 피한다. 조금 더 대충 해도 되고. 조금 더 무의미한 작업. 어디에 쓸지 애매한 것들. 목적을 가지지 않고 시작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이 과정이 어딘가에는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있는 것. 대충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같은 무게감. 그러다보니 사실 제일 많이 하는게 글쓰기이긴 하다만. 이딴 글은 20분이면 다 쓴단 말이에요. 40분동안 뭐 해 이제.​


4.

그렇다해도 글을 쓴다, 라는건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하루종일 해도 피곤하지 않은건 말하기도, 듣기도 아닌 쓰기다. 굳이 순위를 매기면 1위가 쓰기, 2위가 말하기, 그리고 5824위 쯤에 듣기가 있겠지만. 혼자 구석에서 음침하게 중얼중얼 거릴 수는 없으니까. 최소한 쓰기는 일이라고 느껴질 걱정은 없다. 오래 전부터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직업의식의 탓이 아닐까 싶다. 촬영이나 편집은 괜히 이건 나의 직업이라는 생각에 피곤해지고. 물론 만화나 그림은 직업도 아닌데도 힘들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보통 사람보다는 잘 그리잖아. 하지만 글은 아무런 무게감 없이 휘갈길 수 있다. 심지어 싫어하는 맞춤법은 의도적으로 틀린다. 외장하드도, 아이패드도, 애플 펜슬도, 마우스도 필요없이 노트북 하나면 된다. 메모장이든 블로그든 브런치든 어디에 적든 상관 없다. 쓰다가 아 오늘은 별로네, 하면 대충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 하고 끝내도 된다. 누가 수정을 요구하거나 이걸로 돈 한푼이라도 버는 일 없다. 그럼 뭐, 소설이라도 쓸까. 그건 아무리 애매한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좀 지나치게 쓸모 없지 않아? 그게, 뭐 쓸모 없는걸 만드는건 맞는데. 최소한 남들이 봐도 상관 없어 정도는 되어야지. 남들이 안 봤으면 좋겠어는 좀... 왜 굳이 시간 내서 창피한 결과물을 만드는거야.



5.


그러면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시나리오를 써보자. 그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글만 보면 구린데 이걸 영상으로 찍으면 또 다르겠지"하는 착각을 심어다 줄 수 있지 않을까? 꼭 찍을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안 찍을 것 같은 이야기를 쓰자. 괜히 썼다가 진짜로 찍으면 일한 것 같잖아. 점점 내가 뭘 하려고 글 쓰는지 깜빡했는데, 애매한 시간 어떻게 활용할까가 주제였잖아. 20분은 에세이를 쓰고. 지금은 35분 넘어가긴 했지만. 대충 반은 에세이, 나머지 반은 시나리오를 쓰자. 거창하게 말해서 시나리오지, 투 두 리스트로 표기해도 기분 안나쁠 정도 있잖아. 아니 아니 중요한건 내용이 아니야 의도야. 어떤 내용을 적느냐 까지는 터치 안할게. 대신 그 내용이 하등 쓸모 없어야 할 것. 나중에 우연히 쓸모를 발견하는 것 까지는 봐줍니다. 대신 의도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지 말자고. 그럼 일하는 시간으로 분류할거니까 명심하세요. 그렇다고 너무 쓸모 없는 짓만 하면 노는 시간으로 분류할거고. 처신 잘하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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