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대뜸 이야기하는거지만,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의 여성 히어로들이 뭉치는 장면은. 한마디로 말해서 쓰레기 같았다. 조심스러운 이야기라서 주둥이를 닫고 있었지만, 필름클럽 엑스맨 - 다크 피닉스편을 듣다가 김혜리 기자의 이야기에 힘을 얻어서 말해본다. 그건 정말 쓰레기 같았어.
1.
결국 메세지는 개연성을 바탕으로 던져진다. 옳은 말이라고 해서 아무 곳에서, 아무 타이밍에나 뱉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고깃집에서 비건 시위를 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만의 주제를 가지고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찬물 끼얹기"가 핵심이고, 그걸 훌륭하게 잘 해냈다. 그 메세지가 아니꼽고 말고는 둘째 치고. 메세지를 던지는 자의 자세라고 본다면. 그런데 이건 뭔가. 여성 히어로들이 왜 뭉쳤는지. 그녀들이 뭉치게 된 이유나 계기, 아주 미약한 일말의 계연성 같은건 어디에 두고 왔는가. 일단 찍었는데 편집됐나? 말도 안된다. 3시간짜리 영화에서 일부가 편집될 장면이라면 아에 빠졌어야 한다. 넣을거면 온전히 넣거나. 그 거지같은 일본씬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더만. 이건 그냥 이렇게 찍었고, 이렇게 내보내려고 했던거다. 말하자면 메세지를 던지게 된 과정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메세지를 던졌어"라는 사실관계를 위한 장면이다.
2.
너무 깔게 많아서 뭘 먼저 까야 할지 헷갈릴 정도다. 일단 메세지 그 자체를 놓고 보자. 직전에 나왔던 캡틴마블의 경우엔 솔로 영화여서 그런지 단순하고 명료하게 메세지를 던진다. 난 너에게 증명할 필요가 없어. 주드로가 그렇게 추하게 망가지면서 영화가 차근 차근 쌓아왔던 메세지다. 듣는 순간 뭔가 팍! 하고 오지 않는가? 아이들의 진열장에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맨 말고, 캡틴 마블 피규어가 진열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썩 훌륭한 영화라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영화 전체가 메세지를 위해 존재하고. 메세지 역시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관계성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건 캡틴 마블 뿐만 아니라 모든 잘 만든 영화들. 특히 히어로 영화 같이 타겟층이 넓은 영화일수록 한방에 와닿기 마련이다. 그럼 엔드게임에서 여성 히어로가 모이는 장면은 무슨 메세지를 던질까. 우리는 여성이고. 우리도 존나 쎄고. 우리도 뭉쳤다! 이 이상의 뭐가 있는데. 심지어 잘 보면 가모라도 있다. 넌 여기 왜 있는데! 메세지의 질이 너무 형편없어서 민망할 지경이다. 그러다가 합리적으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메세지가 형편없거나 구린게 아니라. 그냥 없는게 아닐까? 여성 히어로가 뭉치는 장면은 필요하지만. 뭉치는 계기나 과정을 넣진 못하겠고. 그래서 아무런 맥락 없이 장면만 존재하게 된건가?
3.
그럼 좀 더 근본적으로. 왜 이런 장면이 들어갔는지를 생각해보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의심이 되는 부분은 역시 눈치가 아닐까. 요즘 이러이러한 이슈가 민감하고, 많은 사람들이 민감해 하는 부분이니까. 하나 넣어주자. 그렇다고 국물 전체에 스며들게 넣기는 좀 그렇고, 건더기 하나만 큼지막하게 존재감 있게 띄워 주자. 그럼 사람들이 이 건더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맛도 뭐 저것만 빼면 크게 바뀔 것 없겠지. 그리하여 엔드게임이라는 치즈 케이크에 대패 삼겹살이 한 조각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고기 매니아들이 좋아하는건 넣었지만, 이따위 것을 보고 좋아하는 매니아들이 있을까? 놀랍게도 뽕에 차오른 듯 최애 장면이라고 들썩거리는 분위기가 제법 있더라. 아. 이래서 이 장면을 넣었구나. 어떻게든 "니들 얘기 반영은 해볼게"같은 식의 서비스 컷이라도, 그게 제 아무리 맥락이 없고 심지어 비꼬는게 아닐까 싶은 정도의 완성도지만. 그게 통하는구나. 이렇게 되면 아까의 치즈케이크 대패 삼겹살의 예시를 수정해야겠다. 케이크 포장 안에 든 돼지고기 숙주나물 볶음이라고 보는게 맞겠네.
4.
이런 이야기에 흔히들 하는 변명이. "그만큼 여성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장면이 없었다"라는게 있다. 나도 안다. 델마와 루이스는 1991년 영화지만, 아직도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에 빠지지 않고 꼽힌다. 이제 캐롤이 힘낼게요 조금 쉬세요. 30년째 달려왔잖아요. 하지만 그 수가 적다고 해서 아무거나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먹을건가? 양반들은 제 아무리 굶어도 먹다 남은 고기 한덩이에 고마워하지 않는다. 어딜 먹다 남은걸 줘! 에잉 쯔쯔, 하고 밥상을 발로 차버려야 한다. 당장 델마와 루이스나 캐롤만 봐도 그렇다. 이들은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이야기에 기생하여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태생부터 독립적인 본투비 여성 서사다. 이런 영화가 더 많아져야 해!를 외쳐야지, 이런 장면이 더 많아져야 해!라는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훌륭한 퀴어 영화들이 있는데 굳이 쌍화점의 조인성 주진모 장면에 환호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아니 그냥 좋을 수는 있지. 좋다는걸 뭐라하는건 아니다. 애초에 유치할 정도로 뽕 차오르려는 의도로 만든 장면이니까. 어벤져스 어셈블 이후의 장면이라서 그렇지. 배치가 조금만 영리했어도 훨씬 더 좋은 장면일수도 있었다. 그치만 세상의 거의 모든 창작물들이 그렇듯. 좋아하는 것일 수는 있지만. 좋은 것은 다른 이야기니까.
5.
결국 남성 위주로 이루어진 이야기에 보조적인 역할로만 등장했던 캐릭터들이 맥락 없이 뭉쳐서 "나도 이 문제에 관심이 있어!"라고 외치는 도구로 쓰여진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괘씸하다. 이건 분노해야 한다. 하지만 분노하는 사람도, 불쾌해 하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좋아하고 흥분하고 열광하는 사람들만 보이는데다, 이 장면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무조건적인 반 페미니스트로 몰고 가는 분위기까지 만들어졌다. 그래서 1년이 넘게 침묵하고 있었지만. 김혜리 기자님의 의견에 용기를 얻어. 이렇게 말해본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그 장면. 진짜 쓰레기 같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