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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불편함에 대한 허세가 있겠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확실히 불편함의 허세에 휩싸이는 가짜 아날로그 매니아들이 상당수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내 경우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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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극단적으로 가면, 타자기로 글을 쓴다거나 종이와 펜으로 글을 쓴다. 필기구는 만년필을 사용한다. 음악은 씨디 플레이어를 고집하거나, 테이프나 엘피를 듣는다. 최첨단이어야 당연한 휴대폰의 경우, 스타텍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고 블랙베리 9900 모델에 자꾸만 눈이 돌아갔다. 사진은 당연히 필름 카메라에, 6미리 디브이 테잎을 넣어 사용하는 캠코더도 가지고 있다. 동네 고물상에 가면 비디오 테이프 데크를 항상 찾아보고, 화면이 왜곡되는 브라운관에 멋을 느낀다. 전자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며, 다운로드보단 팩을 넣어서 이용하는 게임기를 좋아한다. 식물을 사랑하고, 패브릭 오가닉 등의 단어를 좋아한다. 스마트나 최첨단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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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정작 글은 맥북. 그림은 아이패드. 카메라는 2017년 발매된 캠코더를 쓰고 있으며, 10년째 디지털 기기로 편집하고 있다. 휴대폰은 아이폰, 그 전에는 갤럭시나 옵티머스 등을 썼었다. 음악은 벅스 뮤직.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해서 듣는다. 사진은 휴대폰으로 찍고 바스코로 보정하는데, 가끔씩 소니의 미러리스로 촬영한다. 화면에 왜곡은 커녕 13인치는 너무 작다며 43인치 4케이 티브이를 샀다. 일기는 손으로 쓸까 생각했다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블로그에 쓰기로 했다. 집에 있는 닌텐도는 대기모드임에도 배터리가 방전되어 있다. 모처럼 양재에서 사온 식물은 반년만에 죽였다. 최근엔 물리키가 들어있는 전자책을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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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이러는걸까요? 누구보다 편리하고 빠르고 쾌적한걸 원하면서, 왜 자꾸만 아날로그의 멋을 따라가려 발버둥치는 걸까요. 우리는 그의 불편함을 향한 허세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가지 단서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소수 문화에 대한 동경이 아닐까 싶다. 모두가 아날로그를 쓰던 시절에는 첨단 기기가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무엇이 되었던,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소수가 되었을때 특별함을 느끼고, 그것이 멋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렸을적의 향수도 있다. 라디오에서 패닉의 달팽이가 나오길 기다리며 구몬 테이프에다 나만의 베스트 앨범을 만들거나. 아버지가 형이 태어날때 산 필름 카메라. 그것으로 찍은 가족사진. 그 시절 읽었던 책의 질감들. 가족들과 주말에 비디오 테이프로 빌려봤던 다이하드3, 스피드, 인디아나 존스. 혹은 그 시절의 디자인. (조금 무책임한 말이지만)감성, 혹은 색감이 아닐까. 그런 것들이 지금 시대의 편리함과 싸우며 하나 둘 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모든 음반이, 모든 책이 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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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라고 아이폰 메모장에 메모했다. 맥북에 동기화되어, 메모한 것들을 맥북의 메모장 으로도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역시 편리함이란 놀라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