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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부터 암스테르담까지는 창밖이 내내 어두워서 카메라를 꺼낸적도 없었다.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몇개 찍기는 했지만 '이걸 찍어서 어디 써'라는 생각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아침이 밝아오고, 드디어 창 밖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우릴 반겨준 풍경이 돌로미티 공원이었다. 사실 속으론 '그냥 평범한 산맥 아닌가'싶었지만, 미소가 너무 좋아해서 맞장구를 쳐줬다. 원래 뭐가 됐든 같이 좋아하는게 확실히 기분이 더 낫다. 심지어 이제 부부이지 않은가. 같은데에서 기뻐하고 같은데에서 들뜨자. 미소는 심지어 '우리 돌로미티 공원도 갔어!'라며 여행 리스트에 은글슬쩍 집어넣었다. 그그래 우리 돌로미티 공원도 갔지.
캐리어를 무사히 찾고 본섬으로 이동하는 패리 항구로 향했다. 여행 내내 모든 소통과 티켓 구매는 미소가 담당했다. 나는 무거운 짐을 들고 나르고, 미소는 언어가 필요한 소통을 담당하고. 힘과 지식. 탱과 딜. 창과 방패. 밸런스가 잘 맞는 역할 분담이군, 이라고 생각하며 선착장에 도착한다. 당시(2021년 10월 기준) 이탈리아는 길에서 굳이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정책이었는데, 이동 수단이나 실내에서는 마스크가 필수였다. 모처럼 공항에 내려 마스크에서 해방됐지만, 패리를 타자마자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이 글을 다시 읽을 시점에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에서 좋았던 것들이 참 많이 있지만, 그 중 확실하게 한 구역을 차지하는 것은, 마스크로부터 해방되는 순간들이다. 사람들이 다같이 마스크를 벗고 웃고 떠드는걸 보면 여기가 꿈인가 싶다. 몇년이 지나도 마스크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면, 더더욱 이때의 기억이 더 소중해질 것이다. 잠시나마 마스크로부터 해방되었던 날들의 기록이다. 부럽지? 부럽지? 안 부러운 세상이 왔으면.
난데없이 카메라 이야기를 좀 하자면. 후지필름 X-T3, 16-80 F4 렌즈, 배터리 4개와 1테라 SSD 외장하드를 준비했다. 사실 파나소닉 DVX200이라는 캠코더를 가지고 가려고 했으나, 크기가 "세상 사람들! 날 봐요 날! 나에게 집중해요!"라고 외치는 크기여서, 괜히 방송국이라 오해를 사 촬영비를 요구하거나 입장을 거부당할까봐 겁이 나서 포기했다. 애초에 신혼여행에서 쓰고 싶어서 산거기도 한데... 덩치 큰 장비는 슬픕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안 가져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백팩에 캐리어 두개. 카메라까지 매고 가니, 그 가벼운 미러리스조차 무게감이 상당해서 <캐리어 끌 때는 휴대폰으로만 촬영>이라는 나름의 룰을 정하기로 했다. 힘을 쓸 때에는 힘을 쓰는 데에만 집중한다. 괜히 '캐리어 끄느라 못 찍었어'하고 아쉬워하면 여행 내내 즐거운 기분을 유지하기가 힘들 것이다. 아에 백팩 안에 집어넣고, 숙소에 짐을 놓고 난 후에야 꺼내는 식으로 타협을 했다. 물론 좋은 풍경은 예고하고 찾아오진 않지만, '아무것도 놓치지 않을거야'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적당히 놓치고. 적당히 느슨하게.
그런 주제에 베네치아 본섬으로 가는 패리에서만 100기가가 넘게 찍었다. 사실 배에서 흔들리고 불안하고, 딱히 빛이 예쁜 시간도 아닌 한 낮이었음에도. 이탈리아에 도착했다는 흥분에 도취되어 쉴 새 없이 렉 버튼을 눌러댔다. 에세이를 쓰면서 동시에 영상 편집을 하는데, 첫날에 찍은게 전체 여행의 1/5이나 된다. 결국 나머지 여행동안 화질을 낮출 수 밖에 없었는데, 다음 여행때는 꼭 3테라는 준비해서 가기로 했다. 베네치아 본섬은 공항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선착장에는 호스트 로베르토가 우리를 반겨주었고, 캐리어를 같이 끌어주며 숙소로 안내해줬다. 베네치아 본섬의 첫인상은 '뭐 이렇게 공사를 많이 해?'였다. 공사장 한 복판에 떨어진듯한 소음들로 흥분되었던 마음을 급히 소화시켜 주었다. 새로운 건물이 올라간다기보단 낙후된 건물의 보수공사로 보이지만, 쉽게 말해 깼다. 다 사람 사는 도시구나. 오히려 편안해진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공사맨.
우리는 코로나 특수로 단 돈 15만원에 아주 괜찮은 위치에 숙소를 얻었다. 미소는 베네치아를 몇번이나 오면서도 단 한번도 본섬에서 숙박한적이 없다고 한다. 하긴 1박에 기본 40만원이었으니, 나라도 엄두가 안 났을 것이다. 비행기표 값도 그렇고, 여러가지로 저렴하게 여행을 즐기는 듯 했다. 열쇠를 6바퀴나 돌리고 나서야(유럽에는 다들 수상할만큼 열쇠를 오래 돌린다) 숙소 문이 열렸고, 우리는 감탄한다. 정말 그 돈만 받아도 되겠어요? 숙소 퀄리티를 보아하니 지금 반값 세일 중인거 같은데, 할인 행사가 끝나기 전에 한번 더 찾아와도 될까요? 아쉽게도 영어를 못해서 혼자 중얼거리긴 했지만, 대신 미소가 멋진 숙소에 대한 감상을 전해주었다. 식탁에는 웰컴 와인과 감자칩, 찬장에는 에스프레소 캡슐이. 화장실에는 고풍스러운 세면대와 욕조, 그리고 큰일을 본 후 엉덩이를 닦는 용도의 낮은 세면대도 있었다(한번도 써본적은 없지만, 이탈리아의 어떤 숙소를 가도 이 엉덩이 세척장은 존재했다). 커튼을 열자 베네치아의 환상적인 뷰가 펼쳐졌고, 아니나 다를까 그 중에 하나는 공사중이었다. 공사 못해서 죽은 귀신들의 환생 같았다.
여러가지 지켜야 할 룰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짐을 풀고, 몸을 가볍게 한 이후 얼른 숙소 밖으로 나갔다. 참 아이러니한게, 멋진 숙소일수록 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숙소에 있는건 또 아깝다. 결국 제 아무리 멋져봤자 밤에 잠 자는 용도로만 사용한다는 소린데, 그럼 그냥 싸고 위치 좋은 숙소를 고르면 되는거 아닐까? 어림없는 소리. 배낭여행이 아니라 신혼여행이다. 왜, 도미토리라도 가자고 하지? 무엇보다 여행 첫날, 이탈리아의 향기에 도취된 우리에겐 그런걸 따져볼 새가 없었다. 셔츠 안쪽으로 배를 둘러 착용하는 지퍼가 달린 동전 지갑, 고무줄 목걸이로 된 휴대폰, 백팩에는 혹시 모를 여권을 깊숙히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여행 한달 전부터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미소의 경고 덕분이었다. 정작 미소는 목걸이 형태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는데, 그러다가 소매치기 당한다고 하자 사진 찍을때 안 예쁘다고 빼고 다닐거라고 했다. 난 백팩에 걸었던 자물쇠를 슬그머니 떼서 가방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