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율의 산 마르코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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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규

우리는 먼저 문을 열고 앞으로 죽 걸어갔다. 이 길이 바로 숙소에서 창 밖으로 보이는 뷰였는데, "숙소에서 보는 길의 끝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라는게 이유다. 숙소에 이틀이나 머무르는데, 창 밖의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길을 가다보면 다리를 하나 건너고, 직진 혹은 우회전의 갈림길이 펼쳐진다. 베네치아 마지막 날 밤에 알게 됐지만, 우회전 후 1분만 걸어가면 대형 슈퍼마켓이 나온다. 이 가까운걸 놓쳐서 이틀 내내 15분 거리의 구멍가게를 이용한다. 심지어 로베르토가 여기에 슈퍼가 있다고 말해줬는데도. 왜, 전자기기 사면 메뉴얼 절대 안 읽는 타입 있잖아. 그게 나다. 그리고 미소는 그런 나를 믿고 따랐다.


믿음의 결과는 처참했다. 우리는 두시간이 넘게 적당한 식당을 찾지 못하고, 베네치아의 풍경만 즐기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즐겼다지만, 아침 기내식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눈에 보이는 아무 곳에라도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싶었다. 비단 여행지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식당을 고르는건 제법 큰 스트레스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걸 먹을거야 하고 다짐하지 않았어도, 원하던 식당이 영업이 끝나거나 한참을 길을 헤매고 나면 "무조건 맛있는거 먹는다"라고 바뀌기 마련이다.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다. 그래서 사실 가게 이름이나 인테리어, 메뉴나 가격만 보고 고른 식당이 만족도가 높다. 어떤 기대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대가 가득하면 어떤 식당을 들어가도 만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 어지간한 확신이 들기 전엔 식당을 들어가기가 꺼려지고. 이 악순환은 반복된다. 여기? 아니 여기? 아니 여기? 아니를 7번쯤 반복하고 나서야, 미소가 구글맵으로 찾은 피자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베네치아에서. 정확히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먹은 음식은 파코의 피자집이었다. 마치 터키 아이스크림 가게처럼 피자와 파스타를 테이크아웃 해주는 가게였고, 가게엔 파코 대신 흑인 청년 혼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파코네 직원은 우리가 허니문이고,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는 소리를 듣자 바로 오징어 게임 잘 봤다고 한다. 사실 열에 아홉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오징어 게임 이야기를 꺼냈는데, 나는 솔직히 이걸 언급하는게 맞나 싶다. 차라리 기생충이나 BTS라면 역사적으로 남는 이름이겠지만. 오징어 게임이란 이름이 남는 역사 따위 존중하고 싶지가 않다. 결국 "스퀴드 게임~!"이라는 호응에 늘 진동 웃음으로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메뉴 이름이 정확하지 않은 버섯 피자와 라비올리 바질 파스타를 주문했고, 놈은 "리얼리? 라비올리?"라며 눈이 희둥그레졌다. 아니 그렇게 이상한 조합이면 대안을 추천해주던가. 난 괜히 지기 싫어서 원래 이렇게 먹는것 처럼 애써 당당하게 굴었다.


베네치아의 이틀동안 애용했던 15분 거리의 숙소에서 햄과 치즈를 사고, 아침에 내렸던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미소가 광장을 가리키며 "저기가 산 마르코 광장이야"라고 했고, 나는 뭐 별거 없구만 하고 시큰둥하게 굴었다. 가판대와 기념품 가게가 몇 몇 있고, 광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좁고 평범한 길이었다. 여행이나 해외 랜드마크에 관심이 없는 나도 들어볼 정도인 산 마르코 광장이 이정도니. 이번 여행 별거 없을수도 있겠구만. 우리는 찰랑거리는 부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비행기에서 남은 미니 와인과 마트에서 산 와인을 마셨다. 단언컨데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알콜 쓰레기보다 30배는 더 여행을 잘 즐길 수 있다. 이탈리아의 다양하고 값 싼 와인들은 미소에겐 축복을. 나에게는 이마트 와인보다는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를 안겨줬다. 묘하게 바닥이 젖은 것 같기도 하고, 나름 슬슬 2차로 옮기자며 산 마르코 광장 옆의 돌 벤치로 향했다. 미소에게 양해를 구하고 해질녘의 광장을 촬영했다. 뭐 빛이 예쁘니깐 좀 봐줄만한 것 같기도 하고. 그치만 난 오히려 광장보다 여기까지 걸어오던 골목 골목이 더 매력적이었다.


이제 정말 해가 질 것 같은 때에. 미소는 남은 와인을 다 마셨고, 왔던 길과 다른 길로 숙소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예쁘고 좋은 길이었지만 역시 여행와서 익숙한 길만 다닐수는 없지. 가판대와 기념품 가게를 지나 골목을 조금만 지나가고 나니, 세상에나. 두 눈으로 채 담기지도 않을 풍경이 펼쳐졌다. 겨우 여행 1일차였지만 나는 확신했다. 여기는 여행을 통틀어서 베스트 5에 드는 장소일거야! 그곳은 정말 웅장하고 환상적이었다. 끝에서 끝까지 5분은 걸어야 할 것 같은 광장에 사방을 삥 두른 매력적인 건물 양식. 사이 사이의 레스토랑에선 피아노가 연주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가족들과 연인들과 이 사랑스러운 공간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저 멀리 시계탑에선 타이밍 좋게 종소리가 울렸고, 듣자 듣자 하니 몇번이나 울리는거야 싶은걸 보니 아마 오후 6시를 뜻하는 18번의 종소리가 아니었을까. "미소야 여기가 어디야?", 미소는 나의 리액션에 만족스러운 듯 자신있게 말한다. "여기가 산 마르코 광장이야!".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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