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 (tool)

by 윤동규

1.

장비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촬영이나 조명, 사운드 어느 것 하나 주력 분야가 아닌데. 그건 그거고, 장비병은 장비병이라고. 정작 제일 자신있어 하는 편집 장비는 그냥 대충 안끊기면 좋은거지 뭐, 하며 쓰고 있다. 프로그램도 장비라면 플러그인이나 각종 이펙트를 좋아하긴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브런치, 네이버 블로그, 스크리브너, 페이지, 메모 등 일종의 <툴>을 좋아한다고 봐야겠다. 그렇다고 <툴>의 장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너 툴 정말 잘 다룬다!"라는건 내 입장에선 전혀 칭찬이 아니다. 오히려 툴을 잘 다루는거 말곤 뭐 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감동적인 글을 썼는데 글씨를 칭찬 받는 느낌이다. 그러니 툴에 너무 매몰되지는 않되. 세상의 모든 툴에 관심이 있고, 곁에 두려고 노력한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터 그랬었지 내가.


2.

어렸을때는 문방구에서 산 연습장에 그림을 그렸다. 처음엔 아무 종이에다가 그리다가, 점차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일단 표지가 선택의 기준이 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가장 좋아했던 연습장은 곰돌이 푸 연습장이었는데, 옆에 스프링 처리가 아주 깔끔했다. 글을 쓰는데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높이. 휘거나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 재질. 두께도 적당했고, 너비도 아주 알맞았다. 지금은 후회하지만, 대학교때 쯤 어릴때 그렸던 만화 연습장들을 버렸었다. 흑역사라고 생각했었다. 흑이든 백이든 모두 내 역사다, 라고 생각하기엔 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버리지 못했던게 그 곰돌이 푸 연습장이었다. 안에 그려진 만화는 사실 그저 그랬지만, 정말 좋아했던 연습장이다. 거기에 각종 진하기의 연필이나 볼펜, 잉크와 G-펜을 써보기까지 했지만. 이상하게 샤프를 가장 좋아했다. 이걸로 가장 잘 그려지는군. 샤프이기만 하면 굵기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마 연필과는 달리 일정한 결과물을 내는게 매력적이었나보다. 지금 아이패드와 애플 팬슬을 쓰면서도, 압력에 따라 굵기가 달라지는 설정은 최소화로 쓰고 있다. 타블렛도 써봤지만, 그림이 나타나는 액정과 그림을 그리는 타블렛의 위치가 다르다는 점이 너무 낯설었다. 그러니 아이패드의 등장이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지금은 9할이 유튜브 시청 장치지만, 가끔 그림을 그릴 때엔 샤프나 곰돌이 푸 연습장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3.

그림은 그렇다 치고, 글은 사실 종이에 적었던 추억이 없다. 당신도 악필이 되어봐요. 종이에 글을 쓰는게 평생의 스트레스다. 내가 쓴 글을 내가 못 읽다니. 그래서 한글 97로 같은 반 친구들이 모험을 떠나는 판타지 소설을 쓸 때 부터. 컴퓨터와 키보드는 줄곧 나의 원 툴이다. 맥북 키보드에 만족하는걸 보면 딱히 키감이 예민한건 아니다. 그냥 글을 빨리 쓰고 싶고, 빨리 지우고 싶을 뿐. 깊게 생각하고 쓰지 않는 편이라, 어떨 때엔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마저 생각을 못 따라가 답답할 때가 많다. 글을 못 쓰는 대신, 빨리라도 쓰라는 뜻이겠지. 얼른 쓰레기같이 쓰고, 고치거나 만족하거나. 항상 그러다보니 조금이라도 끊김이 느껴지는 툴을 꺼려했다. 기본 메모 기능이 글이 많아질때 끊기지만 않았어도, 아마 툴에 대한 고민은 없었을 것이다.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아이맥 회사 맥북까지, 어디에 써도 연동이 된다는 점은 분명한 매력이다. 물론 페이지도 아이클라우드를 활용하면 되지만, 메모를 키는 것과 페이지를 키는 것은 무게감이 달랐다. 그러면 아에 더 무거워볼까? 해서 구입한게 스크리브너지만(절반은 김중혁 작가에게 홀려서), 기기간 연동이 안되어서 한 자리에 진득하게 쓰는 글이 아닌 이상 잘 키진 않게 된다. 지금은 브런치에 바로 쓰고 있는데, 네이버 블로그나 브런치 등은 인터넷이 되는 환경에서 써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장 괜찮은 중간값은 페이지가 아닐까. 하지만 아직 이상하게 키는게 꺼려진다.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4.

편집은 프리미어 프로로 시작했다. 사실 정확하게는 에프터 이펙트가 먼저였는데, 에펙을 배우며 자연스럽게 프리미어나 일러스트, 포토샵으로 확장됐다. 당시엔 동영상 확장자를 뭘로 내보내야 할지 몰라서 당시 만든 영상은 죄다 플래시 파일로 저장되어 있다. 파이널컷 7은 첫 직장에서 익혔는데, 사실 프리미어보다 압도적으로 좋아서란 이유는 딱히 아니었다. 그냥 실무로 오래 만져봤기 때문에. 그리고 첫 직장 반년이 넘게 한번도 오류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최소한 편집하다가 꺼지진 않았다. 지금 파이널컷 프로의 자동 저장도 마음에 들고, 라이브러리나 이벤트 같은 개념도 좋아한다. 결국 결정적인 차이래봤자 인터페이슨데, 애초에 이정도까지 애플 제품을 갖춰 놓으면(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아이맥) 굳이 프리미어를 쓰는게 더 힘들다. 더군다나 예전 회사에서 프리미어로 작업한걸 뽑아내는데, 색감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오류가 도무지 해결이 안되어 더더욱 프리미어를 멀리했다.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더 이것 저것 만지기에는 더 좋지만. 나는 그냥 진득하게 편집하고 싶었다.


5.

원래 카메라나 마이크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툴을 꺼냈는데. 툴의 역사란 이다지도 다양하고 오래 되었구나. 문구류에 큰 관심도 없었으면서 문구의 역사 같은 책을 샀던게 아무래도 툴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언젠가 세상의 다양한 툴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 물론 그때 어떤 툴을 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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