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는 1번 트랙을 듣는 와중에도 '다음엔 어떤 씨디 듣지?'하고 고민했다. 듣고 싶은 음악이 넘쳐났고, 음반에 몇백만원을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았다. 샀으면 최소 스무 바퀴는 돌려 들었고, 정말 구린 음반도 다섯번은 들으려 노력했다. 방구석에서 손가락 몇번 튕기면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세계가 탄생했고(심지어 헤이 구글만 외쳐도 노래가 나온다) 무한리필 고깃집 가니까 막상 고기 안 땡기는 것 처럼. 제대로 음악 불감증에 걸려 팟캐스트만 듣는 요즘이다.
2.
새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이름은 <무덤에서 듣기 좋은 곡>이라 정하고,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엄선했다. 나름의 까다로운 기준을 정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플레이리스트를 가다듬었다. <몰린>과 <도착>, <늦가을>과 <더 디테일>은 넣었지만 <나이>나 <결국 봄>, <말꼬리>나 <이별의 온도>는 빠졌다. <오르막길>의 경우엔 너무 지나치게 많이 들어서 뺐다. 그렇게 엄선해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나니, 이게 뭐람. 암만 해도 손이 안간다. 차라리 쇼미더머니 베스트가 더 끌린다. 나는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사람이 된건가요.
3.
나름의 고민을 한 결과. 결국 음악은 음반으로 들어야 한다에 다다랐다. 나도 베스트 앨범을 사진 않아요. 곡 순서나 감정선을 고민하며 만든 정규 음반이 좋습니다. 미니 앨범, EP 앨범도 괜찮아요. 너무 빨리 끝나서 아쉽긴 하지만 고민이 느껴지는 음반은 모두 좋습니다. 곡을 듣고 싶은 때도 있어요. 중학교때 임창정 <낮에>라는 노래를 한곡만 더 듣고 가야지, 하다가 학원을 빼먹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곡이 모자라진 않아요. 좋은 곡은 언제나 넘쳐 흐릅니다. 세상에 좋은 곡은 정말 너무 많아요, 이 글 쓰는 동안도 12곡은 넘게 나왔을걸요. 하지만 좋은 음반은 드뭅니다. 갈수록 더 드물어져요. 곧 음반이 무의미한 세상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한곡 반복 혹은 셔플로만 음악을 들을겁니다.
4.
위기감을 느끼고 플레이리스트를 끕니다. 나에게 필요한건 음반입니다. 1번 트랙부터 히든 트랙까지 정해진 순서로 듣습니다. 중간에 구린 곡이 있다구요, 괜찮습니다. 그 곡이 끝나면 이어질 멋진 트랙들을 기대하게 해주거든요. 인내가 크면 노력의 보상도 달더라구요. 휴대폰 배터리 없어서 지하철 40분동안 멍하니 가다보면, 입구에서 나눠줬던 찌라시가 그렇게 귀합니다. 별로 안 맞는 예시 같긴 하지만, 다시 음악을 음반으로 듣는 버릇을 키우려고 합니다. 물론 아무도 음반을 안 듣는 시대가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세상 그 어느 때보다 음악을 듣기 쉬운 때이기도 합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음악들도 모두 저작권자에게 수익이 갑니다. 안심하고 음악을 들읍시다. 싱글만 가득한 세상에 음반은 박물관에서만 보게 되기 이전에. 음반을 들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