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만큼 무책임한 말이 없습니다. 애초에 도구가 가진 특성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장인은 무슨 장인입니까? 도구간의 차이를 못 느껴도 문제고, 느끼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쿠팡에서 곰곰 찹쌀 1kg 주문해서 밥 짓는 한식 장인이랑 같은겁니다. 물론 장인이 만든 밥이면 어떤 쌀로 짓든 더 맛있기야 하겠죠. 그런데 명색에 장인이면, 고작 보통 사람보다 더 나은 정도에 만족할리가 없지 않습니까? 맛이면 맛, 미학이라면 미학. 정교함이라면 정교함의 극을 추구하는게 장인이고,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걸로 대충 슥 슥 만들어 재끼는 사람은 달인 정도라고 부릅시다. <장인 정신>이란 말은 있어도 <달인 정신>은 못 들어보셨죠? 바로 그겁니다.
2.
어찌됐건 장인도, 달인도 아닌 제가 도구를 가리는게 조금 우스꽝스럽지만. <도구를 가린다>, 혹은 <도구를 탓한다>라는 행위는 결국 결과물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한 행동입니다. 더 맛있게, 더 멋있게, 더 재밌게, 더 아름답기 위한 행동이죠. 뭐 깃펜으로 잉크 찍어서 글 쓰면 도스토예프스키고 갈축 기계식 키보드로 쓰면 방구석 여포입니까? 키보드 뿐 아니라 의자, 조명, 모니터, 심지어 글을 쓰는 공간의 온도나 채광, 심지어 룸톤까지 신경쓰는 사람이 걸작을 쓸 확률이 더 높습니다. 더 예민해서가 아니라,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환경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놈의 지긋지긋한 내면만 가꾸고 일찍 일어나고 뭐 바른 자세로 앉아있고 이런거 이전에, 허먼 밀러 의자 하나 갖다놓겠다 이거입니다.
3.
여기까지 오면, 얼핏 <최고가 최고>를 조장하는 의견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최고가 최고입니다. 하지만, <최고가가 최고>인가? 그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난 허먼 밀러보다 고등학생때 교실에서 쓰던 의자가 좋아, 건강에도 별로고 엉덩이도 아프지만 그 의자는 그때의 내 창작욕구를 끌어다주지”라는 이유는 몹시 근사합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꼭 집어넣고 싶은 인터뷰입니다. 그 사람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잖아요. 최신 컴퓨터가 아무리 좋더라도, 타자기로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도구는 그 사람을 나타내지만, 그게 도구의 높고 낮음에 있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몹시 개인적이고, 때로는 미련하기까지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라는 말은, 범인이 장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긴 도구를 보고 지어낸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뱁새가 황새의 깊은 속을 어찌 알까요.
4.
종장입니다. 장인이 되기 위해, 다큐멘터리에 필요한 도구란 무엇인가요? 퀄리티에 민감하지 않습니다. 사운드 수음은 RODE사의 와이어리스와 내장 마이크면 충분합니다. 조명은 GODOX 한대, 내레이션 녹음은 SHURE MV7이면 과분하죠. 위 도구들의 공통점은 퀄리티가 낮을지는 모르지만, 안정적으로 목표를 담아낸다는 것입니다. 더 높은 퀄리티를 위해 부스를 빌리고 녹음실에 가거나, 3점 조명 세팅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큰 맘을 먹게 됩니다. 큰 맘을 먹는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렇게도 한번 해볼까? 하고 여러가지 시도를 해볼 수 없습니다. 저의 대부분의 좋은 작업들을, 작은 맘으로 시작합니다. 작은 맘이 쌓여서 제법 그럴듯한게 만들어집니다. 판을 깔고, 수많은 스텝들이 참여하고, 공간을 대관하고, 수십만원씩 장비를 빌려 찍은 것들은 대부분 졸작이 됩니다. 투자한 비용을 회수해야 한다는 압박은 곧 저를 마냥 안전한 방향으로 걸어가게 유도합니다. 그 방향에는 새로움은 없습니다. 이미 성공한 레퍼런스를 따라하기에 급급하겠죠. 큰 맘을 먹었으니까요.
5.
짜잔, 진짜 종장입니다. 결국 제 도구의 핵심은 <작은 맘>입니다.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기동성과 편의성, 안정감과 속도를 갖춘 나쁘지 않은 퀄리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흔들림 보정을 위해 짐벌을 쓰거나, 노출 조절을 위해 ND필터를 씌우거나, 화각에 따라 렌즈를 교환하고. 팔로우 포커스를 끼우고 리그에 올리고 이런 일 없이. 화면만 보고 우와 너무 쿨하다! 감탄하지 않아도,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더 예쁜 도구는 많습니다. 하지만 마냥 예쁜 도구가 더 좋은 도구일까요? 식당의 회전율을 생각하면 좋습니다. 1시간 조리해서 만들 수 있는 멘보샤보다 10분짜리 볶음밥을 팔고 싶습니다. 내장 ND필터에 짐벌급 손떨방, 24-500 화각에 훌륭한 AF를 갖춘. 한 손으로 캐리어 끌면서 다른 한 손으로 찍을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춘. 딱히 뭐 찍을 일 없어도 가벼운 마음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무게와 크기의. 뭐 로그도 되고 조리개도 낮고 센서도 풀프… 아니 크롭… 아니 마포…. 아니 1인치라도 됐으면 좋겠지만. 명심하세요, 극장에서 나와 밥 먹으면서 아까 봤던 영화가 좋았단 이야기를 할 때. 아무도 센서 크기가 어땠단 이야기는 꺼내지 않습니다.
6.
자 진단 결과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장인이 어떻고 도구가 어떻고 핑계 잘 들으셨죠? 그거 다 제가 저에게 한 소리인거 이제 슬슬 다들 아실겁니다. 나부터 설득해야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거든요. 어디보자, 내장 ND필터가 있고. 무게는 DVX200이 2.7kg고 VX2000이 1.6kg였으니까. 1.5kg 언더로 잡고, 센서는 1인치로 할게요. 화각은 25-300이면 충분합니다. 로그 솔직히 없어도 돼요, 그런데 있는걸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럼 남은건 XA50. Z90이네요. G60? 탑핸들도 없으면서 어딜 끼어들어. 둘 다 매물은 없지만, 먼저 뜨는거 위주로 구매하겠습니다. 다들 인정하시죠? 설득 됐죠? Z90이 더 좋은거 같긴 하지만, 그 더 좋다는게 100만원치 좋을까요? S-LOG보다 C-LOG가 매력적이기도 하고. 뭣보다 소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쓰잖아요. 제가 캐논 DSLR 혐오자긴 하지만, 캠코더는 참 잘 쓰고 있답니다. 자 자 이야기 끝났어요 다들 들어가요. 어차피 다 정해져 있었던거 정리한거 뿐입니다. 다음 작품은 핸디캠으로 갑니다.